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으로 살아 가기
부동산 정책보다 윤리교육이 시급 본문
집은 들어가 사는 곳
평생 재테크에 밝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부동산, 주식, 가상화폐 같은 것들에 대한 사람들의 끝없는 불만이 대충 이해될 듯하면서도 결국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보편타당한 주장들도 분명 있지만 요즘 가장 크게 대두된 부동산 문제는 대체로 왜 저 사람들의 욕망을 억제하고 통제할 정책을 만들어내지 못하느냐? 그런데 내 욕망을 구현해 낼 정책은 왜 내놓지 못하느냐? 하는 요구가 서로 충돌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 욕망이란 사람들 마음 속에 있는 것으로 스스로 이성적으로 자제하고 조율하며 때로는 양보도 해야 비로소 해결될 문제인데도 자신은 양껏 마음 내키는 대로 욕심을 부리면서 그 욕심을 통제하지 못하는 정부와 정책을 욕하는 게 일견 이치에 맞지 않아 보입니다. 대체로 당신들 마음이 못된 건데 왜 정부를 탓하냐, 이런 말이 목구멍까지 튀어나옵니다. 부동산정책보다는 윤리교육이 더욱 시급한 문제라고 느껴지는 대목입니다. 뭐, 이 말에 돌 던지는 사람도 있겠지만 내 생각은 그렇습니다.
아내가 오랫동안 영어과외를 한 수입으로 5년쯤 할부를 부어 자카르타 북부 끄마요란 지역에 작은 아파트를 하나 샀습니다. 31 제곱미터이니 공용면적을 빼면 열 평도 안되는, 손바닥만한 거실 하나, 침실 하나, 화장실 하나로 된 곳입니다. 외국인의 부동산 소유가 제한되어 있어 인도네시아에서 명의를 어찌할 지 1~2년 내에 결정해야 하고 아내는 언젠가 한국으로 돌아갈 것을 대비해 매각을 희망하지만 예전에 한번 길바닥에 내몰려 본 경험을 가진 사람으로서는 그 작은 아파트의 존재가 큰 위안이 되는 게 사실입니다.
물론 그 곳엔 지금 끌라빠가딩 아파트에 있는 가구들이 다 들어가지도 못합니다. 예전엔 한국에 이사짐으로 가져가 팔 요량으로 가구들을 사 모으는 사람들이 꽤 있었지만 이젠 자기 집이 없는 상태에서 가구를 늘리는 건 기동성을 해칠 뿐입니다. 그렇다고 가구를 처분하거나 버리는 건 안타까운 일이죠.
예전 파산 직후 반둥의 한 봉제공장에 거의 취직할 뻔했습니다. 이름만 대면 알 만한 그곳은 당시 한국 봉제공장들 중 가장 큰 곳 중 하나였는데 유럽 주거래선의 오더가 끊기면서 새로 영업팀을 꾸려 유럽 각지에 보내 마케팅을 할 요량이었고, 그래서 나 말고도 영어 잘하는 화교와 인도인도 각각 한 명씩 선발했었죠. 하지만 거기서 구해주겠다는 집이 너무 험했습니다. 그런 전례를 들어본 적이 없었는데 아마 사실은 회사 자금상황이 정말 좋지 않았거나 그런 식으로 새로 들어오는 매니저들의 군기를 잡으려는 것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사실 2000년대 초반 반둥에서 4인 가족이 살 만한 작은 집 하나를 임대하는 비용은, 파산한 내가 당시 감당할 수 없었을 뿐이지 자카르타에 비해 훨씬 적은 금액이었어요. 회사에 매달려 아쉬운 부탁을 하도록 만들려는 것 같았습니다. 형편없는 보수는 차치하고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살아야 할 집엔 당시 가지고 있던 가구들이 반도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건 당신 사정이죠.” 회사 입장은 그랬습니다. 새 직장에 가는 것이 당연히 전혀 즐겁지 않았습니다.
자카르타에 살고 있던 아파트의 계약기간이 점점 줄어들어 이제 짐을 빼서 반둥으로 옮겨야 할 날이 사흘쯤 남았을 때 자카르타와 땅그랑 경계선 빠룽(Parung)이란 곳의 다른 봉제공장에서 갑자기 자리가 났다며 연락이 왔습니다. 몇 주 전에 면접을 봤던 곳이지만 당시엔 시큰둥한 반응이었어요. 그런데 한국인 관리자 한 명이 마지막 월급을 받은 후 몇 주째 출근하지 않아 급히 대타 후임을 찾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곳은 제대로 된 집을 구헤 주겠다고 했으므로 반둥행을 사흘 앞두고 우린 빠룽으로 급선회했습니다. 물론 그게 결국 나중엔 늑대를 피해 호랑이굴로 뛰어든 셈이 되고 말지만 아무튼 가족들을 길거리에 내앉히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 당시 가장 큰 위안이었습니다.
집은 들어가 사는 곳이란 인식이 그 때의 경험을 통해 더욱 깊어졌습니다.
그래서 집을 재테크의 수단으로 취급하는 것은 대단히 비윤리적이라 느껴집니다.
집으로 돈을 벌겠다고만 생각하니 들어가 살아야 할 수많은 사람들이 마음을 다치는 것이죠.
2021. 5.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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