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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후피임 결정권은 누구에게?

beautician 2021. 12. 20. 11:56

 

여성의 임신을 신과 정부가 결정해야 한다는 생각

 

천주교 생각

 

사후피임약이 세상에 소개된 것이 2012년 전후 쯤으로 기억하는데 이후 윤리성 문제가 줄곧 화두가 되었습니다. 2013년 쯤에도 한 병원이 사후피임약 처방을 적극 홍보하는 게시물을 정문에 내걸면서 사후피임약을 적극적으로 처방해 줘야 하느냐, 극히 제한적으로 처방해야 하느냐 하는 찬반양론이 그해 4월 14일자 조선일보 기사에 실린 적이 있었습니다. 내가 보기엔 단순한 사안 같은데 정말 다양한 의견들이 들끓더군요

 

당시 기사 내용을 정리하자면 사후피임약의 용도는 난자가 정말 수정란이 되었는지는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일단 수정이 되었다고 가정하고 착상되기까지 걸리는 일반적 시한인 72시간 내에 사후피임약을 사용하면 임신 확율을 85% 이상 낮출 수 있는데 모 병원이 ‘응급피임관리’라는 표지를 내걸어 적극적으로 사후피임약을 처방해 줄 것임을 암시해 사회적, 도덕적, 종교적 논란에 불을 붙였다는 것이었습니다.

 

태아의 성별과 건강상태를 미리 확인해 볼 수도 있는 세상이 왔고 장래에 큰 병이 생기지 않기 위해 미리미리 정밀진단을 받을 있는 여러가지 편리한 의학적 방법도 개발되고 있습니다. 물론 상당한 비용을 지불해야 하지만요. 모든 의학적 발전의 양 극단에는 히포크라테스 선서의 고결한 정신과 극한의 영리를 추구하는 관련산업의 상업주의가 자리잡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삶과 건강은 지켜져야 할 충분한 가치가 있다’는 명제에는 이상주의자도, 자본주의자도 모두 동의할 것이라 믿습니다.

 

그런데 '삶과 건강을 지킨다'는 테마에 있어 방점은 '지킨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키려는 의지'에 있어야 합니다. 의지 없이는 아무 것도 지키지 못할 테니까요. 피임도 마찬가지입니다.

 

피임이란 아무 때나 하는 것이 아닌 만큼 대개의 경우 성행위가 전제됩니다.  이 성행위부터 ‘의지’가 중요합니다. 의지가 결여된 성행위는 강간이나 성폭력일 테니까요. 그 과정을 전후해 피임을 하느냐 또는 하지 않느냐 하는 것도 당사자들이 얼마든지 가질 수 있는 보편타당한 ‘의지’의 결과입니다. 따라서 현행법은 당연히 그 보편타당한 의지를 보호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하나 더.  피임에 있어 보호받아야 할 보편타당한 의지를 가진 일방을 정하라면 당연히 남성보다는 여성이겠죠. 임신이란 최초 협력작업이 필요하지만 그 결과 전적으로 여성의 신체에서 벌어지는 사건이니까요. 개인이나 국가가 위협을 당하거나 불이익이 예상될 경우 자위권을 발휘하는 것이 정당하다면 여성 역시 원치 않는 임신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어야 한다는 건 너무나 자명한 일입니다. 여성을 씨받이로 취급하던 미개한 고대사회의 고루한 사고방식은 이미 오래 전에 폐기되었으니까요.

 

앞서 언급한 기사에서 문제삼는 부분은 피임 중에서도 사후피임의 문제입니다.

 

사후 피임의 이유가 꼭 원치 않는 성행위를 강요당했다거나 임신으로 인해 꼭 불리한 입장이나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는 심각한 것들이어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여성이 임신을 원치 않는다면 당연히, 언제라도, 사후피임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임신은 여성의 신체에서 벌어지는 사건이니 여성이 임신을 하느냐, 또는 유지하는냐에 대한 전적인 결정권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이어야 합니다. 정부 당국이나 종교단체, 사회단체들이 아무리 윤리문제를 떠든다 해도 원론적으로 사후피임을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정부나 교회, 병원이나 복지단체가 아니라 임신 당사자인 여성 본인이어야 한다는 거죠. 그렇게 전적인 권리를 지닌 당사자가 임신과 피임에 대해 잘못된 판단을 한다면 그건 그것대로 결정에 대한 전적인 책임을 지면 되는 것이고요.

 

사후피임약 사용으로 인해 여성이 의학적으로 심각한 위험에 처하게 된다면 모르되 그렇지 않은 일반적 상황에서 사후피임을 굳이 굳이 의사 처방을 받아서, 즉 의사의 결정을 받아 하거나 하지 말아야 한다는 건 그래서 웃긴 얘기입니다. 의사가 그 여성 당사자도 아니고 심지어 임신에 협력한 남성 측도 아니죠. 게다가 의사가 어느 특정 여성이 임신을 해야 하고 임신상태를 유지해야 한다는 법리적 판단을 내릴 권한을 가진 사람도 아닙니다.애당초 여성 본인 외에 다른 사람이나 기관, 국가가  그런 결정을 대신 한다는 게 말이 안됩니다. 그렇게 태어난 아기가 성인이 될 때까지 대신 책임지고 잘 키워준다면 몰라도요.

 

물론 결정에 도움이 될 조언 정도는 해줄 수 있겠죠. 하지만 거기까지입니다.

 

여성이 내려야 할 결단을 의사가 대신해 주겠다는 발상. 결국 여성의 신체의 자유와 미래설계를 결정짓는 중요한 한 부분에서 국가나 의사나 법원에게 최종 결정권을 준다는 생각. 정말 전근대적입니다.

 

하지만 이제 선진국 반열에 올라서고 국격과 소프트 파워가 하늘을 찌르는 오늘날의 한국에서 이 문제만큼은 저 기사가 나오던 2012년, 2013년에 비해 별다른 진전이 없습니다. 그 이유의 대부분이 종교계와 사회단체의 반발 때문이라 하는데 사회단체는 몰라도 2천년 동안 인간들을 옥죈 기독교, 천주교는 이제 더 이상 인생사에 간여하지 말고 스님들처럼 산으로 들어가든가, 그게 안되면 입이라도 좀 닫으면 안될까요?

 

양육과 경제적 어려움을 교회나 성당이 책임져 줄 것도아니면서 여성이 원치 않은 임신을 강요하겠다?   

 

 

2021. 12.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