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서와 소설 사이, 그 어디쯤

애당초 내 인생에 뭔가 쉽고 만만한 게 있을 리 없었다.

한국인으로 살아가기

인니 민속과 주술

귀신

beautician 2017. 5. 20. 09:00

 

 


 

2010년 쯤이었던 것 같습니다.   8시경 사무실 내 방에 혼자 앉아 직원들을 기다리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열심히 결산서류를 작성하면서 모니터 한 켠에 열어 놓은 창으로는 인터넷을 검색하는 중이었는데 자연히 상체는 모니터 방향으로 조금 수그린 자세였죠.

 

그런데 갑자기 무언가가 이마 한 가운데에 닿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는 벌러덩 뒤로 넘어가 버리고 말았어요. 마치 누가 손가락을 이마에 대고 너 도대체 뭐 하는 놈이야?’ 하면서 힘껏 밀어 버린 것 같은 느낌이었죠. 등받이가 있는 의자였기 망정이지 끌라빠가딩 새 식당 마님가 1층의 목로주점 긴 의자처럼 등받이가 없었으면 등 뒤 벽에 원쿠션 먹고 방바닥에 머리부터 거꾸로 비상착륙을 시도할 뻔한 상황이었습니다.

 

급히 정신차리고 자세를 수습하면서 주위를 돌아보니 당연히 아무것도 없고…, 당황한 자신이 너무나 우스워서 한참 동안을 혼자서 깔깔 웃었답니다. 이젠 앉아서도 그 정도로 현기증이 날 나이가 된 모양입니다.

 

조금 지나 마케팅 직원들이 하나 둘 돌아와 일일보고서를 준비하는데 무심코 이 얘기를 해 줬죠.

 

얘들아. 아마도 이 동네에 손가락 귀신이 있는 모양이야. 나한테 불만 있는지 아까 내 이마를 사뿐히 밀어 붙이더라구. 나가 떨어질 뻔 했어. 그래도 내가 누구냐? 내가 이렇게 후방낙법으로…”

 

농담이었는데 직원들 표정이 하나 둘씩 창백해지기 시작합니다. 말 잘못 꺼냈다는 생각이 확 들더군요.  아니나 다를까 조금 지나니 직원들이 정색을 하고서 얘기를 시작합니다.

 

사실은요. 아래층 익산이 그러는데 이 건물에 처녀귀신이 있데요. 가끔은 밤마다…”

전에 제가 밤늦어 집에 못가고 사무실에 잘 때도 저쪽 화장실 쪽에 그림자가몸 하나에 목이 두 개에 손바닥처럼 머리에 뿔 다섯 개가…”

 

말 잘못 꺼낸 거 맞습니다.  사무실에 귀신이 있다는 사실을 내가 증명해 준 셈이 되어 버렸거든요. 다음 날부터는 직원들은 밤 늦으면 사무실에 전화해서 내가 있는 걸 확인해야 돌아 오더군요. 그로부터 직원들이 스스럼없이 밤늦게 사무실 문 열고 들어오게 되기까지는 꼬박 두 달 정도가 걸렸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그동안 나는 낮에 외출했다가도 해 떨어지기 무섭게 사무실에 돌아와 바로 곁에서 눈을 까뒤집고 나를 노려보며 똬리 틀고 있을지도 모를 보이지 않는 귀신과 함께 긴 밤시간을 오손도손 보내며 직원들에게 우린 사무실에 귀신따윈 없고 있더라도 내가 귀신보다 더 무서운 놈이야, 봐 봐, 밤마다 내가 혼자 와 있지만 끄떡 없잖아?’ 라고 행동으로 강변해야만 했답니다

 

하지만 전혀 안 무서웠다면 거짓말이고 사실 몇 번은 괜히 소름이 돋곤 했습니다. 갑자기 소름이 돋고 으스스한 기분이 들면 그건 귀신이 그 때 우리 몸을 투과해 지나가기 때문이라는 얘기를 어느 영화에선가 봤던 것 같습니다. 그 생각을 하니 더 무서워지죠. 그리고 또 생각해 보니 귀신이 주변에 나타나면 온도가 떨어져 입김이 하얗게 뿜어져 나온다고 하던데밤에도 땀이 뻘뻘나는 인도네시아, 에어컨을 아무리 초강력으로 틀어 놔도 여기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Y

 

귀신이 있을 것 같다는 뉘앙스만 풍겨도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온갖 자기 경험을 얘기하면서 상상력까지 덧붙여 마치 그걸 기정사실화 시키는 것 같아요. 예전 코린도 건물에 있을 때에도 그랬습니다.

