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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리셰와 스테레오타입
일견 만만찮아 보이는 이 단어도 사실은 별거 아닙니다.
클리셰(cliché)란 극 초반에 실종된 등장인물이 후반부에 살아 돌아온다든가 격투기 영화에서 주인공이 악당을 때려 눕힌 후 ‘해치웠나?”라고 중얼거리면 악당이 벌떡 일어나 더 엄청난 기세로 반격해 오는 것 같은 ‘뻔한 전개’를 말합니다.
스테레오타입(Stereotype) 역시 구태의연하도록 전형적인, 그래서 신선도란 찾아볼 수가 없는 설정이나 인물, 극의 전개를 뜻합니다. 얘를 들면 좀비는 머리를 쏴야 죽는다든가, 해병대나 특수부대 출신 또는 참전용사들은 사회에 복귀한 후에도 언제든지 살인병기 같은 전투력을 발휘한다든가, 슬래셔 영화에서 촉새처럼 깐죽거리는 놈, 괴팍한 놈, 비만, 동양인, 흑인은 차례로 죽고 대개의 경우 바람직한 체형의 백인여성이 맨 마지막에 남는 식의 고정관념, 정형화된 논리 같은 것을 뜻하죠.
그래서 뻔하지 않은 것을 해보려는 시도는 언제나 눈물겹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뛰는 좀비’였죠. 언젠가부터 달리기 시작한 좀비들은 <28일 후>, <28주 후> 등에서 가장 충격적인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하지만 곧 그것도 스테레오타입이 되어 모든 좀비들이 달리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영화제작자들은 생각하는 좀비(내 친구 파이도, 웜바디스), 조직력을 갖춘 좀비(아미 오브 좀비), 좀비 발생원인이 바이러스에 의한 것이 아니라 악령의 빙의에 의한 것(REC2) 등의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 냈던 겁니다.
오늘날의 창작자들은 인류역사상 수많은 작가들과 콘텐츠 크리에이터들이 만들어 놓은 클리셰와 스테레오타입을 피해 오리지널 작품을 만들려고 온갖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인물이나 기계를 등장시키는 정도를 뛰어 넘어 아예 새로운 세계를 통째로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죠. 그런 창작자들 눈에 세상 모든 것들이 진부하지 않을 리 없습니다.
난 요즘 래퍼들이 영어이름을 달고 나오는 게 너무 웃깁니다. 딘딘, 데프콘, 마이크로닷, 슬리피, 등등, 심지어 본명으로 상당한 인지도가 있던 김구라 아들 동현이도 ‘래퍼 그리’라는 이름을 달고 나왔습니다. 모름지기 한국 래퍼라면 영어 이름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은 이제 진부한 스테레오타입이 된 지 오래입니다.
하지만 문화방면은 기본적으로 창의적인 세계인만큼 우리가 요구하거나 데모를 벌이지 않아도 또 다시 알아서 새로운 변화의 물결이 몰려오면서 발전을 거듭할 것입니다. 그건 비단 문화뿐이 아닙니다.
사실 세계의 거의 대부분은 클리셰와 스테레오타입을 타파하고 새롭게 변해 나간다는 측면에서, 수십 년 넘게 뭔가 공격받으면 ‘상대 당의 정치공작’이라고 진부한 반응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정치판만큼 절망적이진 않습니다.
인도네시아에서 부동산 개발 개발을 하려는 J사장 앞에 나서 일을 성사시켜 주겠다는 브로커들은 이 산업의 가장 대표적인 스테레오타입과 클리셰를 보여줍니다.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이 한 달 내에 원하는 결과를 만들어주겠다며 이전에 만났던 모든 브로커들을 사기꾼으로 만들어 버리고 아주 크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작지도 않은, 웬만한 현지 회사원 2-3년치 연봉 정도를 착수금으로 요구하죠. 약속했던 1개월은 온갖 이유를 대며 3개월이 되었다가 6개월이 되기도 합니다. 대개는 그 이상 가지 않고 관계가 깨지지만 때로는 1년도 넘어가는 경우도 생기죠. 그건 정말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고 반복되는 일입니다
J사장이 그렇게 만난 브로커에 대해 처음엔 그 능력을 칭송하며 기대하다가 2주쯤 지나면 욕을 섞어가며 하기 시작해 두 달쯤 되면 인간말종으로 여기며 온갖 욕설을 퍼붓는 것도 지난 몇 년 간 열 번 이상 단 한 번의 예외도 없이 겪었던 지겨운 클리셰입니다.
그런데 여러 편의 영화에서 똑 같은 클리셰가 반복된다면 그 영화를 찍은 여러 감독들을 비난해야 할지, 그런 영화들을 선택하는 내 영화취향을 탓해야 할지 잘 생각해 봐야 할 일입니다.
2021. 9.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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