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얕은 지식이라도 그게 어디냐

beautician 2021. 9. 28. 11:16

일당백

 

딴지일보가 직영하는 딴지마켓에서 파는 '잘난척' 시리즈 책이 요즘 인기랍니다. 역사, 철학 또느 다른  어떤 특정분야에 딱히 깊이 들어가 그 원리를 다 꿰뚫지 않더라도 어디 가서 누구랑 얘기할 때 꽤 있어 보이게 얘기할 수 있도록 설명해 상식을 북돋워 줄 목적으로 쓴 책이라 합니다.

 

좀 편법인 것 같기도 하고 함량도 부족해 보이기도 하지만 정보의 홍수 속에 사는 요즘 세상에 어쩌면 그건 매우 요긴한 것 같습니다.일례로 두 시간짜리 영화를 15분 짜리로, 16부작 드라마를 30분짜리로 요약한 소개 동영상들이 요즘 유튜브에서 높은 조회수를 기록하는데 바쁜 세상에 원본 찾아 볼 시간 없는 이들에겐 최소한 그 영화나 드라마가 어떤 내용인지 알 수 있게 해주거든요. 그러다가 그 짧은 영상으로 성이 차지 않을 정도로 흥미진진한 것들이 있으면 그런 건 나중에 따로 찾아 보게 되죠. 

 

그게 요즘 세상 세태인 모양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는 사이트 게시판에 쓴 긴 글은 별로 읽는 사람들이 없어요. 그래서 글 앞이나 뒤에 두 줄 요약 또는 세줄 요약을 해놓은 걸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건 아마도 기업에서 아무리 복잡한 사안이라도 A4 한 장으로 보고하라는 것과 같은 맥락일 듯 합니다.

 

2020년엔 연초부터 중국어 학습 유튜브를 열심히 들었습니다. 하지만 알파벳으로 된 언어가 아니라 글자를 익혀야만 하는 언어를 운전하면서 듣는 것 만으로 익히는 건 벅찬 과업입니다. 그래서 결국 올해는 다른 것을 들으면서 가끔 중국어를 다시 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지만 올해 들어 중국어 채널에 들어간 게 열 번도 채 되지 않습니다.

 

중국어 대신 듣게 된 것이  '일당백'이란 독서 채널입니다. '일생동안 당신이 반드시 읽어야 할 백권의 책'을 줄인 이름인데 시즌 1이 끝나고 이제 시즌 2도 거의 막바지에 가고 있으니 거의 200권쯤 한 겁니다.

 

 

지난 1년 동안 시즌 1 백 권은 착실히 찾아 보았고 포맷이 좀 바뀐 시즌 2는 식상하기 시작하면서 조금 시들해지고 있습니다. 한 권이 2~4편의 유튜브로 구성되는데 같은 책인데도 각 편 마다 제목 표시가 애매해서 순서대로 찾아보기가 어렵고, 익숙한 진행자들의 목소리를 듣는 것도 그 채널을 자주 찾는 이유인데 세 명의 진행자 중 한 명이 시즌 2부터 비상근으로 돌다가 급기야 완전히 다른  사람들로 교체된 점 등이 시즌 2의 패착이라 보입니다.

 

하지만 이 채널을 통해 최소한 130권은 족히 될, 내가 읽어보지 않은 책들의 저자와 책의 배경, 그리고 내용 일부를 들어 알게 되었다는 건 분명 큰 소득입니다. 일당백에는 그래서 감사한 마음이 있습니다.

 

일당백의 오리지널 진행자들은 서울대 출신 교수 정박님, 매불쇼로 유명한 정영진은 여기서 정프로란 이름을 달았고, 여기서 인기를 얻어 다른 채널로 진출하면서 결국 일당백을 떠난 정선영은 정미녀란 닉네임이었습니다. 문제는 정미녀였는데 아줌마들이 질색하는 소위 '색기' 흐르는 목소리에 명품 가방 매니아, 지식이나 상식이란 하나도 없는 무식 그 자체의 젊은 여성이 일당백의 회를 거듭하면서 점점 지성에 눈 떠가는 성장과정이 듣는 사람에겐 소소한, 그러나 매우 정겨운 재미였습니다. 정미녀가 떠나고 나니 일당백의 재미는 사실 반감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사실 정미녀의 얄팍한 지식을 비웃는 건 나를 비웃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시즌 1을 들으면서 거기 등장한 100권의 책 중 내가 읽어본 것은 거의 없었고 책 제목을 들어보기라도 한 것들이 20권도 채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나마 간략하게라도 책의 소개를 들으면서 최소한 어디 가서 아는 척, 잘난 척은 할 수 있을 거란 생각에 몰래 미소지은 적도 여러 번입니다. 그래서 딴지마켓의 '잘난 척'시리즈 첵들이 불티나게 팔린다는 게 충분히 이해됩니다.

 

 

2021. 9.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