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으로 살아 가기
인생의 하프타임이 누구에게나 필요할까? 본문
하프타임: 자신을 객관화하는 시간
대학 3학년, 그러니까 ROTC 입단 첫 해인 1년차 시절 여름방학 때 병영훈련을 들어갔습니다. 당시엔 대학에도 교련시간이 있어 1학년 때 1주일 병영훈련을 갔지만 ROTC 1년차 여름 병영훈련은 좀 더 본격적인 한 달짜리였습니다.
육군훈련이 총 쏘는 거 말고 딱히 재미있는 게 뭐 있으랴 싶지만 능선과 계곡으로 다니면서 내가 독도법(讀圖法)에 재능이 있음을 알게 된 건 꽤 흥미진진한 경험이었습니다. 지도를 읽는 능력 말입니다. 미육군 신생 101 공정사단의 제2차세계대전 참전실화인 <밴드오브브라더스(Band of Brothers)>에서 훈련 중 무능한 소블 중대장이 지도를 잘못 읽어 중대 전체를 엉뚱한 곳으로 데려가는 장면이 있는데 실제 우리가 훈련할 때에도 집결지를 못찾아 다른 산에서 헤매는 친구들이 꼭 한 팀씩은 나왔습니다.
본격적인 독도법 훈련은 팀들을 산속이나 벌판 이곳 저곳에 각각 떨궈 놓고서 지도상 표시된 좌표를 찾아가 거기 박아 둔 말뚝 번호를 기록한 후 집결지에 돌아와 결과물을 제출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시내에서 길을 잘 찾는 사람들이 야전에서 쉽게 헤매는 이유는 시내처럼 어떤 건물 왼쪽 카도를 돌아 몇 번째 블록에 있는 무슨 가게, 이런 식이 아니라 기준점이 될 만한 길 이름, 가게 이름 하나 없이 강이나 산 같은 특징적 지형을 기준으로 위치와 방향을 판단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큰 나무와 기암괴석들이 있다고 해도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그런 건 결코 지도에 표시되지 않으니 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난 그게 그리 어렵지 않았습니다. 주변 지형을 지도와 비교해 보고 나침반으로 방향을 잡아 움직이기 시작하면 1~2킬로미터 밖에 허리 높이 정도로 박힌 콘크리트 말뚝들을 거의 오차 없이 찾아낼 수 있었습니다. 오히려 힘든 것은 그 말뚝을 향해 난 길을 찾는 것이었어요. 길찾기에 질린 우린 마지막 말뚝을 지도와 나침반으로 방향을 특정한 후 그곳으로 난 오솔길을 찾는 대신 가시덤불을 헤치고 허리 깊이 개울을 다리도 없는 곳으로 건너며 무조건 직진으로 내달려 정확하게 말뚝을 만나기도 했습니다.
세상에 차량 네비게이션이 도입되고서도 한참 더 시간이 지나 2012년 전후쯤에야 인도네시아에서도 인터넷 기반의 웨이즈(Waze) 네비게이션을 쓸 수 있게 되기까지 주로 자카르타와 반둥의 수많은 미용실들을 지도만 보고 찾아다녔는데 군시절 익힌 독도법이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물론 오프라인 지도로는 애당초 지도자체가 틀린 곳이나 일방통행으로 진행방향이 바뀐 곳, 공사로 막힌 곳 등이 제 때 업데이트될 리 없어 매번 개정판이 나올 때마다 두꺼운 지도책들을 샀지만 무용지물이 되는 경우도 종종 있었습니다.
지도를 들고 목표지점을 찾아가려 할 때 가장 먼저 할 일은 지도 상에 내 위치를 특정해 표시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목적지로 갈 방법을 찾아낼 수 있으니까요. 내 위치를 확인해야만 애당초 내가 가고자 하는 목적지에 과연 갈 수 있는지 역시 가늠할 수 있습니다.
즉 ‘내 위치’라는 단어로 대변되는 내 역량과 경험, 인맥, 자본, 돈줄, 나이, 가용한 인원과 조직, 뒷배 등을 자기 자신의 데이터를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있어야만 현실적으로 달성할 수 있는 최선의 목표를 세우는 것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온갖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내가 왜 그간 그토록 수많은 실패를 겪었는지, 내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사람들이 왜 날 싫어하는지, 내 어떤 부분이 늘 문제의 원천이었는지,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어떤 것들이고 내가 절대 할 수 없는 것은 어떤 것인지를 온몸으로 경험하여 깨달은 사람으로서 거기서 더 이상 객관적일 필요는 없을 지도 모릅니다. 그게 너무 지나치면 자살하고 싶어질지도 모르니까요.
그래서 인생의 하프타임은 어쩌면 성공적인 전반기를 살아온 사람들에게 더욱 필요할 것 같습니다. 육군 장군이나 대기업 고위임원으로 인생의 전반기를 마치고 명예롭게 퇴직한 사람들에게 이제부터 펼쳐질 후반기가 전반기만큼 영광스럽지 않을 것임을 논리적으로는 알고 수긍하지만 실제로 얼마나 진심으로 납득하고 있을지는 짐작하기 어렵습니다. 그들의 자신만만함과 여유로움의 상당부분이 현역시절의 영광보다는 그 결과 노후를 든든히 지켜줄 퇴직금과 연금에 있을지도 모르니 뭔가를 해서 말아먹는 것보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인생 전반기의 결과물을 누리는 것이 더 현명한 일일 수도 있습니다. 그럼 굳이 하프타임을 염두에 둘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조금 다른 경우지만 한국에서 나름 성공적 경험을 토대로 인도네시아에 넘어와 곧바로 자기 사업을 시작하는 사람들 상당수는 사업의 본질이란 한국이나 인도네시아나 다를 바 없다면서 자신의 성공을 마치 이미 확정된 사실인 것처럼 확신하죠. 하지만 불과 몇 달 지나지 않아 인도네시아의 사업환경과 관공서의 부패, 느릿느릿한 직원들의 태만, 인근 한국인들의 비협조에 대해 침을 튀기며 쌍욕을 하기 시작하는 게 보통입니다.
그 마음이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건 대개의 경우 하프타임을 충분히 가지면서 자신과 상황에 대해 객관적인 파악을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사전에 필요한 준비를 마쳤다면 축구선수인 그가 인도네시아 농구리그에 뛰어 들어 한국의 축구경기 룰을 왜 적용하지 않느냐고 개거품을 물 리 없을 테니까요.
로버트 드니로와 앤 해서웨이가 주연한 2015년 영화 <인턴(The Intern)>은 그런 상황과 대척점이 될 만한 장면을 보여줍니다. 영화에서 시니어 인턴으로 취직한 드니로는 예전 현역시절의 급여와 대우를 요구하는 대신 경륜과 지혜만을 가지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새 직장에 들어와 마침내 신세대 사장과 조직의 존중과 존경을 얻어낸다는 부분이 시사하는 바가 공감을 자아냅니다.
세상 일이 결코 영화처럼 전개될 리 없지만 마침 세상을 강타한 코로나 팬데믹이 대다수 세계인들에게 강제로 인생의 하프타임을 선사한 이 시대에 자신이 <밴드오브브라더스>의 쇼블 중대장 같은 사람인지 <인턴>의 벤 휘테이커(드니로 분) 같은 사람인지 객관적으로 생각해 볼 시간은 꼭 필요할 것 같습니다.
이 산이 아닌가벼.
이 대사를 다시는 읊고 싶지 않습니다.
2021. 5.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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