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으로 살아 가기
옷태가 나는 이유 본문
차차의 고민
여자들 많은 데에서 할 얘기가 아닐지도 모르지만 일단 꺼내 봅니다.
내 형제들은 모두 딸만 둘씩 낳았지만 난 아들 딸을 얻었습니다. 지금 싱가포르에서 열심히 생활하고 있는 아이들이 아직 어릴 때 워낙 생활에 허덕이다 보니 내가 거의 신경쓰지 못하는 동안 양육은 거의 다 엄마가 도맡았습니다. 그 와중에도 아들은 내가 남자라서 그나마 대하는데 단순하고 간단했지만 딸과의 관계에는 변수가 많았습니다. 아이들에겐 하늘같던 아버지가 갑자기 미워지거나 어려워지는 순간이 반드시 찾아오는 모양인데 어릴 때 나만 보면 뽀뽀세례를 퍼붓던 딸이 커가면서 냉랭해지기도 하고 살가워지기도 하면 저건 또 무슨 조화일까 하고 고민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차차와 마르셀을 만났을 때 일단 한번 아들과 딸을 다 키워본 베테랑 아빠로서 얘네들에게도 더 잘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역시 생각대로 되는 건 하나도 없습니다. 아무래도 상황이 그래서인지 아이들은 자기들 원하는 걸 나한테 100% 다 말하지 않는 눈치였고 나 역시 늘 뭔가 미진한 듯한 느낌입니다. 전에 외출로 바쁠 때엔 그나마 오가면서 하루에 한 번쯤 얼굴을 봤지만 요즘은 코로나가 창궐해 집에 갇히고 또 마감에 치이면서 나름 노력하지 않으면 일주일에 몇 번 보기도 힘들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이제 고등학생이 된 차차입니다. 이 친구는 커가면서 점점 더 자기가 원하는 걸 엄마인 메이에게만 얘기합니다. 어차피 돈 드는 일이라면 내가 개입해야 하는데 말입니다. 1년쯤 전부터 매달 용돈을 주기 시작했는데 집에 웬만한 일들은 자기 용돈에서 해결하려고 애를 씁니다. 그리고 금식도 자주 합니다. 뿌아사(Puasa) 금식은 꼭 금식월에만 하는 건 아닙니다. 기독교인들의 금식기도처럼 신에게 가까이 가려 하는 무슬림들은 스스로를 정결케 하는 일환으로 뿌아사를 단행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유독 얘들이 거의 매일 뿌아사를 한다는 겁니다.
“집에 음식 떨어졌어? 왜 애들 계속 뿌아사야?”
“고민이 많으니까 그런 거죠.”
메이가 대답하는 그 고민이란 건 학교 등록비, 진학비용, 집 임대연장 등등 어른들이 걱정해야 하는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이제 고등학교 1학년이 된 차차가 아직 어릴 때 혹시 학교에 내야 할 돈을 늦게 내서 곤란한 경험을 했던 것은 아닌가 기억을 더듬어 보기도 했습니다. 이번엔 집 임대연장 때문입니다. 지난 2월에 이사왔으니 아직 1년 되지 않았지만 집이 마음에 들면 2월 이전에 미리 임대연장하는 조건으로 임대료 인하를 해주기로 했는데 집주인이 연장하려면 9월에 하자고 한 겁니다. 하지만 적지 않은 돈이라 나도 단번에 만들어 주기 어려운 금액입니다. 코로나로 출근일수가 적어진 메이로서는 엄두도 내지 못한 상태고요. 그래서 일단 미리 내긴 하되 2-3개월에 나눠서 내겠다고 하고 그 첫 번째 결재를 다음 주에 하기로 한 겁니다. 다음 주 수요일인 9월 22일은 차차의 16번째 생일이기도 합니다. 생일선물도 사주고 용돈도 주고 식료품도 사다 주고 학비도 내주는 중이라 차차는 내가 임대료 낼 돈이 없을까봐 걱정하는 겁니다. 그래서 저리 열심히 금식기도를 하는 거죠.
차차의 또 다른 고민은 맞는 속옷이 없다는 겁니다. 엄마랑 같이 가서 사고 싶은데 메이는 주말에도 영업이나 수금하러 출근하는 일이 잦았고 나랑은 절대 백화점 속옷 코너에 갈 수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얼마 전에 메이가 쉬는 날에 맞춰 함께 끌라빠가딩에 있는 몰에 갔습니다. 12세 미만은 방역규정상 몰에 입장금지여서 11살 마르셀은 부득이 집에 떼어 놓아야 했습니다. 차차에겐 미리 생일선물 주는 셈으로 속옷과 신발을 사주기로 했습니다. 차차는 밀리터리룩 검정 군화에 꽂혀 있었어요.
사실 난 사회생활을 레인웨어 수출로 시작해서 옷 만드는 공정을 대충 알고 치수도 눈썰미로 대충 맞출 수 있습니다. 물론 그게 속옷과는 거리가 좀 멀지만 최소한 차차가 중학교 2학년에 B컵을 쓰기 시작했다는 것 정도는 눈치채고 있었습니다. 메이가 속삭입니다.
“이젠 그것도 작데요.”
C컵을 사야 한다는 말입니다. 사실은 그게 차차 옷태가 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몰 안에 있는 백화점 속옷 코너 여러 군데를 전전하는 동안 난 멀찍이 떨어져 딴청을 떨었습니다. 원래 여자들 옷 사러 올 때 절대 같이 안온다는 게 내 철칙인데 말이죠. 결국 여자들 답게 충분한 시간을 들여 속옷을 사고, 신발은 H&M에서 본 것이 생각보다 너무 비싸다며 차차가 손사래를 쳐서(사실 내가 못 사줄 가격도 아니었는데) 사지 않는 대신 그 신발 두 켤레 살 정도 돈을 메이에게 살짝 쥐어 주었습니다.
밖에만 나오면 나한테 찰싹 달라붙어 다니는 차차에게 집에 돌아가는 길에 살짝 물었습니다.
“신발은 나중에 엄마한테 사달라고 해. 속옷은 맘에 드는 걸로 샀어?”
“네, 이제 다 들어가요.”
그날도 집에 돌아가 마감원고와 씨름하면서도 다 들어간다는 그 말이 자꾸 떠올라 내내 입가에 미소가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2021. 9.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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