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서와 소설 사이, 그 어디쯤

애당초 내 인생에 뭔가 쉽고 만만한 게 있을 리 없었다.

한국인으로 살아가기

세바시 인생질문 에세이

'영'은 신이 세상과 사람들에게 심어 놓은 데이터값

beautician 2021. 9. 18. 12:15

영혼의 시체

 

 

인도네시아 귀신들 공부를 하다 보면 가장 확실하게 알게 되는 것은 우리가 아는 귀신들 대부분이 '사람이 죽어서 된 원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건 한국귀신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민화와 전설 속에 등장하는 귀신과 마물들이 요즘 한국사회엔 거의 출몰하지 않는 것 같은데 인도네시아에는 아직 꽤 많습니다. 인도네시아이 전국구 메이저 귀신들을 꼽으라면 투톱 스트라이커인 꾼띨아낙(출산-임신 중 죽은 여인의 원귀), 뽀쫑(무슬림 장례법에 따라 염하여 천으로 둘러 싼 미이라 닮은 귀신)이 죽은 자의 원귀라는 심증이 깊지만 나머지 건드루워(산 속에 사는 무시무시한 색귀), 뚜율(이기 도둑귀신), 웨웨곰벨(아기 납치해 키우는 귀신), 즐랑꿍(초혼술에 사용되는 인형 또는 그렇게 불러들인 귀신) 등은 아무래도 죽은 사람의 영혼일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런 심증이 굳어지는 건 예를 들어 웨웨곰벨이나 재물주술에 사용되는 부토이조 같은 귀신들은 영인지 마물인지 알 수 없지만 아무튼 존재방식은 인간과 매우 다르지만  자바 전역에서 목격담에 등장하는 인상착의가 비슷해 그게 사람같으면 '인종', '부족' 같이 분류될 만한 상당부분 같은 유전자를 가진 집단 소속의 한 개체일 것 같다는 부분에서입니다. .

 

그런 식으로 따진다면 꾼띨아낙이나 뽀쫑도 사실은 우리가 생각해 온 귀신과는 좀 다른 종류일지도 모릅니다.

 

난 개인적으로 영혼체백 사상이 상당히 그럴듯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유가에서 나온 사상인지 불교 쪽인지 잘 모르지만 아무튼 인간은 영, 혼, 체, 백으로 이루어진 진 존재라는 것입니다.

 

'체'는 말 그대로 내 몸. 즉 하드웨어

'혼'은 '체'라는 하드웨어를 움직이게 하는 윈도우 같은 소프트웨어.

 

실제로 우린 이 두 가지를 가동시키며 살아갑니다.그러다가 어느날 죽음이 찾아오면 '체'는 매장되거나 스러지고 '혼'은 그렇게 찾아온 죽음이란 이름의 문을 열고 그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거죠. 그래서 어찌보면 진정한 '나'는 '혼'을 얘기하는 것 같습니다. 천국이나 지옥, 윤회 등의 개념은 '혼'에만 해당사항 있다는 얘기죠..

 

 '혼'과 '체'의 특징은 성장과 쇄락에 있습니다 

하지만 '영'은 좀 다른 것 같습니다. 그건 마치 처음부터 나라는 존재 자체에 찍힌 낙인, 표시, 꼬리표 같은 것입니다. 태어난 순간부터 죽을 때까지 전혀 변하지 않는 나란 존재의 가치, 정체, 기본값 같은 것 말입니다. 이건 사람의 성품이나 교육, 환경 같은 것과 전혀 관계가 없는 어떤 것입니다. 사실 나보다는 나를 지은 누군가에게 더욱 의미있는 것 같습니다.

 

신은 어쩌면 게이머인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거대한 무언가를 만드는 건축가일지도요. 수많은 데이터가 필요한데 우리가 사용하는 컴퓨터처럼 그 데이터를 넣어둘 그릇이 필요한 겁니다. 그래서 사람에게도 동물들에게도 나비에게도 풀에도 그 데이터들을 심어놓는데 그걸 우리가 '영'이라 부르는 건지도요. 에덴동산에서 신이 우리에게 신을 불어넣은 게 아니라 컴퓨터 칩을 심은 겁니다.

 

아무튼 그래서 신은 우리가 사는 동안 언제든 내가 가진 '영'을 조회하고 사용하다가 내가 죽으면 그릇이 깨졌으니 다른 그릇으로 옮기거나 이미 더 이상 사용할 필요가 없는 데이터가 되었다면 폐기하겠죠. 영은 혼과 체 못지 않게 삶에 필수적인 것인만큼 영이 폐기되면 혼과 체는 기능을 잃게 됩니다.

 

그래서 어쩌면 요즘 전세계를 휩쓰는 산불, 태풍, 홍수 같은 것들은 신이 대량으로 데이터를 폐기하는 과정인지도 모릅니다. 무수한 우주가 태어나고 사라지는 것 역시 하드웨어를 새로 장착하거나 디가우징하여 증거를 인멸하는 행위일지도요.

 

사람이 죽으면 '체'가 바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매장이나 화장을 통해 자연의 한 요소로 돌아가는 것처럼 '혼'도 죽음의 문을 열고 피안으로 건너가면서 전에 있던 곳에 그림자를 남기는데 그걸 '백'이라 합니다. 혼의 그림자, 그 남은 조각, 얼마 지나고 나면 사라지게 될 흔적이죠.그걸 '유령'이라 부릅니다.

 

백이 너무나 선명하거나 그 유효기간이 지나치게 길어 몇 세기 전 죽은 기사들과 귀족들의 유령들이 유럽의 고성들에서 가끔 발견된다고도 하지만 필연적으로 사라지고 말 흔적일 뿐인 거죠. 무당들이 지내는 천도제는 지상에 남은 영혼을 저승으로 배웅하는 굿이 아니라 그 흔적을 빨리 지우는 프로세스일지도요.

 

그래서 말하자면 백이란 혼이 남긴 시신이나 마찬가지인데 그것이 한국에서는 처녀귀신 몽달귀신으로 인도네시아에서는 꾼띨아낙과 뽀쫑으로 불리며 한동안 사람들을 놀래키다가 사라지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영.혼.체.백.

이거 생각해 내신 조상님들, 정말 대단하지 않습니까? 

 

 

 

 

2021. 9.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