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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당초 내 인생에 뭔가 쉽고 만만한 게 있을 리 없었다.

한국인으로 살아가기

세바시 인생질문 에세이

이둘이드하 이슬람 축일 전야

beautician 2021. 7. 26. 11:40

기가 찬 일들

 

작년 3월 2일 코로나가 처음 인도네시아에 상륙한 이후 이동제한이 걸릴 때마다 웬만하면 장거리 이동을 삼가했습니다. 위성도시인 데뽁, 땅그랑, 보고르, 찌까랑 등에 일이 있어도 명색이 이동제한 기간인데 어딘가 길이라도 막아 놨으면 차를 돌리느라 또는 샛길을 찾느라 에너지를 낭비하는 게 싫어서였습니다.

 

오늘이 딱 그런 날이었습니다.

소나 양을 잡아 신에게 희생을 드리는 이둘아드하(Idu Adha)가 7월 20일 즉 내일로 다가온 상황에서 정부는 일찌감치 자바섬 100개소에 검문소를 설치해 7월 18일부터 24일 사이 도시간 이동을 제한한다고 미리 통지했던 상황. 워낙 코로나 전파가 심한 상황이니 어쩔 수 없는 조치라 생각했고 희생제 하루 전날이니 도로 통제는 최고조에 이를 터였습니다.

 

2020년 7월 31일 반둥 머스짓라야 사원의 이둘아드하 기도회 장면

 

하지만 세상이 자기 중심으로 돈다고 생각하는 어떤 사람들은 이런 날이라도 대면 미팅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기염을 토하곤 합니다. J사장이 그런 사람이었죠. 꼭 만나야 한다지만 일반 식당, 카페는 물론 호텔 내의 카페도 문을 닫았고 건물들 버추얼오피스 미팅룸도 자물쇠를 채운 상황이라 결국 BSD에 있는 그의 집까지 32킬로미터를 운전해 갔습니다.

 

기가 찬 일은 그 길을 가는 동안 우려했던 검문소가 톨에서도 일반도로에서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는 겁니다. 도시간 이동제한을 한다면서 도시간 이동에 사용되는 톨은 무방비로 열어놓은 걸 보면서 도대체 이 나라 현 정권이 정말 코로나 확산억제 의지가 있긴 한 건지 의구심을 품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평소 1시간 반 걸리던 거리를 50분만에 주파.

 

원래 월요일이면 비디오콜로 미팅을 했는데 그 멤버 중 한명인 피오나는 어제 아버지에게 산소통을 구해 주었지만 그럼에도 불구, 산소포화도는 80에서 78로 더 낮아져 빨리 입원실을 구해야 하는 위급상황. 원래 대형 산소통도 6시간용이이서 산소호흡기를 단 환자가 산소통을 사용하려면 산소통 네 대를 가져다 놓고 24시간 쓰면서 빈 통을 계속 충전해 줘야 하는데 한번 충전하려면 충전소에서 반나절은 줄을 서야 하니 피오나 아버지의 산소통 1개는 없는 거나 다름없다는 걸 오늘 꺠달았습니다.  피오나는 오늘 1500만 루피아(약 120만원)을 들여 산소통 한 개를 더 샀답니다.

 

더욱 문제는 아직 PCR 양성이 나오는 상황에서 호텔격리를 마치고 지난 금요일 집에 돌아간 탓에 오늘 아이들과 남편이 코로나 증상을 보이기 시작했고 아버지가 자가격리 중이 친정집에도 오빠들과 거기 가족들이 모두 코로나 양성이 나왔다는 겁니다. 같이 사는 집안에 코로나 환자 한 명이 발생하면 급히 다른 곳으로 격리하지 않는한 전 가족이 전염되는 건 단지 시간문제입니다.

 

그러니 피오나는 당분간 본격적으로 일에 참여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이런 상황에 진행되는 일이 있을 리 없죠. J사장이 굳이 이런 날 나를 대면미팅하자며 불러낸 것도 일이 지지부진하기 때문이죠. 그래서 일에 대해 할 말이 별로 없을 텐데도 꾸역꾸역 사람을 불러내는 건 아쉬운 소리를 하려는 겁니다.

 

"보수를 반으로 줄입시다. 그래, 계약서를 썼지만 천재지변인데 이해해 줘야 하는 거 아니오? 내가 포기하고  한국 들어가면 어차피 그것도 못받을 텐데?"

