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서와 소설 사이, 그 어디쯤

애당초 내 인생에 뭔가 쉽고 만만한 게 있을 리 없었다.

한국인으로 살아가기

세바시 인생질문 에세이

교회의 우상

beautician 2021. 11. 14. 12:09

천지를 창조하셨던 하나님

 

 

지금까지 여러가지 이유와 용도로 재질이나 디자인, 크기, 내구성이 각각 다른 정말 다양한 봉투들을 사용해 봤지만 역시 그 중 최고 품질은 누가 뭐라해도 교회 헌금봉투였습니다.

오래 전에 쓰던 가방들을 정리하다가 그 안에 넣어 둔 채 잊고 말았던 헌금봉투가 여러 장이 나왔습니다.  당시 달러나 영수증을 넣어두는 용도로 사용하곤 했는데 1년 넘게 써도 여전히 새것 같아 그 내구성에 감탄하곤 했습니다. 특히 십일조 봉투는 겉면에 매주 얼마를 냈는지 적어서 예배시간에 회중석의 신도 개개인 앞을 돌며 지나가는 헌금 주머니에 넣었다가 다음 주에 거대한 우편물 보관함이나 사물함 비슷한 곳의 내 이름 적힌 홈에서 그 봉투를 다시 회수하는 방식으로 짧게는 몇 개월, 길게는 1년을 사용해야 하니 튼튼하게 만드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그리고 헌금봉투가 튼튼한 교회는 교회재정도 그에 비례해 튼튼해져 가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내구성 높은 헌금봉투를 볼 때마다 전쟁과 기아, 가난과 천재지변까지 견뎌내는 세상에서 가장 튼튼한 봉투를 만들어 반드시 헌금을 걷어 내고야 말겠다는 교회의 비장한 의지 같은 것도 함께 느끼곤 했습니다.

 

그러다가 성탄절이나 추수감사절, 부활절 같은 절기가 다가오면 예의 십일조 봉투 말고 교회 입구에서 나누어 주는 주보엔 특별헌금 또는 감사헌금이란 두꺼운 폰트의 글씨가 새겨진 또 다른 봉투가 함께 끼어 있곤 합니다. 헌금 낼 것을 혹시라도 잊을까봐 교회가 미리 챙겨주는 것이죠.

 

그런 고급스럽고도 화려한 봉투가 주보에 끼어있는 것을 보면 미안한 마음에 뭐라고 꼭 넣어야 될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게 인지상정입니다.

 

자카르타의 한인교회들은 길고 긴 르바란 연휴가 닥치면 인쇄소들이 몇 주씩 문을 닫아 주보조차 제대로 찍지 못하는 상황에 처하곤 하는데 그럴 때면 어쩔 수 없이 대충 등사한 주보를 나누어 주지만 예의 화려하고 튼튼한 헌금봉투를 끼워주는 것을 빠뜨리는 일만은 절대 없습니다. 그쯤 되면 그건 강인한 의지라고 밖에는 표현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런 강철 같은 의지와 목적의식이 있었으므로 개신교가 한국에 들어와 마침내 재벌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 이제 하나님은 지상의 그 누구보다도 돈에 목을 매는 초라한 존재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목사님들은 그런 하나님을 챙겨드리려고 신도들을 설득하고 회유하고 협박하고 겁박하다가 심지어 해서는 안될 욕설까지 뱉곤 합니다. 하나님의 소유를 도둑질하지 말라며 멀쩡한 사람들을 절도범으로 몰아가면서 말이죠.

 

물론 그런 협잡은 옛 전설 속의 어떤 남자가 수천 년 전에 지었다는 어떤 죄가 사실은 너희 원죄라고 사기치며 죄 없는 순결한 인류를 몽땅 죽어 마땅한 죄인으로 매도할 때부터 이미 알아봤던 것이긴 합니다.

 

그 옛날, 말씀 하나로 천지를 창조하셨던 하나님은 왜 이제 돈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을까요? 그렇게 전락한 것이 하나님이 아니라면 헌금을 요구하며 사람들에게 잠자리채 닮은 헌금 주머니를 들이미는 교회들이 타락하고 만 것이겠죠.

 

오늘도 삼라만상을 지켜보면서도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영겁의 세월 속 여전히 침묵하고 있는 신은 온갖 감언이설과 통치욕망에 ‘교리’라는 이름을 덧씌워 자신의 이름을 딴 우상들을 세워놓고 섬기고 있는 지상의 교회들을 보며 속으로 한숨짓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교회가 신을 믿는다면서도 실제로는 세상 그 어떤 기관, 단체들보다 돈과 권력을 쫓기 시작한 것은 이미 오래 전의 일입니다. 그리고 그 사실은 루터와 칼뱅의 종교개혁 전에도, 그리고 그 후에도 별로 변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정말 신을 만나려면 우선 헌금을 멈추고 교리부터 버려야 할 지도요.

 

세상의 모든 교회가 사라지는 날, 우린 마침내 신의 영광이 이 땅에 강림하는 것을 볼 수 있게 되지 않을까요?

 

2021. 11. 13

(2019. 3. 10의 원본 수정)

 

 

 

'세바시 인생질문 에세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뱀은 허물을 벗어도 여전히 뱀  (0) 2021.11.19
교만한 간증  (0) 2021.11.18
골막이 상한 사람들  (0) 2021.11.13
다시 글쓰기  (0) 2021.11.11
이스라엘 건국 정당화를 위한 영화  (0) 2021.1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