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으로 살아 가기
애매하게 얘기하는 게 현지 대화의 기술 본문
예상했던 일
작년, 올초까지만 해도 코로나는 남의 일 또는 이웃 동네에서 벌어지는 일처럼 여겨졌습니다.
작년에 우리 성가대 앞줄에 앉았던 여자 권사님이, 얼마 있지 않아 끌라빠가딩 믿음교회 이재정 목사님이 코로나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재정 목사님과는 한인100년사 집필 관련해서 2020년 3월, 코로나 초창기에 대면 인터뷰를 한 적이 있어 더욱 충격적이지 않을 수 없었지만 살다보면 간혹 피치못하게 주변을 스쳐지나가는 불행한 사건일 뿐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젠 옆 동네, 다른 교회의 일들이 아니라 내 주번에서 마구 터지는 일을 내가 직접 손을 내밀어 돕거나 막아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기 시작합니다.
델타 변이에 걸려 몇 주 전 자가격리 치료를 시작한 피오나는 많이 나았지만 지난 수요일 실시한 PCR 검사 결과가 아직 양성이어서 최소 2주는 더 자가치료해야 합니다. 비용을 더 이상 댈 수 없어 호텔 7일 격리 패키지를 마치고 일단 집에 돌아왔으니 두 아이들 감염이 위태로운 상황에 친정 아버지가 코로나에 걸려 산소포화도가 80%로 떨어지면서 호흡곤란이 왔다는 연락을 어제밤에 받았습니다. 피오나는 자기도 아픈 상황에서 산소통을 백방을 찾는 중이었고 그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충분히 알고 있던 나도 여기저기서 알게된 산소통 정보를 모두 모아 피오나에게 보내주었습니다.
오늘 아침에 받은 사진에서 피오나의 아버지는 산소통을 구해 호흡하고 있었습니다. 1천만 루피아, 한화 85만원을 주고 급히 구했다는 겁니다. 평소 같으면 닷새 임대에 5만원, 산소는 리터당 5천원 정도면 충전할 수 있는 걸 몇 십 배를 주고 구한 것입니다. 그만큼 자카르타에서는 품귀현상이 벌어지는 중이고 사람들은 환자들 목숨을 흥정하며 가격을 올리고 있지만 불평할 수도 없는 상황. 그나마도 산소통을 구하지 못해 죽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입니다. 지닌 7월3일-4일 이틀동안 중부 자바의 한 병원에선 병원 자체에 산소가 떨어져 63명이 호흡곤란으로 집단사망한 일도 있었으니까요. 피오나의 수완이 빛나는 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나쁜 소식도 왔습니다. 차차가 자기도 밤새 열이 올랐다는 겁니다. 오늘 아침에 마르셀과 엄마도 함께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았습니다. 신속항원검사 결과 아이들은 모두 음성이 나왔지만 브랜드에 따라 신속항원검사 민감도는 0%~94% 사이이고 인니 정부가 공식적으로 말한 항원검사 민감도는 1%이므로 만약 엄마가 양성이라면 아이들도 양성일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런데 엄마의 검사결과가 아직 나오지 않았다는 겁니다. 검사하라고 돈을 보낸 게 사흘 전, 아니 나흘 전이었는데 말입니다.
늘 그렇듯 이런 걸 물어보면 스무고개가 시작됩니다. 그 시작은 메이의 문자였습니다.
"아이들 검사는 나왔지만 내 것은 나중에 문자로 보내준데요."
"왜?"
"몰라요."
자기가 알고 싶지 않을 걸 왜 내가 궁금해 해야 할까요? 하지만 일단 다시 물어봅니다.
"네 것만 PCR 검사한 거 아냐?"
"그럴지도요."
"비용을 얼마 낸 거야?"
"애들은 20만 룹인데 나만 60만 룹이었어요."
메이는 이 말을 하고 싶은데 내가 물어봐주길 바란 겁니다. 저 대답은 자기 검사비가 아이들의 세 배이니 신속항원검사가 아니고 PCR 검사를 한 것이고, 그러니 검사결과가 이따 저녁에 나오는 거지만 내가 검사하라 보내준 100만 룹을 다 썼다는 뜻인 겁니다. 왜 그런 말을 직접 하질 않고 늘 스무고개 하듯 빙빙 돌려 내가 물어봐야만 답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15년이 다 되도록요. 되도록 애매하게 얘기하는 것이 인도네시아인들의 대화의 기술인지도 모릅니다.
더 물어볼 것들이 있죠. 나흘 전에 돈을 보냈는데 왜 이제야 검사를 받았느냐? 어제 내내 연락이 안되어서 너희 회사 한국인 매니저에게 전화해 보았는데 왜 그쪽은 네가 몸이 않좋다는 걸 전혀 모르냐? 나한테는 마치 코로나 환자가 다 된 것처럼 얘기하면서 왜 회사에는 그런 얘기 숨기고 계속 출근하는 거냐? 하루라도 더 출근해야 깎인 월급을 한 푼이라도 더 받을 수 있는 근무 구조때문일 수도 있고 내가 애들한테 지극정성이니 걱정을 끼치면 돈이 나올 거라 생각했던 건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더 이상 스무고개를 하고 싶지 않았고 그 심리상태도 별로 알고 싶지 않았습니다. 이제 PCR 검사결과가 나오면 그에 따라 대응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차차 만큼도 철이 들지 못한 것 같아 메이가 한심스럽게 느껴졌습니다. 아프다는 데도 밉상으로 보이니 좀 미안하긴 합니다.
그러다가 한인포스트 밴드에서 언젠가 반드시 누군가 얘기할 것이라 예견했던 포스팅을 발견했습니다. 기내 감염 문제 말입니다.
작년부터도 한국에 도착하는 인도네시아발 비행기에서 간혹 한 두명씩 확진자가 나오는 건 민폐이긴 해도 어쩔 수 없는, 비난하기 어려운, 나라도 그렇게 할 것 같은 일이라 여겨 딱히 문제삼아 언급하는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최근 그 숫자가 20명에 육박하는 날이 많고 거의 매일 발생하면서 같은 비행기를 타고간 사람들의 기내감염 우려가 밀접접촉자 자가격리로 이어져 심하면 2주가 아니라 4주까지 격리하는 경우도 생겨 불만이 터져나오기 시작한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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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여전히 의견이 갈립니다. 인도네시아 교민 입장에서는 살려고 인도네시아를 탈출하는 건데 그 정도도 이해해 주지 못하냐는 사람들도 있고 무리한 출국으로 남들 감염시킬 수도 있는 상황을 만드는 얌체 민폐행위라고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 상황을 보는 본국 사람들은 대체로 후자의 입장인 모양이고요. 확진되어 비행기 탄 사람들이 안쓰러운 것 맞지만 사과도 양해도 구하지 않는 그들로 인해 밀접접촉되어 격리되거나 기내에서 감염된 사람들은 또 무슨 죕니까?
하지만 이젠 더 이상 그럴 수 없는 상황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곧 다음 주부터는 PCR 음성결과지 없이는 비행기를 타지 못하게 될 테니까요. 실제로 관련 통지가 나온 후부터 확진자들이 비행기를 타는 경우는 많이 줄었습니다. 그대신 인도네시아에서 치료도 제대로 못받으며 홀로 고군분투하는 이들이 더 늘어날 것이고 그들 중 기저질환자들은 많은 돈을 내 전세기나 에어앰뷸런스를 타지 않는 한 높은 확율로 사망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 더욱 확대될 것이고요.
모두 예견된 일들이었지만 이젠 피할 방법도 없습니다.
2021. 7.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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