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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바시 인생질문 에세이

내켜서 하는 일

beautician 2021. 8. 9. 11:45

번역

 

전에도 한번 언급했지만 내가 매일 하는 일 중에 하나는 인도네시아 기사를 번역해서 자카르타경제신문(이하 자경)에 납품하는 겁니다. 그걸 위해 아침에 여러 신문 사이트에서 굵직한 정치 사회 기사들을 뽑아서 편집장과 어떤 걸 번역할지 결정합니다.

 

번역작업은 보통 두 시간 정도 걸립니다. 짧은 기사를 고른다면 퇴고까지 포함해 한 시간 안에도 가능하겠지만 어차피 할 거라면 좀 길고 밀도있는 기사를 선택합니다. 번역사들을 고용해 하루 할당량을 주는 다른 매체에선 그 고용형태의 성격 상 절대 길고 복잡한 기사를 선택할 리 없다는 걸 감안해 내가 번역하는 기사는 내가 만든 것은 아니지만 좀 더 독특한 주제, 좀 더 깊은 통찰을 담은 이야기, 좀 더 특별한 정보를 담은 것이어야 한다는 마음을 갖습니다. 그래서 거기 두 시간을 투자하는 거죠.

 

하지만 오늘은 족히 네 시간을 썼습니다. 너무 특별한 정보가 많았어요.

자카르타에 살면서도, 그리고 아니스 바스웨단 주지사 기사를 수없이 번역했는데도 그 사람이 이제 임기가 14개월 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 자카르타 시내에 자전거 도로를 만들었다는 건 아는데 많은 돈을 들어 자전거 기념비(tugu sepeda)라는 걸 만들어 놓았다는 것, 모나스(국가기념탑)을 끼고 도는 일련의 도로들을 포뮬라 E 전기자동차 트랙으로 만들려고 코로나 때문에 국가재정이 모두 팬매믹 대응예산으로 전용되는 와중에 1조 루피아 가까이 되는 돈을 퍼부어 2022년에 경주대회를 유치하려 한다는 것, 그것 말고도 자카르타 국제 스타디움이라는 것을 만드느라 엄청난 돈을 쏟아 붓고 있다는 사실 등 너무 많은 재미있는 정보가 꽉 찬 매우 긴 기사였기 때문입니다.

 

 

자건거 기념비

 

포물러 E 트랙 예정도로

 

자카르타 인터내셔널 스타디움 건설현장

 

꼼빠스닷컴의 기사는 같은 회사가 출간하는 영문 일간지 자카르타포스트와 달리 인도네시어라서 확실히 번역속도가 영어에 비해 크게 떨어집니다. 그래서 시간이 더 걸리기도 했지만 또 한편으론 번역한 기사 내용이 맞는지 관련 자료들을 일일이 찾아보았기 때문입니다.

 

루수나미(Rusunami), 루수나와(Rusnawa) 같은 이상한 말들이 나오면 그 어원도 찾아야 합니다. 루수나미는 구매자가 소유권을 갖는 서민형 아파트, 루수나와는 시정부가 소유권을 보유한 서민 임대아파트란 뜻이랍니다. 거기다가 엄청나게 쏟아져 나오는 이니셜들과 신조어, 약어들은 번역자에게 공부를 강요합니다.

 

그렇게 오후 두 시가 넘어 번역기사를 납품하는데 그중 한국에도 시의성이 있는 기사는 다시 200자 원고지 7장 전후로 줄여서 아시아투데이에도 보냅니다. 이때엔 사진선정에 주의해야 합니다. 저작권 문제 없는 걸 붙여놓아야 하니까요. 

 

하지만 오늘 기사는 매우 흥미롭긴 하지만 자카르타 주지사가 2017-2022 5개년개발계획을 임기 14개월을 남겨놓은 상태에서 대폭 수정한 계획을 내놓아 뭔가 야료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 본국 독자들 관심을 끌 수 있을 리 없습니다.

 

오히려 얼마전 세상을 떠난 인도네시아 타이쿤 아키리(Akiri)란 사람 유족이 하필이면 경찰들에게 둘러쌓인 사진 속에서 고인의 전재산 2조 루피아(못해도 1600억원 정도)를 기부한다고 했다가 얼마 후 그 돈이 실제로 있니 없니, 경찰이 체포하니 조사하니 하면서 고인 가족들이 사기를 친 듯한, 한편으로는 경찰들이 본격적으로 삥을 뜯는듯한(기부를 한다면서 자선단체나 중앙정부 모처에 돈을 보내지 않고 왜 경찰 구좌에 돈을 보내려 하는지?)  이런 이야기가 본국에도 흥미로울 것 같습니다.

 

아무튼 그렇게 해서 자경에 납품한 기사가 내가 보기에도 아무래도 좀 허접한 듯 하면 저녁 때 기사들을 다시 뒤져 봅니다. 당연히 오늘 벌어진 사건들에 대한 따끈따끈한 기사들이 있는데 그중 적당한 것을 골라 번역해서 자경 밴드에 올려 놓습니다. 돈받고 일하는 값을 제대로 하려는 거죠. 그게 편집장 마음에 들면 그것도 자경 웹페이지로 올라가는 시스템입니다.

 

그렇게 추가로 뽑아 번역하는 기사도 오전과 같은 기준으로 뽑아놓고 때로는 자정을 넘기면서 끙끙거리며 번역을 합니다. 하지만 내가 스스로 내켜서 뭔가 할 때엔 다른 아무 것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특히 그게 몰랐던 사실을 알게 해줄 경우 간혹 느끼는 쾌감은 제법 짜릿합니다. 마치 오늘 오전의 저 기사에서 매일 코로나 방역에 대한 발표만 해대던 아니스 바스웨단 자카르타 주지사가 사실은 이런저런 사고를 많이 쳐놨다는 걸 알게 되던 순간에 느꼈던 것처럼요.

 

 

2021. 8.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