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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은 허물을 벗어도 여전히 뱀 본문
찬송가는 왜 버림받았을까?
어린 시절 동국대 후문 쪽에 있던 축대가 높은 교회를 다녔습니다.
주일 예배가 시작될 때면 전자오르간이 잔잔한 선율의 찬송가를 연주했고 그러다가 시간이 되면 교회종이 울리며 예배가 시작되었습니다. 개신교 중에서도 가장 리버럴하다는 침례교단이었는데도 예배의 모든 순서는 엄숙하기 그지없었고 지루한 설교는 교장선생님 훈화처럼 좀처럼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온 몸에 좀이 쑤시기 시작할 즈음 목사님이 그날 성경구절의 일곱 번째, 여덟 번째 가르침을 역설하며 설교를 막판 절정으로 몰고가면 끝내 졸음을 참지 못했던 집사님들도 어느새 하나 둘 꺠어나기 시작했고 영원과도 같았던 예배가 마침내 끝날 기미를 보이곤 했습니다.
물론 매주 워십팀들이 예배 전 교회 강단에서 분위기를 한껏 끌어올리며 콘서트장 같은 공연을 펼치는 요즘 교회에선 상상도 할 수 없던 시절의 일입니다. 보수적이기 그지없는 교회도 그만큼 세상과 세태의 변화를 어느 정도 수용하면서 변화해 온 것입니다.
그래서 오랜만에 교회에 나오거나 다른 지역에서 이사해와 부득이 현지 교회를 처음 나오게 된 사람들은 여러가지 새삼스럽거나 생경한 일을 겪게 되는데 그중 하나가 학교에서 배운 북한 5호담당제와 비슷한 ‘구역’이란 조직입니다. 의외로 기독교와 공산주의는 서로 통하는 게 꽤 있습니다. 신도들을 교회로 불러들이는 것만으로 부족해 각 지역에 조직을 구축해 사는 곳 중심으로 관리하며 이탈을 방지하고 사상을 통제하려는 것이죠.
그런데 그 구역이라는 것이 시대에 따라, 또 지역에 따라 '순'이니 '지역'이니 여러 번 명칭이 바뀌더니 또 한동안은 속회' 또는 '속모임' 이라 하다가 어느 날부터 ‘목장’으로 바뀌었습니다. 누가 교회에서 ‘목장모임’을 하자고 하면 아는 교인들끼리 목장에 소젖도 짜고 피크닉을 하는 것이 아니라 7번 목장 남성들기리 모여서 구역예배를 하자는 뜻입니다. 처음엔 그 말을 알아듣지 못해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는데 학교도 군대도 회사도 아닌 곳에서 날 성별이나 사는 곳 또는 직업으로 분류해 내 동의도 없이 어딘가에 소속시키려 한다는 게 어처구니없었습니다. 교회가 정말 신도들을 목장의 소나 돼지처럼 짐승 취급을 하기 시작한 걸까요?
‘구역’ 못지않게 큰 변화를 겪은 것은 찬송가입니다.
교회만큼 음악이 넘쳐나는 곳은 드뭅니다. 지금도 크게 달라진 건 없습니다. 하지만 최근 몇 년간은 교회에서 찬송가를 불러본 기억이 없습니다. 내가 학생시절에도 기존 엄숙한 찬송가들에게 비해 훨씬 대중적인 멜로디를 담은 가스펠송이 교회에 들어와 크게 각광을 받았지만 그렇다고 가스펠송이 찬송가를 몰아내진 않았습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그 의미가 사뭇 애매한 ‘워십’이 시작되면서 찬송가는 이제 교회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가는 추세입니다.
Worship은 본래 ‘예배’란 뜻인데 워십팀은 그렇게 밴드나 팀을 이루어 공연하듯 찬양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럼 그들이 공연 이외의 예배 순서는 worship이 아닌 걸까요? 단지, 단어와 용어의 문제일 뿐이겠지만 요즘도 성서 뒤엔 찬송가 한 권이 부록처럼 붙어 나오는데 최근 몇 년간 그 부분을 펴볼 일이 없었습니다. 아마도 내로라 하는 워십팀을 운용하는 큰 교회들도 대부분 그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예전엔 주일예배 때마다 최소한 찬송가 네 편쯤은 기본으로 불렀던 것 같습니다. 예배 시작할 때와 끝날 때, 헌금주머니 돌릴 때, 그리고 온전히 찬송가만 부르는 순서도 주보에 별도로 한 두 군데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 찬송가를 접하는 것은 성가대가 편곡된 찬송가를 불러줄 때뿐입니다. 성서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며 예나 지금이나 똑같이 쓰이지만 찬송은 하나님의 노래가 아니어서 몰락하고 만 것일까요?
