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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당초 내 인생에 뭔가 쉽고 만만한 게 있을 리 없었다.

한국인으로 살아가기

세바시 인생질문 에세이

골막이 상한 사람들

beautician 2021. 11. 13. 10:46

 

새로 돋는 팔

 

  

영화 ‘고지전’(2011년, 장훈 감독, TPS컴파니)은 한국전쟁 막바지 참상과 전쟁 속 일그러진 인간군상을 흥미진진한 스토리와 역동적인 영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흥행에서도 일정부분 성공한 이 영화는 그러나 그 강렬한 메시지와 여운에도 불구하고, 당시 정권에 의해 좌파영화로 낙인 찍혔습니다.

 

 

아마도 그 이유는 비록 그것이 스크린에서 벌어지는 허구이며 예술의 영역임이 분명했고 영화 전반에 반전 메시지가 흐르고 있었지만 류승룡 김옥빈 등이 멋지게 또는 안타깝게 연기한 일부 북한군들, 그리고 자기가 살기 위해 아군에게 기관총을 갈기고 무모한 명령으로 희생을 강요하는 상관을 살해하는 국군 하사관들의 모습을, 그게 개연성이 있든 없든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한없이 엄숙하고 자기만 한없이 잘난 사람들이 높은 자리에, 또는 밥상 머리에 앉아 자기 생각이 옳다고 똥고집을 부렸기 때문이었을 것 같습니다.

 

 

마침내 휴전협정이 맺어졌지만 그 발효시간까지 약간의 여유가 있었다는, 너무나도 간단한 이유 때문에, 그래서 그 전에 한 치의 땅이라도 더 차지하려던 양쪽의 ‘국익의 논리’에 내몰린 병사들이, 그 긴 전쟁의 마지막 날 더욱 참혹한 전투를 치러야 했고, 그렇지 않았다면 반드시 살아남았을 수많은 생명이 스러져간 것을 안타까워하는 것에 쓰기에도 모자란 우리 감정을 전쟁이 반 세기도 훌쩍 지난 시점에 관객들끼리 좌우를 나누어 삿대질하며 허망하게 소비하고 있었던 겁니다.

 

<고지전>을 보면서 내가 새삼 깨달았던 사실은 전쟁을 시작하는 것은 물론, 그 전쟁을 끝내는 것조차 엄청난 숫자의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몰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역시 누군가의 양심이나 신념을 거스르는 깨달음이었을까요?

 

그런데 스크린을 압도하던 그 수많은 죽음과 파괴의 영상들 속에서 한 전쟁고아 소녀의 말 한 마디가 무엇보다도 내 마음을 흔들었습니다.


"이 팔도 나중에 크면 새로 나오죠?"

 

폭발물이나 총격으로 팔 한쪽이 팔꿈치에서 잘려 나간 여자아이가 막사 천막 문간에 서서 주인공에게 이렇게 묻고 있었습니다. 상처에 새 살이 돋아나듯, 유치가 빠지면 새 치아가 자라듯 영화 속 그 아이는 잘린 팔도 참고 기다리면 언젠가 다시 새 팔이 돋아날 것이라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스파이더맨 같은 수퍼히어로 영화들을 보면 잘린 팔 다리 한 둘쯤은 간단히 다시 자라니 복원되는 것을 수없이 볼 수 있지만 그런 일은 현실에서 결코 벌어지지 않습니다. 물론 그렇기 때문에 현실에서 얻을 수 없는 사람들의 갈망과 욕구들이 영화와 소설과 만화와 TV에서 구현되고 무한 재생산되는 것이겠죠. 하지만 <고지전>은 영화이면서도 그런 판타지를 허락하지 않았고 아이는 자신이 평생 불구로 살아야 한다는 뼈아픈 진실을 알고 무너져 내립니다.

 

어느날 주일날 교회 주보에서, 제거된 갈비뼈도 골막이 손상되지 않으면 새로 자라난다는 기사를 읽고서 불현듯 고지전의 그 소녀가 생각났습니다. 험한 사고를 당해 이식수술을 포함한 대형수술을 받았던 그 기사의 주인공은 이식수술용으로 채취한 자기 갈비뼈가 새로 자라났다는 사실을 토대로, 하나님이 에덴에서 잠자던 아담의 갈비뼈를 하나 뽑아 이브를 빚어 만들었을 때 그 뽑힌 갈비뼈가 결국 다시 자라났기에 그때의 아담도, 오늘날의 남자들도 여자들과 똑같은 수의 갈비뼈를 가지고 있게 되었다고 성서와 과학을 적당히 뒤섞어 창조과학론 비슷한 주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럼 팔도 골막을 남겨놓고 절단하면 새로 자라날까요?