 

지금은 꽉 차서 임대할 사무실이 남아있지 않은 상태라지만 예전에 제가 그 건물 5층의 작은 방하나를 임대해 들어갈 때만 해도 코린도 본사가 있는 7층 이상이든가? 만 다 들어차 있었고 그 아래층들은 대충 텅텅 비어 있었어요. 당시 동남아를 강타한 외환위기의 후유증이었죠.  5층에는 그나마 아직 몇 개의 사무실들이 있었는데 하나 둘 나가기 시작하더니 신원에벤에셀 자카르타 사무실의 이사를 마지막으로 제 사무실 혼자 텅빈 5층의 한 귀퉁이에 덩그렁이 남아 버리고 말았지요. 그리고 코린도는 저녁 5~6시가 되면 에어컨은 물론 불까지 다 꺼버립니다. 연등신청은 너무 비용이 많이 들고…, 그래서 우린 별도로 충전식 전등을 달아 놓고 더위와 싸우며 밤일을 했어요.

 

그런데 소등 후 화장실에 갈 때마다, 사무실 문 잠그고 퇴근할 때마다, 5층 전체에 불빛이라고는 엘리베이터 로비의 희미한 보조등 한 개뿐. 왠지 뒷덜미를 뭔가 끌어당기는 것처럼 간지럽고(전문용어로는 캥긴다라고 합니다만…) 뒤돌아 보면 자연계에서는 절대로 있어서는 안될 뭔가가 있을 것 같기도 하고…, 그런 기분 아시죠? 그러다가 한 번은 엘리베이터 가까이까지 와서 뒤를 돌아본 적이 있습니다. 저희 사무실은 좁은 복도를 맨 끝에 있는데 당연히 어두워서 방금 잠그고 나온 문의 형태도 잘 보이지 않았지만 거기에 뭔가 시커먼 그림자 같은 것이 꿈틀거리고 있었어요. 빨리 시선을 앞으로 돌렸지요. 또 소름이 돋았습니다. 그리고 그 대목에서 심하게 갈등을 때리지 않을 수 없었어요. 엘리베이터가 도착할 때까지 찬송가를 부르고 있어야 할지 애국가를 불러 재껴야 할지

 

다음 날 아침 1층에서 경비원에게 이 건물 귀신 현황에 대한 브리핑을 요구했더니 경비원은 빙긋이 웃으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하더군요.

 

원래 5층을 다니는 귀신이 있어요. 우리 경비원들도 순찰 돌다가 가끔 보곤 하는데, 하지만 뭐 해를 끼치는 귀신은 아니니 너무 걱정하실 건 없구요.”

 

코리도의 경비원들은 직원들이나 내방객들 뿐 아니라 건물 내 내장된 사내 귀신들에 대해서도 비교적 상세한 신상명세를 가지고 있는 모양대단합니다. 혹이라도 코린도 5층에서 꿈틀거리는 그림자를 만나게 되시는 분들은해는 끼치지 않으니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답니다. 그 놈, 저도 좀 아는 놈이거든요.

