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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바시 인생질문 에세이

절망적 세계관의 <총몽>과 자카르타

beautician 2021. 7. 22. 11:24

총몽 (銃夢)

 

2019년 이 영화가 나온다는 예고편을 보았을 때  몇 개월간을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일본 출장을 한창 다니던 것이 1991년부터 1994년 사이 4년 정도였는데 갈 때마다 이 만화책 단행본이 새로 나온 게 있으면 꼭 뒤져서 사왔습니다. 당시 내 일어 실력의 일부는 이 만화가 어느 정도 기여했던 게 사실입니다. 안타깝게도 1995년 이후 다시는 일본에 가지 않았고 단행본 마지막편은 결국 사지 못했습니다.

 

 

 

만화 원판은 이렇게 생겼습니다.

이 만화에 꽂힌 이유는 미래의 절망적 세계관 속에서 펼쳐지는 빠른 스토리 전개, 그리고 앞뒤의 이야기들이 납득되도록 만드는 미래세계에 대한 섬세한 묘사때문이었습니다. 당시 깨달았던 게 있다면 작가란 책이나 만화를 종이책에 담아 내놓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의 세계를 창조하는 사람들이란 사실이었습니다.

 

그런 비슷한 느낌을 드래곤볼을 보면서도 느꼈는데 <총몽>에서 더욱 절절히 꺠달았죠.

 

2019년의 영화 자체는 일본 원작을 서구에 번역 수출하면서 붙인 <배틀앤젤 알리타>라는 제목이어서 원작 덕후에겐 조금 생경했지만 '절망적 세계관'과 강철같은 정신력의 주인공을 그대로 옮겨 담아 후속작을 기대하게 만들었습니다.

 

그 '세계관'이란 걸 가지고 오래동안 고민했습니다.

내가 그런 세계관을 창조해 낼 정도의 능력이 과연 있을까? 가공의 세계관을 만들어 낼 수 없다면 작가의 자격이 없는 게 아닌가?

 

그런데 꽤 많은 시간이 흐른 후 이 문제는 아주 간단히 해결되었습니다.

이 세상에 사는 그 누구도 현실을 100% 그대로 인식해 반영한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은 하나도 없고, 오히려 스스로의 성장배경과 교육, 전공, 업무, 환경 등에 영향을 받아 각각 갖게된 자기만의 가치관을 토대로 현실과는 사뭇 다른 각자의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깨달은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세계관이란 현실을 100% 투영하지 못한다는 것, 즉 싱상과 추측으로 빈틈을 채워넣은, 다분히 <창작물>의 성격이라는 것을 말이죠.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30년도 전에 발표되었으니 작가의 머리속에서도 더 오래 전에 형성되었을 <총몽>의 세계관은 여전히 누구도 쉽게 넘보지 못할 '발군'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코로나 신규확진자가 오 결국 5만 명선을 넘어선 절망적인 인도네시아의 상황에서 갑자기 <총몽>의 절망적 세계관이 떠올랐습니다.

 

 

2021. 7.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