 

이런 얘기가 나올 줄은 지난 금요일부터 만나자고 할 때 이미 예상하던 일입니다. 사실 이런 얘길 전화나 문자로 하는 것도 그러니 대면으로 하는 게 맞지만 그렇다면 날 굳이 불러들여 어렵게 먼 길 온 사람에게 들려줄 소리가 아니라 자기가 정성들여 와서 부탁하고 양해를 구해야 할 얘기죠. 하지만 그는 자해공갈단처럼 얘기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같은 조건을 받아내 주세요. 걔들도 다 이해할 겁니다."

 

어려운 미션을 던지면 추가 보수를 줘야 할 판에 그는 내 보수를 까면서 자기가 직접 해야 할 일을 나한테 미룹니다. 이럴 때는 당장 열을 내기보단 조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 하면 J사장이 이 순간 나한테 듣고 싶은 말은 뻔하기 때문입니다.

 

"뭐라고? 드러운 소리 집어쳐. 그럴 바엔 안하고 만다!"

 

이렇게 소리지르며 박차고 나가주길 바라는 거죠. 작년 2월에도 이런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당시에도 그는 내 신경을 건드렸지만 난 그를 좀 더 긁어 주었고 결국 그가 먼저 핏대를 세웠죠.

 

"당장 그만 두시요!  당신이랑 일 못하겠소!"

 

해고를 당해야 퇴직금이 나옵니다. 내가 그만두겠다고 하면 퇴직금을 받지 못하는 게 인도네시아 노동법입니다. 그래서 그는 지난 1월 이번엔 굳이 기간제 계역을 맺자고 한 거죠. 기간제 계약을 하면서 노동법을 살짝 뭉개고 계약 만료 후 1-2주 정도 쉬고 다시 갱신하며 몇번을 갱신해도 퇴직금 지급대상이 되지 않습니다.

 

그대신 그는 오늘 나한테 계약을 해지할 수 없습니다. 그가 오늘 날 내보내려면 남은 계약기간의 보수를 한꺼번에 줘야 하거든요. 하지만 내가 그만두겠다고 하면 그것도 줄 필요없습니다. 그러니 그가 날 도발하는 겁니다.

 

"이틀 쯤 생각해 보고 말씀드리죠."

"그게 뭐 며칠씩이나 생각할 일인가요?"

"아니 사장님은 이거 어떻게 얘기할까 가지고 2주일 고민하셨다면서 나는 이틀도 고민 못해요?"

 

대개 불러서 이런 얘기 하는 사람은 이런저런 경우의 수를 생각해 대충 대비를 해 놓고서 찾아온 사람이 이런 얘기 듣고 어버버 하는 사이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상황을 정리하려 하죠. 그러니 난 결론을 조금 미루며 대안을 꾸릴 시간이 필요하고 이제부턴 J사장 스탭이 꼬이며 초초해지기 시작하겠죠.

 

사실 그의 입장이 이해되지 않는 바도 아닙니다. 일은 5년째 전혀 진전을 보지 못한 상황에서 1년 반 이상 코로나의 수렁에 빠져 있는 상태니까요. 하지만 자기 말대로라면 그간 수십억원을 투자받아 들고 들어와 사업다운 진전을 하나도 보지 못한 채 모두 어디론가 날리고 이제 운영비마저 바닥을 드러낸 건  자신의 자금관리능력을 탓해야 할 일이지 내가 책임져 줘야 할 부분은 아닙니다.

 

피오나가 코로나 걸렸을 때 마치 구세주라도 되려는 듯 산소통을 구해주겠다며 주변 모든 사람을 그토록 괴롭혔던 J사장은 정작 피오나 가족들과 친정식구 모두가 코로나에 걸리고 친정아버지가 위독해져 정말 도움이 필요한 순간에 쥐꼬리만한 피오나 월급을 깎겠다는 생각을 했다는 지점에서 별로 그의 편에 서주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는 것도 사실입니다. 

 

"뭐, 기분 나쁘겠지만 내 입장도 이해하잖아요? 한국에선 다 접고 들어오라지만 내가 어떻게든 버텨보려는 거에요."

 

남을 희생시켜 가면서 말이죠.

 

오늘 기가 찬 일들이 연달아 벌어졌으니 어쩌면 내일은 뭔가 좋은 일이 연달아 벌어질지도 모릅니다. 인생이란 게 좀 그래야 하는 거 아닌가요?

 

 

 

2021. 7.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