찬송가를 도태시킨 것은 결국 ‘트랜드’입니다. 교회식으로 말하자면 ‘세태’라는 것이죠 사람들이 사는 세상인 이상, 교회 역시 시대와 취향의 변화에 따라 취사선택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찬송가는 '낡은 것'이 되어 도태되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다윈의 종의 기원은 그 이론적 과학적 기반이 좀 의심스럽긴 하지만 찬송가가 적자생존의 원칙에 입각해 워쉽에 밀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과정에 있음은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그럼 찬송가는 정말 1낡은 것일까요?
어메이징 그레이스(나 같은 죄인 살리신)의 은혜로움과 찬송가 곳곳에서 천년의 교회사를 거슬러 올라가는 그레고리안 챈트의 정교한 화음, 백발이 성성한 목사님들이 가끔 설교 중에도 군가처럼 힘주어 부르는 옛 찬송가 선율, 영화 <타이타닉>에서 침몰하는 배의 갑판 위에서 마지막까지 울려 퍼지던 현악 사중주 연주자들의 ‘내 주를 가까이하게 함은’ 같은 곡은 너무나도 감동적인데 왜 결국 버림받고 만 것일까요?
https://www.youtube.com/watch?v=ur9JHXirUBs
요즘 예배를 시작할 때 예전의 엄숙함과 장엄함 대신 찬양팀 또는 워십팀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나와 드럼과 전자오르간과 전자기타로 이루어진 밴드에 맞춰 대중가요 콘서트 느낌을 물씬 풍기며 분위기를 띄웁니다. 그들의 율동과 기계음이 교회 강단을 지배하고 내가 너희들을 예배에 몰입시키고야 말겠다는 명백한 의도가 선곡 배열에서도 분명히 보이는데 안타깝게도 그 무대에서 표현하기 어려운 찬송가는 아이러니컬하게도 너무나 성스러워 결국 버려진 것입니다. 물론 워십팀은 찬송가가 더 이상 자기들 무대에서 연주하기에 너무 무겁고 낡았기 때문에 선곡하지 않았다고 하겠지만요.
그게 특별히 잘못된 건 아닙니다. 단지 나 역시 낡은 사람이기에, 친숙하고 정감 어린 찬송가의 퇴출이 못내 아쉬울 뿐입니다.
6천 년 전 천지창조의 하나님과 2천년전 유대 땅에서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믿는 기독교는 고대의 종교가 대부분 불과 2백년도 되지 않은 찬송가들이 낡았다며 퇴출시키는 것은 밖으로 보이는 외면이 얼마나 의미없는 것인가를 반증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뱀이 허물을 벗더라도 본질이 그대로이니 여전히 뱀인 것처럼. 그래서 찬송가나, 구역, 순, 속 같은 이름들은 사실 뱀 허물처럼 벗어버려도 아무 상관없는 것들인데 그동안 그토록 소중히 여겼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중요하다면 사실 그 역사적 흔적인 예루살렘 성지는 결국 허물에 불과한 것인 것 그걸 되찾겠다고 중세시대 몇 백 년간 몇 차례씩이나 십자군을 일으켜 수많은 살상과 파괴를 일삼았던 셈입니다.
그 옛날 아브라함 시대의 예배란 광야에 단을 쌓고 소나 양의 각을 떠서 불로 소각해 그 연기를 신이 흠향한다는 개념으로 올리는 제사였지만 오늘날의 교회가 쌓은 '제단'엔 강단과 십자가만 놓여있지 제사를 지내기 위해 짐승의 각을 뜰 제단은커녕 불 붙일 가스곤로 하나 준비되어 있지 않은 것처럼, 허물을 벗고 진화해 간 미래의 교회에서 찬송가는 그저 화석으로만 남을지도 모릅니다.
2021. 11. 16
(2017. 11.5 원본의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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