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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바시 인생질문 에세이

자카르타 시내에서 눈싸움 거는 남자들

beautician 2021. 10. 5. 12:39

길바닥 눈싸움

 

이 눈싸움  

 

인도네시아에 와서 처음 5년쯤 지나는 동안 가장 적응하기 어려운 것은 거리에서 이상한 객기를 부리는 현지인들이었어요. 특히 차를 몰고 다니다 보면 좁은 골목 한 가운데로 걸어가면서 뒤에서 차가 와서 경적을 울려도 돌아보지도, 피하지도 않는 사람들이 꽤 있었습니다. 귀머거리라서 들리지 않는 게 아니라 매우 기분 나쁜 표정으로 슬쩍 돌아보고는 계속 그대로 길 한가운데를 걸어갔습니다. 내가 너 따위한테 길을 비켜줄 것 같아? 이런 느낌이었습니다.

 

도로를 횡단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명백히 자신이 교통위반을 하고 있으면서도 운전자를 노려보며 어슬렁거리며 지나는 사람들과 자주 마주쳤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자카르타 주민들이 다 건달들이냐 하면 실제로 얘기를 나눠보는 대부분의 현지인들은 사근사근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물론 일부 쁘레만(Preman)들, 즉 양아치들을 제외하고 말이죠. 심지어 그 쁘레만들조차 조금 안면이 생겨 담뱃값을 좀 챙겨주거나 정말 담배를 한 두 곽 던져주면 이런저런 편의를 도와주며 싹싹하게 굴었습니다.

 

그래서 도로에서 지나는 차량에게 도전하는 사람들은 도대체 무슨 생각인가 의아해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차량에 달려들어 욕설을 하거나 싸움을 거는 것도 아니었어요. 그냥 노려보고 기분 나쁜 티를 내고 혼자서 욕지거리 같은 걸 나지막이 중얼거릴 뿐이었죠.

 

예전의 블록엠(Blok M) 같은 우범지대를 지나 몰이나 식당에 들어가려면 길가에서 지나는 사람들과 눈싸움을 벌이는 이들도 종종 보았습니다. 나도 그들과 눈이 마주친 경험이 수십 번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그들은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눈싸움을 걸었습니다. 한국 같으면 당장 싸움이 붙을 상황이죠. 하지만 대개는 내가 눈싸움을 이겼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많다는 걸 깨닫고 있던 차에 10미터쯤 앞에서 나를 노려보는 사람을 발견하면 나도 같이 노려보았고 그 앞을 지나가는 게 아니라 그 사람 앞에 서서 계속 노려보았습니다. 물론 그러다가 멱살잡이까지 간 적이 한 번 있긴 했는데 대개는 노려보던 상대방이 시선을 돌리거나 자리를 피했어요.

 

누굴 노려보거나 누가 날 노려보는 건 그리 유쾌한 경험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렇게 노려보는 이유도 알 수 없었고요. 그 놈들이 시비를 거는 거라면 매번 길바닥에서 나랑 싸움이 붙었을 텐데 그런 경우는 거의 없었습니다. 내가 외국인이었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그들이 지나는 차에 도전하고 지나는 사람에게 눈싸움을 거는 데에 뭔가 다른 이유가 있기 때문이었을까요?

 

그러다가 많은 시간이 흘러 내가 현지 무속과 주술에 대해 조금 지식을 갖게 되고 그래서 신문에서 만나는 온갖 이상한 기사들을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되면서 그게 뭐였는지 대충 이해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깊은 밤 문닫은 가게나 가정집에 발가벗고 들어가 물건을 훔쳐 나오는 도둑의 동영상이 떠돈 적이 있는데 범인은 어떤 주문을 외우면 발가벗은 상태에서 절대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다는 그건 특정 주술을 믿는 사람이었던 겁니다. 길바닥 눈싸움도 그런 주술적 배경이 있는 게 분명하다고 생각되었습니다.

 

현지 빈민촌이나 우범지대의 청소년들이나 청년들은 주술에 쉽게 빠집니다. 그들이 무슬림이 아니라서가 아니라 한국에서도 철학관에 다니거나 타로점 보러 가는 기독교인들이 있는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일반적으로 많이 알려진 주술은 산뗏 저주술로 상대방을 죽이거나 병들게 하는 것이지만 그걸 직접 시전해보려는 일반인들은 그리 많지 않을 듯합니다.

 

오히려 자기를 차버린 애인에게 복수하기 위해 그(녀)의 마음에 병적인 사랑을 심거나 회사 상사, 담당교수에게 호감을 사기 위해 귀신이나 부적의 힘을 비는 뻴렛주술(ilmu pelet)과 위험에 처했을 때 총과 칼이 몸을 상하게 하지 않고 죽을 상황이 되어도 죽지 않도록 조화를 부리는 일무끄발(Ilmu kebal) 같은 것을 시도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특히 길바닥 양아치나 조폭들, 절도, 강도 등 범죄자들은 잡히지 않고 범죄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치명적 부상을 피할 목적으로 일무끄발 주술을 배우거나 그런 힘을 담은 반지나 단검 형태의 부적을 두꾼으로부터 사들입니다.

 

그럼 이제 그로 인한 플라시보 효과나, 혹은 정말 귀신의 가호를 입어 그들은 천하무적이 된 듯한 느낌을 갖게 됩니다. 그럼 그걸 시험해 보고 싶어지는 게 인지 상정입니다. 그러니 거리에 나와 사람들을 노려보면서 눈싸움을 걸고 사람들이 자기 시선을 피하면 부적이 효과가 있다고 느끼면서 하루 종일 그 짓을 반복하며 자신이 새로 얻은 능력(?)을 즐기는 겁니다. 차량에 도전하는 것도 아마 마찬가지일 거고요. 눈싸움에 지면 부적이나 주문에 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면서요.

 

그걸 모르고 지난 세기에 자카르타 시내를 오가면서 거리 모퉁이나 몰 휴게소 같은 곳에서 그런 인간들과 수십 번 눈싸움을 했던 것입니다.

 

일무끄발을 과시하는 가장 대표적인 방식은 차력.  

 

2021. 9.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