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으로 살아 가기
특이점이 온 코로나 시대 본문
인도네시아에 첫 코로나 확진자 발생이 확인된 건 2020년 3월 4일의 일입니다.
그 이후 세상은 예전과 같을 수 없었죠.
아이러니컬하게도 내가 2년여 다니던 회사를 그만 둔 게 그보다 바로 며칠 전인 2월 말이었습니다
당시 이미 코로나에 대한 흉흉한 소문이 인도네시아는 물론 전세계에 퍼져 있었고 한국은 첫 번째 코로나 웨이브를 맞아 필사적으로 방역에 전력하던 때였죠. 당시 본국의 그런 상황을 뉴스로 보면서 현지 한국인 커뮤니티가 인도네시아에서 가장 위험한 곳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성가대를 하면서 강단에 올라가 청중석을 보면 200여 명 중 마스크를 한 사람은 한 두 명에 지나지 않았고 우리가 이렇게 성가대 연습을 하는 게 사실은 매우 위험한 짓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코로나가 발생한 후 단 한번도 교회에 가지 않았습니다.
우리 교회는 한 차례 코로나 클러스터가 되어 난리가 났었고 그 후 몇 개월 지난 후 이번엔 교역자들이 모두 코로나 양성판정을 받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코로나를 극복한 교역자들은 다시 대면예배를 추진하고 있고요. 교회와 코로나가 서로 치열하게 엎치락 뒤치락하는 형국입니다.
원래 2월엔 회사를 그만 두려 했습니다.
릴리가 주먹구구식으로 운영하고 있는 광산회사에 합류해 행정적, 문서 쪽 일을 정리해 주려 했던 겁니다 그게 내 인도네시아에서 할 마지막 작업이라 생각했고 그게 마지막 작업이라면 최소 몇 년 쯤, 길게는 십 수년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릴리는 끈질긴 친구여서 보통 한국 사람같으면 다 때려치웠을 일을 십 수년째 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자길 한번 거널내 먹었던, 그래서 당시 나도 함께 파산시켰던 탐욕스러운 큰 오빠를 여전히 옆에 끼고서 말이죠. 릴리에겐 답답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지만 그 누구도 절대 버리지 않는다는 면을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거길 가지 못한 건 끈다리와 꼬나웨에서도 당시 불어닥치던 코로나 광풍때문이었습니다.
2월에 회사를 그만 둔 것도 내가 사표를 낸 게 아니라 해고를 당한 건데 그 이유가 웃겼습니다. J사장은 당시 끼따스를 연장하는 중이었는데 이전에 만들 때 무슨 야료가 있었는지 원래 발급되기 어려운 상황에서 끼따스가 발급된 겁니다. 투자자 끼따스인데 투자자 요건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상태였거든요. 아마 해당 정책 시행초기에 당국에 오류가 있어 요건을 제대로 검토하지 않고 끼따스가 나왔던 겁니다. 그걸 2020년에 연장하려 하자 일단 수수료 인보이스를 보내왔던 비자 브로커 측이 그 부합하지 않는 요건에 대한 조치를 먼저 해야 한다며 300만 루피아 정도 더 추가된 인보이스를 새로 보냈던 겁니다. 그걸 보고 길길이 열을 내는 J사장에게 내가 사과할 부분이 없었습니다.
"저 상태로 작년에 끼따스가 나온 걸 오히려 감사하게 생각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당국이 정책을 바꾼 것, 그래서 요건 검사를 제대로 못해 끼따스 내 준 것, 올해 브로커가 인보이스 잘못 발행해 수정하려 하는 것. 도대체 어느 부분에서 내가 사과해야 합니까?"
그렇게 말한 것이 해고당한 이유였습니다.
거기서 그는 한 마디를 덧붙였죠.
"당신이 자초한 일이니 퇴직금은 없소!"
옛날 같으면 더럽다고 침 뱉고 돌아섰겠지만 이젠 더 이상 상대방 기분이나 입장을 감안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아닌 건 아닌 거고 어떤 상황에서도 나와 내 가정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당신이 지금 나보고 나가라 한 거 아니에요? 좀 전에 벌어진 일이 기억 안나세요? 대표님이 날 해고했으니 당연히 퇴직금 주셔야죠."
본국에 있는 사람들은 이게 무슨 얘기인지 잘 모를 수 있습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직원이 자진퇴사를 하면 퇴직금을 주지 않도록 노동법에 규정되어 있어요. 그 대신 그 외에 전별금 등 다른 돈을 줘야 하는데 그건 퇴직금에 비해 얼마 되지 않는 금액이고 대개 중소, 영세기업들은 직원들이 그런 규정을 잘 모르면 입 씻고 안줘버리는 게 보통이죠. J사장은 그 정도로 막되먹은 사람은 아니었지만 퇴직금을 1년이 다 되도록 할부로 주었고 결국 얼마간의 금액은 최종적으로 받지 못했습니다.
그런 후 코로나 사태가 시작되면서 사람들은 다 집에 갇혀 버린 셈이 되었는데 어쩌면 나에게는 내가 하는 일에 너무나 특화된 상황이 전개되는 것 같았습니다. 지난 1년여, 엄청난 분량의 글을 썼습니다. 수십 건의 보고서와 번역서 한 권, 기사와 에세이, 칼럼 등등. 없애버리고 싶은 흑역사지만 인니 한인사회의 한인100년사 집필과 출판도 그 사이에 있었습니다.
올해 다시 기업 일에 한 발을 담그며 서서히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코로나 시대였기 때문에 할 수 있었던 일들이 코로나 시대가 끝나가기 때문이 아니라 그 시대가 너무 길어지고 있어 이제 하나 둘 끊어지는 것들도 있습니다.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아마도 난 술라웨시의 탄광으로 가게 되겠죠. 1년 반~2년 쯤 늦었지만 당초 계획했던 대로 말이죠.
하지만 코로나는 당분간 우리 곁에 머물면서 좀 더 많은 변화를 가져올 것 같습니다. 당분간 마스크를 벗지 못하거나 사람들과의 붐비는 자리를 피하는 습관도 지속되고요.
이 시기를 지나면서 새삼 내가 할 수 있는 것들과 할 수 없는 것들을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 보는 기회가 된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서 어렵고 곤혹스러운 이 시기를 더욱 진지하게 지내보려 합니다.
2021. 6. 3.
'매일의 삶'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핵인싸들의 세계 (0) | 2021.06.06 |
---|---|
모든 건 디자인하기 나름 (0) | 2021.06.04 |
ROTC 창설 60주년 (0) | 2021.06.01 |
없는 인맥 만들기 (0) | 2021.05.31 |
다른 종, 다른 관점 (0) | 2021.05.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