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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당초 내 인생에 뭔가 쉽고 만만한 게 있을 리 없었다.

한국인으로 살아가기

세바시 인생질문 에세이

생각이 유연한 노인

beautician 2021. 6. 16. 11:39

곱게 늙긴 틀렸다

 

특정 나이를 뜻하는 한자들이 대부분 논어(論語)에서 왔다는 건 얼추 알고 있었지만 그 뜻을 되새겨보면서 수천 년을 뛰어넘는 신랄한 풍자 같은 것이 느껴집니다.

 

30세를 말하는 이립(而立)은 모든 기초를 세우는 나이, 40세 불혹(不惑) 엔 세상 일에 미혹되지 않는다고 하며 50세 지천명(知天命)에 하늘의 뜻을 깨닫고 60세 이순(耳順)에 이르러 성숙한 경륜과 사리판단으로 타인의 말을 수용하고 70세 종심(從心)엔 자기 뜻대로 행해도 하늘의 뜻에 어긋나지 않는다, 즉시 하늘과 땅의 뜻에 통달한다고 합니다. 다 논어에 나오는 얘기랍니다. 읽어보면 읽어볼 수록 공자님이 고도의 풍자를 섞어 뼈 때리는 농담을 하신 것 같습니다. 그가 살던 2500년 전이라고 해서 사람들이 50살에 벌써 하늘의 뜻을 다 알았을 리 없으니까요.

 

2012년 오랜 만에 한국 갔을 때 우연히 지나게 된 박근혜 후보 유세장에서 만난 어버이연합 노인들은 이순(耳順)이나 종심(從心)의 의미와는 완전히 반대편에 있었습니다. 성숙한 경륜이나 올바른 사리판단은커녕 뭘 해도 하늘의 뜻에 어긋나 보였습니다. 군복이 그리 신성한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공공재 또는 가치중립적 내지, 보다 긍정적 의미여야 할 것을 일방의 정치적 목적에 억지로 사용하는 것을 용납하기 힘들었습니다. 아직 태극기를 들고 나오기 전, 그러니까 그들이 태극기부대라 불리기 훨씬 전의 일입니다.

 

2012년 11월  

사실 나이 들면서 고집이 세어진다는 것은 평생을 통해 갖게 된 세계관과 가치관이 확고해지기 때문이니 비난할 일은 아닙니다. 그런 확증편향을 남에게 강요하는 것, 자신과 다른 가치관을 가진 이들을 짓뭉개려 드는 행태가 문제인 거죠. 성향이 아니라 예의가 문제인 겁니다. 진중권의 논리나 주장이 문제가 아니라 그 깐족거림이 문제인 것처럼요.

 

나이가 들고 노인이 되고 나서도 여러 모로 아름답기만 하려는 건 분명 지나친 욕심입니다. 어차피 그렇게 될 리도 없는 일이고요. 그래서 결국 노후를 위해, 즉 내가 지금의 나처럼 더 이상 생각하거나 행동하지 못하게 되는 시점이 다가오더라도 꼭 지켜야 할 몇 가지 원칙을 세워 두는 게 최선일 것 같습니다. 뭔가 되겠다는 것보다 최소한 뭔가는 되지 않겠다는 쪽으로.

 

남에게 휘둘리지도 말고 남을 휘두르지도 말자. 비록 내 아이들일지라도.

 

이 대목에서 어제 베트남 지인에게 카톡 블록을 먹인 것이 불쑥 떠오릅니다. 6년 만에 시작한 대화를 그는 또 다시 이런저런 요구를 통해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몰고 갔습니다. 자기가 가입한 다단계 회사 홈페이지를 인도네시아어로 무상 번역해줄 것을 요구하다가 이번엔 뜬금없이 내 블로그 배경화면을 바꾸라는 요구를 하는 걸 보며 선을 그은 겁니다. 내가 그를 휘두를 생각이 없는데 그가 나를 휘두르려는 시도를 끊임없이 하도록 놔둘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비루하지 말자. 존엄사를 찬성하고 이 세상에 내 뼈다귀를 남기지 않겠다…… 뭐, 이런 원칙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역시 가장 중요하다 여기는 것은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전제를 깔고 상대방의 말을 끝까지 듣겠다는 것입니다. 아내나, 부모, 아이들 같이 가족들 말을 끝까지 듣는 게 갈수록 더욱 중요해질 것 같습니다. 지금은 아직 잘 못하는 부분이죠.

 

몸이 낡어도 생각이 유연한 사람은 결코 노인이 아니라고 믿습니다.

하지만 바로 어제까지도 고집스럽게 살아온 평생을 돌이켜 보면 앞으로 식사할 때마다 국에 섬유유연제를 좀 섞어 먹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하곤 합니다.

 

섬유유연제  

 

 

2021. 5.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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