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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어법의 세상

beautician 2021. 5. 28. 11:24

 

발전적 결별의 예

 

전날 밤 두 시간 정도 이어진 줌미팅이 아내 눈에는 고깝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자세히 보았다면 줌미팅 참석자들 중 남자도 있는 걸 알았겠지만 문 밖에서는 중저음의 남자 목소리보다는 고음의 여자 목소리만 더 잘 들렸을 겁니다. 그게 심사가 뒤틀린 이유였겠죠. 싱가포르의 아이들에겐 '너희 아빠 다른 아줌마들이랑 희희락락 잘 놀고 있다' 이런 카톡을 보낼 정도로요. 

 

남편이 여자들과 이야기하거나 바라보는 건 그게 어떤 이유이든 아내에게 용납이 되지 않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리라 봅니다. 내가 인도네시아에 있으면서 함께 오래 일을 해온 릴리와 메이, 그 가족들을 내가 내 가족처럼 여기는 것을 아내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입니다. 더욱이 그 친구들이랑 함께 했던 일들이 결과적으로 상당한 금전적 손실로 이어졌으니 아내 마음에 그들에 대한 곱지만은 않은 감정이 있을 것임은 충분히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이런 저런 일로 교류하며 도움을 주고받는 와중에, 특히 릴리는 가끔 빚은 갚지 못하는 와중에 이런저런 사고를 치며 작은 돈을 빌려달라 하다가도 가끔은 내가 필요할 때 꽤 큰 돈을 보내주기도 했는데 그 정도로는 결국 아내의 마음을 돌리지 못했습니다.

 

오늘 아침 아내가 카톡에 유튜브 영상을 보내왔는데 제목은 '정서적 이혼'이었어요. 마음이 떠난 부부가 함께 사는 건 이혼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런 내용인 거죠. 어제밤에 꼬인 마음이 오늘 아침까지도 풀리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너랑 나는 정서적 이혼 상태야. 뭐 이런 말을 하고 싶은 겁니다. 저 마음을 풀어주려면 스시 한 판에 맛있는 디저트......,, 아니면 근사한 레스토랑. 대략 10만원 안팍의 예산을 잡고 저녁시간을 좀 내야 합니다. 인생이란 그렇게 대충 견적을 내며 살아가는 겁니다.

 

그런데 그 '정서적 이혼'이란 말을 보면서 유사한 많은 단어들이 생각났습니다.

정서적 이혼이 이혼은 아니지만 정서적 결별을 한 것이니 이혼이나 다름없다는 식으로 몰고가기 위한 어법인 것처럼 우린 그런 어법들이 넘쳐나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예전 박정희-전두환 시절에 많이 들었던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말이 있습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민주주의는 아니지만 이렇게 하는 게 한국식야. 그러니 정통 민주주의랑 많이 틀리더라도 이걸 민주주의라고 봐 줘야 해. 이런 고집이 담긴 어법인 겁니다. 아니지만 기라고 우기는 전통적인 방식을 당시 정부가 썼던 것이죠.

 

문재인 대통령이나 정부여당이 뭔가 했다 하면 야당 논평에 단골로 나오는 '사실상 실패'라는 단어도 역시 그렇습니다. 너희들이 아무리 성공이라 하고 국민들이 환호한다 해도 사실은 이런 저런 면들이 있으니 이건 실패로 봐야 해. 이런 의도가 담긴 것이죠. 남의 성공을 도저히 자기 입으로 성공이라 인정해 줄 수 없는 사람들의 꼬인 마음이 '사실상 실패'라는 단어에 깃들어 있습니다. '사실상~~~'이라는 어법은 주로 그런 식으로 쓰입니다.

 

그중 대표적인 어법 중 또 하나는 '발전적 결별'이라는 겁니다.

연예인 커플이나 애인이 깨졌을 때, 연예인이나 프로운동선수가 소속사와 계약연장에 실패했을 때 나오는 말이죠. '발전적 결별'이란 말은 50%의 거짓말을 담고 있습니다. 결별은 참, 발전은 거짓이니까요. 비극적 파국에 속하는 결별을 발전이란 긍정적인 단어로 포장한 매우 가식적인 표현입니다. 그 가식적 성격을 증명하듯이 그렇게 발전적으로 결별한 애인이나 소속사가 서로의 발전에 기여했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도 본 적도 없습니다. 그들은 사실 전혀 발전적이지 않은 다른 성격의 결별을 한 것이란 반증이죠.

 

사실을 호도하는 발언과 표현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기본 플롯은 '그건 줄 알았지? 사실은 그거 아냐'  또는 '아닌 줄 알았지? 사실은 그게 그거야' 이런 것입니다.

 

이런 건 다 말장난.

사람들을 세치 혀로 한번 현혹해 보려는 연습하는 건데 우린 거기 매번 홀라당 넘어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2021. 5.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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