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서와 소설 사이, 그 어디쯤

애당초 내 인생에 뭔가 쉽고 만만한 게 있을 리 없었다.

한국인으로 살아가기

세바시 인생질문 에세이

세바시 인생질문 마지막 에세이

beautician 2021. 6. 22. 11:09

 

10년 후의 미래

 

우선 10년 전의 나를 돌아봅니다.

당시 블로그에 올려 놓은 글들은 온통 미용시장과 미용세미나, 미용가위의 날이나 핸들에 대한 기술적인 얘기들뿐입니다. 그로부터 불과 3년 후 미용기기 수입판매 사업이 허물어지기 시작할 것을 전혀 상상도 하지 못한 채 인도네시아 전역 10대 도시를 활발하게 돌아다니며 현지 도매상들과 거래를 트고 사업확장을 모색하고 있었습니다. 사람은 정말 한 치 밖도 내다보지 못하는 겁니다.

 

그러니 오늘을 토대로 10년 후를 예측해 보는 것 역시 거의 타로점을 치는 것과 비슷한 일입니다. 사회진출을 준비하던 학창시절 배웠던 거의 모든 것들이 평생 별 도움되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죠.

 

2016년쯤에 삶의 전기가 찾아온 거라 생각합니다. 작가라는 정체성이 생기기 시작하던 시절이었습니다. 2018년 9월 <수카르노와 인도네시아 현대사>가 출간되면서 그 정체성이 보다 분명해져서 이후 내가 글을 쓰는 것 이외의 일을 할 때에도 새로 만난 사람들에겐 늘 작가 명함을 내밀었습니다.

 

작가명함

 

“이거 안드리면 아무도 내가 작가인줄 모르거든요.” 명함 줄 때 뻘쭘해서 이 말을 꼭 해야 했습니다.

 

원래 단편소설을 써서 작가란 꼬리표가 붙었으니 ‘소설가’라 쓰고 싶었지만 이후 생계를 위해 보고서와 기사를 주로 쓰게 된 입장이어서 소설가란 명칭은 양심의 가책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래서 작가. <막스 하벨라르>를 공동번역한 후 ‘번역가’도 프로필에 살짝 올려 놓았습니다. 전문분야는 인도네시아 영화, 출판, 무속 등. 뭐 하나만 걸려라 하는 마음으로 여러 개 걸쳐 놓고 있습니다.

 

미용기기 수입판매처럼 몇 년 후 또 다시 대대적인 방향전환을 하게 될 지 모르지만 현재로서는 글 쓰는 일을 빼고는 10년 후 또는 그 이후의 미래를 떠올리기 쉽지 않습니다. 우선은 온갖 귀신들이 등장하는 인도네시아 배경 퇴마소설을 써볼 생각인데 어쩌면 터전을 잃고 더욱 깊은 정글 속으로 쫓겨 들어가는 가련한 마물들을 위한 권익보호 캠페인이 되기 쉽습니다.

 

물론 시도해 보고 싶은 다른 것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학창시절 충분히 도를 닦았으니 이제부터 시도하는 일들은 무조건 재미있고 흥미진진한 것이어야 합니다. 중국어 공부는 유튜브 독학으로 분명 한계가 있습니다. 현지인 가정교사를 한 번 불러 볼까요? 네덜란드어도 해보고 싶습니다. 왜 난 언어에 쉽게 꽂히는 걸까요?

 

진입하고 싶은 완전히 새로운 분야 중엔 드로잉패드로 그림 그리는 걸 해보고 싶습니다. 게임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딸이 늘 하는 일인데 얼마전 드로잉패드를 바꾸면서 전에 쓰던 걸 주고 간 지 3년쯤 되었습니다. 하지만 뭐가 바빴는지 받았을 때 모습 그대로한 번도 꺼내 보지 않았습니다. 사실 요즘은 뭔가 새로 배우는 게 쉽지 않은데 드로잉패드 사용법 공부도 건 세월이 걸릴 일입니다. 하지만 그걸 좀 배워서 위의 퇴마소설을 책으로 내지 못하면 웹툰으로 만들어 볼까 생각도 합니다.

 

드로잉패드  

 

영상작업도 공부해보고 싶습니다. 내가 해보고 싶은 분야는 인도네시아 역사 또는 무속 이야기입니다. 5분 전후 짧은 영상들을 만들어 보려 해요. 물론 내 얼굴을 들이밀어 시청자 식욕저하 등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면 안되니 원고를 잘 만들어 오디오 위주로 가면서 관련 사진이나 그림 PPT 같은 걸로 배경에 띄워 놓을까 생각합니다.

 

끝장을 봐야 하는 성격이어서 뭔가 시작하는 게 매우 부담스럽지만 그래서 오히려 일단 시작만 하면 어떻게든 될 것 같기도 합니다. 어쩌면 곧 유튜브에서 여러분들을 만나게 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학창시절 바라보았던 미래가 불투명했던 것처럼 인생의 반환점을 한참 지나온 오늘 바라보는 미래 역시 새침데기처럼 안개속에서 자기 모습을 잘 보여주지 않습니다.

 

늘 그랬던 것처럼 역시 그때 가봐야 알겠네요.

 

 

2021. 5.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