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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당초 내 인생에 뭔가 쉽고 만만한 게 있을 리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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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바시 인생질문 에세이

이 아이들의 미래

beautician 2021. 10. 11. 11:13

5년

 

아침에 좀 늦게 일어났더니 문자들이 잔뜩 와 있었는데 그중 메이가 보낸 내용에 눈길이 갔습니다. 전날 밤 차차가 잠을 못자며 고민하길래 물어보니 내가 아픈 것 같다며 걱정하더랍니다.

 

이번 주엔 매일 시내일정이 있었는데 어제는 마침 다시 시내 나가는 길에 오래 보지 못했던 차차와 마르셀을 보러 잠깐 들렀습니다. 최근 조금 일에 치이다 보니 아이들 들여다보는 게 조금 뜸해졌는데 그럴 수록 보고싶은 마음이 커지더군요. 아이들도 그럴 것이라 내 마음대로 생각해 버렸습니다. 그렇게 아이들 잡에 도착한 게 오전 10시 반. 아직 온라인수업 중이서 잠깐 한 번씩 안아주고 갈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건 너무 싱거운 느낌이라 원래는 월초에 주는 용돈을 미리 주고 5분도 안돼 바로 시내 약속장소로 출발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아이들 눈에 비친 나는 3개월간 운동으로 건강해진 모습이 아니라 살이 빠져 어딘가 아픈 듯 수척해진 얼굴이었던 모양입니다. 하긴 살을 뺄 땐 뱃살보다 얼굴살이 먼저 빠지니까요.

 

하지만 좀 더 찬찬히 생각해 보면 이젠 차차도 내가 자기 가족들을 돌봐주는 보호자 정도의 막연한 느낌보다는 좀 더 현실적인 생각을 가질 나이가 된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내가 개입하지 않으면 당장 현재 생활유지가 힘들어진다는 사실같은 거 말입니다. 그래서 내 건강은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 아내와 싱가포르의 아이들과 메이네 아이들 모두의 공공재인 셈입니다. 물론 차차가 그렇게 계산적으로 생각했다는 건 아니지만 그런 생각도 걱정의 일부를 이루고 있었을 겁니다. 사실, 그래야 하고요.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받아들이는 건 좀 매몰찰 수도 있지만 세상 살아가려면 꼭 필요한 일이기도 합니다.

 

나도 객관적으로 상황을 둘러보면 내가 인도네시아에 있을 수 있는 시간은 뭔가 대단한 성과를 내거나 장기 프로젝트에 참여하지 않는 한 어쩌면 5년도 남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5년 후엔 차차가 대학교 2학년, 마르셀은 고등학교 2학년이 됩니다. 여전히 돈이 많이 들어갈 때죠. 아이들을 생각하면 여기서 10년 쯤은 버텨줘야 합니다.

 

그러고 보면 사실 고민은 차차가 할 게 아니라 내가 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매번 차차가 예쁘다고 말하는 게 딸자랑하는 팔불출 같을 지 몰라도 최소한 내 눈엔 그렇게 보입니다. 그리고 이제 막 아름다운 여인으로 피어나는 불우한 가정의 여자아이들이 자카르타에서 대개 어떤 운명을 겪게 되는지 잘 압니다. 그러니 차차가 행복하려면 아름답지 않거나 불우하지 않아야 하는데 아무래도 후자여야 하지 않겠어요? 

 

오늘도 시내 미팅을 다녀오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5년 후를 바라볼 방법은 J사장 프로젝트에 있을까요? 술라웨시 광산에 있을까요? 아니면 밀려드는 조사보고서나 현지소설 번역이나  또 다른 글쓰기에 있을까요?

 

 

2021. 9.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