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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의 삶

없는 인맥 만들기

beautician 2021. 5. 31. 13:35

 

 

사실 내가 가장 못하는 것 중 하나가 인맥 만들기입니다.

하긴 내가 뭔들 잘하겠어요.

 

인맥을 만드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내가 아는 사람들, 어릴 적 친구들이 사회 각처 요직에서 중요한 일을 하는 사람이 되는 것인데 그게 여의치 않은 건 걔 인생은 걔 것이기 때문이죠.  개중 군에서 별을 달기도 하고 대기업에서 고위 임원까지 된 친구들도 있지만 이제 모두 퇴역, 퇴직했으니 있던 인맥도 다 없어졌습니다. 원래 원 모습의 친구들만 남았습니다. 그거라도 어딥니까?

 

인맥이란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말하는 중립적인 단어였지만 어느새 '힘있는 누군가의 힘을 빌어쓸 수 있는 관계'라는 뜻으로 변질된 지 오래입니다.

 

그리고 인도네시아 살면서 자기 인맥을 자랑하는 사람들을 수없이 만났습니다.

 

많은 이들이 대통령, 부통령, 장관들과 인맥을 가지고 있더군요. 물론 대부분 그것을 증명해 내진 못했습니다.

그들이 대통령, 부통령, 장관들을 안다고 해서 그건 인맥이라 할 수 없습니다. 거꾸로 대통령, 부통령, 장관들도 그를 알고 그에게 호의를 베풀 마음이 있어야 비로소 인맥이라 할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옛날부터 '소개장'이라는 게 중요했습니다. 힘있는 어떤 인사가 어떤 곳에 나를 잘 부탁한다는 편지를 써주는 것이죠. 대기업을 퇴직하는 사람들이 '추천서'를 받아 나가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내가 나를 증명해야 하는 것이 마땅할 것 같은데 세상이 나를 믿지 않고 오히려 내 뒤에서 엄지를 척 세워주는 누군가를 더욱 신뢰하는, 우린 그런 세상에 살고 있는 겁니다. 뭐, 어쩌면 너무 당연한 일이기도 합니다.

 

이상한 방법으로 자신을 증명하려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는데 국적을 불문하고 가장 많이 사용하는 기법은 유력한 사람과 찍은 사진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리고 그 사진에 멋들어진 스토리텔링을 결부시킵니다. 대통령이나 유력한 장군과 찍은 사진을 보여주면서 자신이 둘도 없는 절친이며 동향이며 친척이라고 말하는 거죠. 하지만 사실은 어쩌다 어떤 행사에서 만난 유력 인사와 한번 사진을 찍었을 뿐이고 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일면식도 없던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유력인사들, 장관들 사진을 보여주면서 자신의 인맥을 과시하는 현지인들도 많았습니다. 심지어 그 유력인사와 함께 찍은 사진도 아니고 어딘가 구글에서 퍼왔을 법한 사진을 내밀며 자기가 잘 안다고 말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뭐, 그래도 손해나는 경우가 아니라면 다 믿어주었습니다.

 

좀 더 적극적인 사람들은 그 유력인사와 오고간 문자메시지들을 보여줍니다. 그저 일상적인 안부가 오고간 내용이어서 그게 그 유력인사와 어느 정도의 관계를 증명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자긴 최소한 그 유력인사와 개인적으로 연락을 주고받는 사이라는 거죠. 물론 그 유력인사의 계정이 본인 것이 맞는지는 알 길이 없고 별로 알고 싶지도 않습니다.

 

인도네시아에 투자하러 왔다는 70대쯤 된 어르신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코로나 사태가 터지기 직전이었는데 정세균 총리가 당시 국회의장 임기를 거의 끝마치던 시기였습니다. 인도네시아 정부와 무슨 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왔다는 사람이 꼭 나를 만나 협조를 구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기본적으로 그 지점부터가 이상한 거죠. 국가적인 큰 일을 하러 온 사람이 대사관이나 정부부처의 지점 또는 대기업 법인장도 아닌 일개 작가인 나를 만나려 하겠어요?

 

거기서 그는 자신이 정세균 의장에게 인도네시아 출장취지를 밝히고 허락을 받아 왔다고 애기하며 녹음된 통화를 들려주었습니다. 정세균 의장이 어쩌지 못해 네, 네 하며 대꾸하는 게 역력한데 그 어르신은 그게 자신이 정세균 의장의 특사라는 증거처럼 나에게 내밀고 있었습니다. 그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리고 애당초 그런 녹음 자체가 불법 아닐까요? 그리고 그 녹음 속 인물이 정세균 의장의 목소리를 닮은 다른 사람이 아니란 보장도 없는 거고요.

 

기본적으로 인맥을 이용한다는 것은 그 인맥으로 연결된 사람의 힘을 내 힘인 것처럼 여겨달라는 무언의 요구, 압박같은 것입니다.  그러니 요즘 입시나 채용을 블라인드로 하면서 개인정보나 인맥, 심지어 부모님 직업도 모두 가려두고 당사자의 능력과 경험만을 가지고 선발하는 트랜드가 부는 거라 봅니다. 지인이나 가족의 능력은 네 능력이 아니라고 강변하는 거죠. 

 

하지만 오늘도 없는 인맥을 창조해 내려는 사람들이 그리 많습니다.

 

 

 

2021. 5.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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