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서와 소설 사이, 그 어디쯤

애당초 내 인생에 뭔가 쉽고 만만한 게 있을 리 없었다.

한국인으로 살아가기

세바시 인생질문 에세이

흉가

beautician 2021. 10. 12. 11:59

먼저 살고 있던

 

 

빨라디안 아파트

1997년에 시작된 태국발 외환위기가 1998년 아시아를 휩쓸고 그 후로도 몇 년간 심각한 후유증을 남겼는데 인도네시아에서는 수하르토를 하야시킨 1998년 5월의 민주화운동, 그리고 그와 동시에 벌어진 자카르타 폭동을 촉발시켰습니다.

 

폭동 당시의 아수라장은 말로 다 할 수 없지만 환율이 역변해 루피아가 똥값이 되면서 수많은 기업들이 도산했고 많은 프로젝트들이 중간에 중단되었습니다. 북부 자카르타의 안쫄 근처엔 당시 공사가 중단된 아파트 콤플렉스가 최근까지도 한 개 서 있었습니다.

 

내가 사는 끌라빠가딩에도 빨라디안(Paladian) 아파트가 70% 정도 공정까지 갔다가 중단된 채 몇 년 동안 흉물스럽게 방치된 적이 있습니다. 원래 이름은 머나라뚜주(Menara 7 = seven towers)였다가 이후 2004년 이를 인수한 다른 업체가 결국 완공시켜 빨라디안 파크(Paladian park)라는 이름으로 바꾸었습니다. 하지만 판매나 입주가 다른 곳에 비해 좀 미진했는지 일곱 개 타워들 중 두 개는 아파트형 호텔로 개조된지 몇 년 되었습니다.

 

그런 얘기가 있어요. 집의 형태를 하고 있는데 사람이 오래동안 살지 않으면 사람 아닌 다른 것이 들어가 살게 된다고요. 오래 버려진 폐가들이 흉가가 되는 이유도 비슷합니다. 영화로도 나온, 하지만 이제는 철거된 곤지암 정신병원이 대표적이죠. 

 

 

빨라디안 아파트에 사람들이 입주하면서 원래 들어와 살던 사람 아닌 것들은 부득이 쫓겨나고 말았지만 끝내 나가지 않은 것들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2006년 전후 해 입주하기 시작한 사람들 사이에 귀신 목격담이 심심찮게 들려왔습니다. 그게 벌써 15-16년 전의 일입니다.

 

얼마 전 내가 사는 모이 콤플렉스 안 프렌츠워크 아파트에 살다가 지척인 빨라디안 아파트로 이사간 모 기업 이사가 톡을 보내왔습니다. 코로나 시대 속에서도 봉제공장을 성공적으로 돌리고 있었지만 그 육체적 정신적 피로가 보통이 아니었겠죠. 특히 독신여성인 그분에겐 편안한 숙소가 필요했는데 전엔 꽤 많던 한국인들을 거의 다 들여보내고 이제 숙소를 혼자 쓰게 되어 좀 규모가 작은 빨라디안으로 이사갔던 겁니다. 그런데 이사한 지 반년 쯤 되었을 때 보내온 톡 내용은 이랬습니다.

 

매일 밤 잠을 자려 하면 침대 옆에 뭔가 우두커니 서있다는 거였어요.

용기가 나지않아 눈을 뜰 수도 없는데 거기 누군가 있는 건 분명하고 가끔은 귓가에 뭔가를 속삭이기도 한다는 겁니다.

 

"그래도 나쁜 놈은 아닌지 해꼬지는 안해요."

 

말은 그렇게 해도 얼마나 무섭겠어요? 그러니 귀신 전문가인 나한테 상담을 해온 겁니다. 아마 이미 몇 개월간 그런 상황이 계속되었던 것 같습니다. 난 그 놈이 지난 15년 넘게 임대료 한 푼 안내고 거기 먼저 살고 있던 사람이 아닌 아무개씨라고 확신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얘기할 수는 없었어요. 더 무서워할 테니. 

 

사실 거기서 귀신 때문에 놀랐다는 사람들은 많았지만 큰 사고가 난 일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설령 귀신이 있다 해도 해를 입히는 놈이 아닌 건 분명해 보였지만 귀신 전문가인 내가 그거 귀신이라고 말하는 순간 이분이 앞으로 어떤 느낌으로 퇴근할지 뻔했습니다.

 

"우선 침대 방향을 좀 바꿔 보시죠. 가끔은 친구들도 좀 불러서 밤에 같이 지내시고 무엇보다 영양가 있는 음식 먹고 자기 전에 조금 운동을 하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코로나 상황에서 공장 관리하고  집에선 혼자 지내는 상황이 길어지니 그런 신경증이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그쪽으로 몰아가기로 했습니다.

 

"우리같은 보통 사람들이 귀신 만나는 건 벼락 맞는 것보다도 확율이 적어요. 그 동네 귀신들 모두 고향으로 돌아갔다는 얘기 들은 지 오래입니다. 그러니 그런 생각 마시고 좀 더 건강한 생활을 하도록 해 봐요."

 

내가 그렇게 말하니 조금은 불안한 마음이 가셨을지 모릅니다.

그 이후 그 이야기를 다시는 물어보지 않았습니다. 그걸 물어본다는 건 나 스스로 확신하지 못하는 모습이기 쉬웠으니까요. 그분도 그후 더 이상 얘기하지 않고 있는데 올해가 가기 전 일년에 한 두 번 정도 갖는 식사모임을 이번에도 하게 되면 그땐 지맛(jimat)을 하나 쥐어줄까 합니다. 지맛은 부적이나 그런 용도로 쓰이는 물건입니다.

 

직효가 있는 건 작은 은장도인데 여기서 그걸 구하긴 어려우니 잘 드는 작은 잭나이프를 사줄까 합니다. 귀신들은 끝이 날카로운 물체를 두려워한다는 속설이 있어요. 그래서 귀신들이 가장 좋아하는 임산부나 아기들은 은장도 같은 것을 지니고 다니거나 주변에 두는 경우가 많아요. 귀신을 예방하는 거죠. 말하자면 코로나 접종입니다. 한국도 그런가요?

 

암튼, 오래 살지 않던 집이나 막 신축한 건물에 입주할 때 고사를 지내거나 목사님 모시고 예배를 드리는 건 다 나름대로의 이유와 의미가 있습니다.

 

지맛(Jimat)으로 쓰이는 주술용 끄리스 단검

 

 

 

2021. 9.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