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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당초 내 인생에 뭔가 쉽고 만만한 게 있을 리 없었다.

한국인으로 살아가기

세바시 인생질문 에세이

방패막이가 되어 주었던 사람

beautician 2021. 9. 17. 11:31

영웅

 

https://www.youtube.com/watch?v=ru0PmaWoHxM

 

넷플릭스에서 공개된 D.P라는 드라마가 국내외에서 큰 반향을 얻고 있습니다. 난 아직 그 본편을 보지 못했지만 유뷰브에 공개된 공식 트레일러와 리뷰 영상들만 보고서도 적잖은 공감을 느꼇습니다 내가 1980년대에 느꼈던 군대와 2020년대의 군대가 그 40년의 간극이 무색하게도 여전히 가장 폭력적인 집단이란 것입니다. 

 

당연히 총칼을 겨눠야 할 '적'에게 폭력적인게 아니라 오히려 유사시엔 내 등을 맡겨야 할 내부 구성원들에게 말입니다. 물론 그래서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에서 전투 중 적군이 아니라 자신의 부하에게 총맞아 죽은 장교, 분대장, 선임병들이 적지 않았던 것이라 들었습니다.

 

난 1사단에서 소대장 생활을 했으니 D.P(탈영범 잡는 부대)에서 벌어지는 병사들의 세계는 공감은 해도 잘 알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1986년 가을의 어느날 밤, 따로 떨어져 있는 소대원들 내무반에서 새어나오는 구타하는 소리, 참다 못해 흘러나오는 낮은 비명소리에 소대장이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문을 열어주지 않는 소대원들을 보면서 사람들이 약자들에게 휘두르는 폭력 말고도 자기 위의 계급을 무시하는 모습을 과시하는 것으로 자기들만의 세계에서 자기 계급의 권위를 세우려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는 건 군대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전역 후 대기업에 다니면서도 사람들 하는 짓은 똑같더군요. 이 세계는 착하고 능력있는 이들이 출세하는 것이 아니라 독하게 사람들을 부리고 야비하게 남들과 부하들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상관들 사이의 역학관계를 눈여겨 보다가 부하들은 물론 힘없는 상관조차 모욕하며

힘있는 상관의 줄을 타는 이들이 성공하는 곳이란 걸 새삼 느꼈습니다. 물론 그게 이 세상을 성공적으로 사는 방법이란 점엔 이의가 없습니다. 

 

인도네시아에 와서도 마찬가지더군요. 학교를 떠나고 군을 떠나고 대기업을 떠났는데도 계급과 폭력은 어디에나 있었습니다. 사회적으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한 사람들이 자기 이익을 위해 사람들을 부리고 내치고 버리고 배신하는 걸 자카르타의 작은 교민사회에서도 얼마든지 보았습니다.

 

그러다가 저 D.P. 소개영상을 보면서 대기업 본사 입사 직후 2년간 모셨던 차장 직급의 의류팀장을 기억해 냈습니다. 윗사람과 아랫사람들 사이 조율을 잘 못해 상관에게 터지고 아랫사람들에게 쳐받히다가 결국 사직서를 낸 사람입니다. 오랫동안 그가 무능한 사람이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오히려 직원들 진이 빠지도록 뺑뺑 돌리고 협력업체 도산하게 만들 게 뻔한 무리한 계약을 강요하고 그러다가 나중에 부서내  큰 사고로 퇴사했다가 부사장으로 다시 불려들어와 마침내 사장까지 역임한 나 입사 당시의 사업부장같은 사람이 능력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 줄을 대다가 그룹회장 고교동창인 다른 사업부서장에게 옮겨 타고서 아직도 대리도 달지 못한 사원 시절 쌤플실 문을 잠그고 예의 의류팀장 차장에게 쌍욕을 하면서 싸워 결국 그 차장이 '새까만 후배사원에게 이런 짓 당할 줄 몰랐다'며 굴욕감에 사표를 내게 만든 내 입사동기는 나중에 신장성 우룸치 지사에서 자기 상사인 지사장을 패고서도 광조우 지사를 거쳐 샨토 지사장으로 영전했습니다. 그런 사람이 능력있다고 인정받는 게 너무나 당연하던 세상이었습니다.

 

전에 한번 얘기한 것 같지만 샨토 지사장이 된 그 입사동기의 후일담은 결국 출장온 홍콩지사장에게 라이트훅을 먹여 이빨을 부러뜨린 후에야 퇴사해 중국 어딘가에서 회사를 차리고 총경리가 되었습니다.

 

그때 그 차장님 생각이 납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당시만 해도 아직 야만적이던, 거의 일본식 또는 군대식 상명하복이  대세였던 대기업 조직사회 속에서 그는 위로부터의 지시와 자기가 맡은 팀이 처한 현실 사이에서 많은 고민과 노력을 했던 것이라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기 계급으로 얼마든지 찍어 누를 수 있었던 부하들에게 계급의 폭력을 사용하지 않고, 책임을 전가하지도 않은 채 자기가 총알받이가 되었지만 주변 동료들과 팀원들은 그걸 인식하거나 고마워하긴 커녕 무능하다고 손가락질했던 것 아니었나 합니다. 

 

그가 퇴사한 것이 1989년 쯤의 일입니다. 그가 무능한 인간이었던 것이 아니라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살았던 가장 인간적인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30년도 더 지나서야 하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어쩌면 참 둔감한 동물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당시 그를 멸시하고 무시했던 사람들이 이제 와서 모두 생각을 바꿀 것 같진 않습니다. 하지만 D.P 속 내용들이나  얼마전 벌어졌던 이다영, 이재영 쌍동이 학폭 배구선수들의 전혀 뉘우치지 않는 모습, 그리고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왕따, 학교폭력 같이 해당 사회의 약자들에게 적극적으로, 아무런 죄의식도 없이 벌어지는 괴롭힘을 보면서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나도 절대 용서해서는 안되는 일들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 상황을 타파하고 악당들을 때려 잡는 사람들은 그렇게 할 수 없도록 만드는 이 사회 속에서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정의를 구현한 영웅들입니다.

 

하지만 나를 총알받이로 쓸 위치와 능력을 가진 사람이 오히려 나 대신 총알받이가 되어 그 폭력과 그 굴욕감을 내가 느끼지 않도록 해주었다면 그 역시 영웅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차장님이 그런 사람이었어요. 군시절 투표장에서 내 투표지를 까본 보안대 병장을 때려눕혔을 때 그걸 끝내 무마해준 우리 실장 전중령도 그런 사람 중 하나였던 것 같습니다. 내가 이 세상을 살면서 여기까지 오는 동안 그 차장님이나 전중령처럼 나도 모르게 방패막이, 총알받이가 되어준 사람들이 곳곳에 있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2021. 9.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