 

얼마 전 실로 오랜만에 만난 후배와 저녁식사를 하면서 또 귀신얘기를 들었습니다. 자신이 관리하는 공장에서 벌어진 귀신들린 직원에 대한 사건 얘기였어요. 공장에서 작업 중에 졸도해 쓰러져 중얼거리는 말이 유창한 영어에 이어 만다린 중국어까지…. 중학교도 제대로 마치지 못한 20대초반의 극빈층 여자 종업원에게서 기대하기 어려운 언어능력이지요. 귀신들린 걸 이 나라 말로는 Kesurupan 이라고 한답니다. 사족이지만 Youtube 동영상을 검색하다 보면 귀신들린 여자에게 이슬람 성직자가 엑소시즘을 행하는 인도네시아발 동영상 몇 개를 만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류의 사건은 저도 예전에 간접적으로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의 사건은 좀 더 심각한 양상으로 흘러갔지요. 열악한 건강상태로 더위에 푹푹 찌는 짜꿍 KBN 지역의 봉제공장에서 일하다가 갑자기 실신한 여종업원이 화란어를 중얼거리기 시작하고 보건실에서 정신을 차리고 다시 작업라인에 들어갔다가 이번에는 여러 명이 동반실신, 이번엔 화란어와 중국어로 국제 컨퍼런스…, 직원들 눈에는 공장 천장 위를 너울거리며 날아다니는 검은 그림자들과 회전식 선풍기 위에 똬리를 틀고 앉아 돌아가는 선풍기와 함께 새빨간 눈을 휘번득거리는 새까만 귀신들이 보였다고 하는데 급기야 생산 라인 단위로 비명을 지르며 통째로 실신하면서 조업불능상태에 빠져 들었습니다. 이 사건은 심각한 후유증을 보여 다음날 아침 출근한 직원들이 공장에 들어가려 하지 않아 결국 가용한 모든 종교의 성직자들을 불러 들여 축신행사를 갖고서도 부족하여 급기야 실신했던 종업원들 대부분을 해고하면서 며칠이 지난 후에야 간신히 공장이 정상화되었습니다.

 

거기에 비하면 이 후배가 겪은 사건은 비교적 규모가 작았어요. 첫 실신자를 바로 집으로 돌려 보냈고 비슷한 증세를 보이는 종업원들을 재빨리 정리하면서 확산을 막았다니까요.

 

그런데 문제는 처음 실신한 여종업원이었답니다. 귀가시키기 전, 제 한 몸 가누지도 못하고 휘청거리면서도 경비원들의 완강한 제지를 뿌리치고 사장을 만나겠다며 막무가내로 사장실에 들어선 이 여종업원이 뭔가에 씌인 게 분명한 산란한 눈초리로 제 후배를 노려보며 하는 첫 마디가 이랬답니다.

 

, 00, 내가 너랑 할 말이 있는데…”

 

분명한 한국말로 말이죠. ….허걱!

귀신이 곡할 일이죠? 그 말을 후배에게 전해 듣는 순간 또 온 몸에 소름이 돋았습니다.

 

요즘 인도네시아 영화들도 많이 다양화되고 있는 추세이지만 역시 아직 대세는 뽀쫑(Pocong)과 꾼틸아낙(Kuntilanak) 등 귀신영화인 듯 합니다. 뽀쫑은 망자의 시신을 흰 천으로 둘둘 말아 긴 베게 또는 대형 흰 소세지처럼 만든 것이고 꾼틸아낙은 임신한 여자의 태내 아기를 빼앗아 가거나 그 아기에게 빙의하려는 처녀귀신이에요. 각각 3편까지 나와 나름대로 트리올로지(Triology)를 완성했고 급기야 에일리언 vs 프레데터에 버금가는 명작 뽀쫑 vs 꾼틸아낙이 탄생하기에 이릅니다.  영화관에서는 한 5일 정도 상영되었습니다.



 

인도네시아의 공포영화가 이렇게 업그레이드 되어 가듯 실물 귀신계의 귀신들도 앞서 언급한 외국어 귀신들처럼 계속 업그레이드 되면서 쌔빠지게 해외까지 나와 일해보겠다는 우리 동포들을 괴롭힙니다.

 

고국을 떠나 이 머나먼 남쪽 땅에서 모든 위기를 혼신의 힘을 다해 극복해야 하는 와중에 모든 업무가 인도네시아의 고질적인 부패와 맞물려 더욱 어려워지고 숨통을 조여오는 판국인데 그것도 부족해서 우린 인도네시아 귀신들하고도 맞짱까지 떠야 하는 상황입니다


인도네시아, 참 만만찮은 나라입니다.


 

2008. 12.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