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서와 소설 사이, 그 어디쯤

애당초 내 인생에 뭔가 쉽고 만만한 게 있을 리 없었다.

한국인으로 살아가기

세바시 인생질문 에세이

입금이 모든 걸 가능케 하리라

beautician 2021. 9. 29. 13:05

아침부터 불금

 

마감

 

요즘은 금요일이 밝으면 마치 주말이 온 것 같은 기분이 들곤 합니다. 물론 늘 그랬던 건 아닙니다. 예전처럼 주중에 출근했다면 절대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을 텐데 ‘재택근무’를 하니 느끼게 되는 일입니다. 특히 조간신문매체들과 일하면서요.

 

조간신문은 토요일과 일요일엔 신문발행을 하지 않으니 그 전날인 금요일과 토요일엔 기사를 보낼 필요가 없습니다. 그 대신 월요일 조간용 기사를 일요일에 보내야 하죠. 요즘은 다시 거의 기사를 보내지 않고 있는 아시아투데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월요일 조간 기사를 일요일 오전 9시(한국시간)까지 발제해야 하는데 시간대가 맞지 않는 국가의 통신원들에겐 발제 먼저 해서 컨펌 받은 후 다시 기사를 쓰는 게 원고료에 비해 품도 많이 들고 시간도 많이 뺏기는 일이기도 하고 전날 일어난 일을 오늘 아침에 발제해 내일 조간에 싣는 것이니 기사의 신선도도 크게 떨어지는 방식입니다. 아무튼 그래서 아시아투데이에도 금, 토요일에는 발제하거나 기사를 보낼 필요 없습니다. 오히려 그런 날 기사를 보내면 핀잔을 듣기도 하죠.

 

그래서 금요일의 자유가 새삼 피부에 와닿는 건 역시 자카르타경제신문에 매일 보내는 번역기사를 금-토에는 보내지 않아도 된다는 부분입니다. 이 작업이 여러 현지신문들의 기사들을 훑어보면서 주요 기사들의 핵심내용을 파악하고 리스트업 해서 편집장과 협의해 번역할 기사 한 두 개를 선정하면 그걸 번역하고 퇴고해 제출하는 게 보통 두 시간 반에서 세 시간 정도 걸리는 작업인데 그걸로 보통 오전시간을 거의 다 잡아먹죠. 금요일엔 그걸 안해도 됩니다.

 

그냥 안하는 것뿐이라면 안도감이 그렇게 크진 않을 텐데 역시 오전시간이 온전히 내 처분에 맡겨진다는 사실이 소중하게 여겨지는 건 여가를 즐길 여유가 생겨서가 아니라 밀린 마감을 쳐낼 시간이 그만큼 더 생기기 때문입니다.

 

마감이 적으면 적은 대로 먹고살 길이 막막해지니 걱정이지만 여러 건의 마감이 동시에 목을 조르면 그건 또 그것대로 죽을 맛입니다. 특히 한달에 한번 제출해야 하는 원고나 보고서들은 대개 방대한 조사와 번역작업이 선행되어야 하고 그런 준비작업이 다 된 상태에서 A4 여섯 장에서 15장 사이, 많으면 50장짜리 원고를 쓰고 다듬어야 하는데 그걸 쓰는 시간만 사흘쯤 걸립니다. 그러니 금요일과 토요일의 자유로운 오전은 그런 마감에 쫓기는 상황에서 막힌 숨통을 터주는 황금 같은 시간입니다. 물론 오전 몇 시간 동안 엄청난 분량을 쳐낼 수는 없습니다. 자료를 기반으로 해야 하는 보고서의 한계죠. 소설이나 수필은 발동만 제대로 걸리면 오전 몇 시간 동안 원고지 100장 정도도 쓸 텐데요^^

 

그런 와중, 지난 밤에 그간 알고 지내던 영화감독에게서 디즈니플러스 드라마 스크립트 작업을 함께 해보겠냐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시나리오 쪽은 내 전문이 아니지만 인도네시아 무속을 중심으로 한 인도네시아 드라마를 한국식 터치와 기법으로 만들어 보자는 겁니다. 마감에 목이 졸려 죽을 지경이지만 입금은 모든 걸 가능케 합니다. 게다가 인도네시아 무속, 귀신은 내 전공.

 

디즈니플러스(Disney+Hotstar)는 네플릭스, 아마존프라임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미국 메이저 OTT-VOD 기업으로 인도네시아엔 작년에 상륙해서 활발하게 현지업체들과 콘텐츠 제작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어쩌면 그쪽에 한 발 걸칠 기회가 온 건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금요일과 토요일의 자유로운 아침시간은 앞으로 더욱 소중해질 것 같습니다.

 

 

2021. 9.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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