하나님이 옛날에 아담에게 그랬던 것처럼 내 동의도 받지 않고 누가 골막만 남겨놓고 갈비뼈를 하나 떼어가면 다시 자라날 테니 아무일 없었던 것처럼 넘어가면 되는 걸까요?

 

그러다가 조금 다른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우리 몸에는 다시 자라나는 기관도 있지만 한번 잘라내면 영영 재생되지 않는 기관도 있다는 것이 어쩌면 매우 불공평한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기왕 창조할 때 모두 재생되고 다시 자라날 수 있도록 디자인했으면 좋았을 텐데 그렇게 하지 않은 창조주가 좀 인색하고 째째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겁니다. 전쟁에서 팔다리를 잃은 군인도, 공장에서 손가락이 잘린 노동자도, 질병으로 장기의 일부나 신체의 일부를 들어낸 사람들도 조금 시간이 지나면 다시 조직이 자라나 100% 복구되도록 디자인되었다면 세상은 조금 더 행복하고 긍정적인 곳이 되지 않았을까요? 물론 그건 절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세상은 지금과는 많이 다른 모습으로 돌아가고 있었겠죠. 모든 것이 치유되고 회복되는 세상 말입니다.

 

창조주는 무소불위한 존재가 아니라 애당초 그렇게 디자인할 능력이 없었던 걸까요? 아주 일부를 제외하곤 신체 대부분이 재생되거나 원상복구되지 않는 현실은 우리의 결과적으로 가치관과 세계관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아무리 옳은 일이라 해도 선뜻 앞에 나서 솔선수범하기보다는 몸을 사리고 방어적으로 사는 게 우리들 인생의 디폴트가 된 것입니다.

 

한번 파손되면 결코 재생되지 않는 것은 비단 유형의 신체기관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양심이나 염치처럼 우리 몸 어딘가, 몸 안이 아니더라도 나에게서 물리적으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붙어 있을 게 분명한 무형의 기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한번 양심과 염치를 버린 사람들이 언젠가는 어떤 계기를 통해, 목사님들이라면 자기 설교를 듣고서, 그 양심과 염치가 다시 자라나 회복되기를 기대하곤 하지만 대개의 경우 그런 일은 좀처럼 벌어지지 않습니다.

 

합리적인 사고나 남의 아픔을 공유하고 함께 슬퍼하는 공감능력을 애당초 개발하지 못한 사람들은 선천적으로 기형을 갖고 태어난 사람들과 같습니다. 애당초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 시간이 지난다고 저절로 생겨날 리 없는 겁니다. 그래서 어떤 감정적, 정신적 결함은 정상으로 돌아오지 않는 것 같습니다. <고지전>이나 <변호인>, <택시운전사>, <군함도> 같은 영화들을 좌파영화라 매도했던 고매한 사람들, 세월호 희생자 부모들과 자녀들을 유족충이라 폄하하며 그들의 단식투쟁현장을 폭식투쟁으로 더럽히며 조롱하던 사람들, 누군가를 블랙리스트로 묶어 배제해 온갖 불이익을 당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즐거워했던 사람들은 현실사회에서 어쩌면 세련된 양복에 멋진 넥타이핀을 하고 있을지 모르나 잘려나갔거나 애당초 존재하지 않았던 그들의 양심과 염치는 <고지전> 고아소녀의 잘린 팔처럼 영원히 다시 돋아나지 못합니다. 골막이 상한 겁니다.

 

2014년 9월 4일 세월호 부모 유민아빠 단식투쟁 천막 앞에서 벌어진 일베 회원들의 폭식농성  

 

2021년 11월, 철의 삼각지대에서 최후의 고지전이 끝나고 휴전협정이 발효된 지 67년 만에 마침내 종전선언을 하자는 논의가 무르익고 있습니다. 종전선언은 한 시대의 종언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를 여는 특이점이 될 터이니 모든 상처가 아물어 퇴원하는 순간이 아니라 후유증을 치료하고 회복하기 시작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 생각됩니다. 오래된 상처에 새 살이 돋아날까요? 부러지고 잘라진 뼈들이 다시 자라날까요? 골막이 남아 있을까요?

 

그리고 67년만의 종전선언이 ‘시기상조’라고 초를 치는 바다 건너의 악의 축과, 온갖 얄팍한 이유를 대면서 종전선언을 반대하는 일부 정치인들의 망가진 양심과 뒤틀린 세계관은 과연 회복이 가능할까요? 그들은 골막이 문제가 아니라 그들 자체가 ‘길막’인데 말이죠.

 

 

2021. 1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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