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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도에 포기할 수 없다 본문
우울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법
100개 중 96번째 질문에 답하면서 그간 쓴 글들을 정리해 보니 23번째 질문에 대한 답변이 빠진 걸 찾았습니다. 우울의 늪에서 자신을 보호하는 법. 그것까지 채워야 오는 5월 25일 100개 질문에 대한 답변을 모두 채우게 됩니다. 물론 이 프로그램 초창기 룰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 엉뚱한 글들을 줄줄이 몇 편 쓴 적이 있으니 제대로 하려면 그것들도 모두 새로 써야 하겠지만 그렇게까지 깔끔 떠는 건 좀 병적일 것 같습니다. 공교롭지만 초창기 글들 중 ‘오해’ 1, 2, 3 등의 제목들도 달렸으니 오해한 걸로 퉁 치고 넘어가기로 합니다^^
‘우울’이란 키워드를 쳐보니 올해 2~3월 사이 글들이 많이 검색됩니다. 돌아보면 전체적으로 앞부분 6할 정도는 집중적으로 스스로의 내면을 들여다보게 하고 뒷부분의 3할은 인간관계와 소통문제, 그리고 나머지 1할이 미래전망과 계획에 할애된 것 같습니다. 질문과 함께 제시된 세바시 강연 유튜브를 통해 우리 사회에 저렇게 많은 자기계발강사들이 활약하고 있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고 그 함량과 울림도 강사에 따라 천차만별이란 것도 새삼 깨달았습니다.
40대 초반 이전, 좀 더 엄밀히 따지면 20대 후반-30대 중반 정도 연령대를 대상으로 디자인된 듯한 질문들이 50대 후반에게 던져질 때 때로는 뜬금없고 짜증까지 유발한다는 것을 실감했습니다. ‘취재진의 질문에 침묵으로 일관하며 검찰청 건물 안에 들어섰다’고 기사를 쓰기 위해 용의자 뒤통수에 대고 던지는 “혐의 인정하십니까?”라는 너무나도 상투적인, 그래서 사실은 굳이 묻지 않아도 될 질문들도 몇 번쯤은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오늘까지 96번의 질문들과 만나면서 평생 거의 생각해 보지 않았던 화두들을 놓고 최소 몇 십 분 정도씩 생각해보고 매일 한 시간 넘게 글 쓰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는 건 꽤 큰 의미를 갖습니다. 이 글들을 언젠가 다시 한번 쭉 읽어보면 내 생각과 주장이 과연 일관성 있는 것인지, 또는 속절없는 중구난방인지 스스로 되짚어 볼 수 있을 것 같고 평소엔 스스로도 잘 알 수 없던 내 마음의 윤곽과 표정을 재구성해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도 한 손가락에 꼽히는 구성원들만 읽는 나름 ‘내부적’, ‘보안성 뛰어난’, ‘뭐라 써도 비난 받지 않을 가능성 큰’ 글이어서 보다 솔직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일부 과장되거나 너무 나간 부분들도 분명 있을 것 같아 혹시 내 글로 마음상한 분들 있으실 지도 모르겠네요. 죄송합니다.
23번째 질문인 ‘우울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방법’은 내게 있어 이런 인생질문 프로그램 같은 것을 중도에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스스로 주도했거나 하기로 마음먹은 것이 중도에 좌초하거나 흐지부지되는 일은 그 원인이 나 스스로에게 있든 외부적인 것이든 분명한 타격을 입히게 되고 비록 팔다리를 끊는 정도의 위력은 아니라 하더라도 불가항력에 부딪힌 것도 아닌데 중도에 무너지는 상황은 오랫동안 치유되지 않는 내상을 남깁니다. 아마도 그건 지금까지 살아오며 중간에 멈춰야 했던 일들이 너무나도 많았기 때문입니다. 이제 한 챕터를 분명히 닫고 한 시대를 분명하게 마감하는 것은 나에겐 무척 중요한 일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2020년 3월 경부터는 당장이라도 때려치우고 싶었던 한인100년사도 결국 12월 출판기념회 마무리까지 꾸역꾸역 자리를 지켰습니다. 책상 앞에서 몇 개월씩 씨름해야 하는 번역 프로젝트들을 마침내 마지막 페이지까지 끝내는 것도, 매번 큰 사고를 치는 술라웨시의 파트너 릴리와 딸, 자카르타의 말썽꾸러기 메이와 아이들 손을 끝내 놓지 않는 것도 대략 같은 이유일 것 같습니다. 물론 이 부분을 곰곰이 생23_우울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법
100개 중 96번째 질문에 답하면서 그간 쓴 글들을 정리해 보니 23번째 질문에 대한 답변이 빠진 걸 찾았습니다. 우울의 늪에서 자신을 보호하는 법. 그것까지 채워야 오는 5월 25일 100개 질문에 대한 답변을 모두 채우게 됩니다. 물론 이 프로그램 초창기 룰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 엉뚱한 글들을 줄줄이 몇 편 쓴 적이 있으니 제대로 하려면 그것들도 모두 새로 써야 하겠지만 그렇게까지 깔끔 떠는 건 좀 병적일 것 같습니다. 공교롭지만 초창기 글들 중 ‘오해’ 1, 2, 3 등의 제목들도 달렸으니 오해한 걸로 퉁 치고 넘어가기로 합니다^^
‘우울’이란 키워드를 쳐보니 올해 2~3월 사이 글들이 많이 검색됩니다. 돌아보면 전체적으로 앞부분 6할 정도는 집중적으로 스스로의 내면을 들여다보게 하고 뒷부분의 3할은 인간관계와 소통문제, 그리고 나머지 1할이 미래전망과 계획에 할애된 것 같습니다. 질문과 함께 제시된 세바시 강연 유튜브를 통해 우리 사회에 저렇게 많은 자기계발강사들이 활약하고 있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고 그 함량과 울림도 강사에 따라 천차만별이란 것도 새삼 깨달았습니다.
40대 초반 이전, 좀 더 엄밀히 따지면 20대 후반-30대 중반 정도 연령대를 대상으로 디자인된 듯한 질문들이 50대 후반에게 던져질 때 때로는 뜬금없고 짜증까지 유발한다는 것을 실감했습니다. ‘취재진의 질문에 침묵으로 일관하며 검찰청 건물 안에 들어섰다’고 기사를 쓰기 위해 용의자 뒤통수에 대고 던지는 “혐의 인정하십니까?”라는 너무나도 상투적인, 그래서 사실은 굳이 묻지 않아도 될 질문들도 몇 번쯤은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오늘까지 96번의 질문들과 만나면서 평생 거의 생각해 보지 않았던 화두들을 놓고 최소 몇 십 분 정도씩 생각해보고 매일 한 시간 넘게 글 쓰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는 건 꽤 큰 의미를 갖습니다. 이 글들을 언젠가 다시 한번 쭉 읽어보면 내 생각과 주장이 과연 일관성 있는 것인지, 또는 속절없는 중구난방인지 스스로 되짚어 볼 수 있을 것 같고 평소엔 스스로도 잘 알 수 없던 내 마음의 윤곽과 표정을 재구성해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도 한 손가락에 꼽히는 구성원들만 읽는 나름 ‘내부적’, ‘보안성 뛰어난’, ‘뭐라 써도 비난 받지 않을 가능성 큰’ 글이어서 보다 솔직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일부 과장되거나 너무 나간 부분들도 분명 있을 것 같아 혹시 내 글로 마음상한 분들 있으실 지도 모르겠네요. 죄송합니다.
23번째 질문인 ‘우울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방법’은 내게 있어 이런 인생질문 프로그램 같은 것을 중도에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스스로 주도했거나 하기로 마음먹은 것이 중도에 좌초하거나 흐지부지되는 일은 그 원인이 나 스스로에게 있든 외부적인 것이든 분명한 타격을 입히게 되고 비록 팔다리를 끊는 정도의 위력은 아니라 하더라도 불가항력에 부딪힌 것도 아닌데 중도에 무너지는 상황은 오랫동안 치유되지 않는 내상을 남깁니다. 아마도 그건 지금까지 살아오며 중간에 멈춰야 했던 일들이 너무나도 많았기 때문입니다. 이제 한 챕터를 분명히 닫고 한 시대를 분명하게 마감하는 것은 나에겐 무척 중요한 일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2020년 5월 경부터는 당장이라도 때려치우고 싶었던 한인100년사도 결국 12월 출판기념회 마무리까지 꾸역꾸역 자리를 지켰습니다. 책상 앞에서 몇 개월씩 씨름해야 하는 번역 프로젝트들을 마침내 마지막 페이지까지 끝내는 것도, 매번 큰 사고를 치는 술라웨시의 파트너 릴리와 딸, 자카르타의 말썽꾸러기 메이와 아이들 손을 끝내 놓지 않는 것도 대략 같은 이유일 것 같습니다. 물론 이 부분을 곰곰이 생각하며 굳이 이런 식으로 사안의 성격을 규정해 본 적도 이전엔 한번도 없었습니다.
앞으로 나흘.
절대 우울하지 않은 기꺼운 마음으로 인생질문의 챕터를 마무리할 준비를 합니다.
역시 이것도 좀 병적인 걸까요?
2021. 5.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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