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서와 소설 사이, 그 어디쯤

애당초 내 인생에 뭔가 쉽고 만만한 게 있을 리 없었다.

한국인으로 살아가기

세바시 인생질문 에세이

체력은 국력

beautician 2021. 6. 11. 12:00

산을 다시는 쳐다보지도 않겠다고 했는데

 

 

고3때 체력장을 준비하면서, 그리고 대학시절 ROTC 입단을 앞두고서도 달리기 연습을 좀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무릎이었어요. 연골인지 인대의 문제인지 알 수 없었지만 조금 무리했다 싶으면 며칠씩 걸을 수 없을 정도로 무릎이 아팠습니다. 땅을 짚으면 무릎 슬개골 안쪽에서 통증이 엄청났어요. 당시 아버지는 어디서 야메 의사를 몇 차례 불러와 바늘이 길다란 주사기에 담긴 정체불명의 약물을 슬개골 밑으로 주사했는데 그 덕인지 아닌지 ROTC 생활 시작한 후 군시절엔 무릎이 잘 버텨주었습니다.

 

자대에서는 살이 조금씩 찌기 시작하는 걸 느끼게면서 저녁 5시 일과가 끝나면 내 숙소가 있는 멸공관에서 제3땅굴까지 왕복 8킬로를 매일 뛰었습니다. 5시에 출발해 땅굴에 도착하면 그쪽 관리부대에서 저녁 얻어먹고 다시 뛰어 돌아오는 일과였죠. 지금은 시설이 좋아진 모양이지만 당시엔 지하 70미터에 있는 제3땅굴에 도달하는 우리 측 200여미터 길이의 인터셉트 터널 45도 경사를 도보로 몇 차례씩 오르내려야 했기 때문에 젊은 시절이었지만 어느 정도의 체력관리가 필요했습니다. 매년 경기지역 종합고등학교 2학년 학생들이 수백 명씩 들어왔는데 여학생들이 갱도 안에서 픽픽 쓰러져 병사들이 업고 지상으로 올라가야 하는 응급상황이 벌어졌고 때로는 우리 병사들 숫자 이상이 쓰러지면 결국 나도 한 명 업고 경사갱도를 뛰어올라가는 것이 일과였습니다.

 

군대 말뚝 박겠냐는 제의를 거절한 여러가지 이유들 중 하나는 나중에 군경력을 쌓다 보면 반드시 특전사나 특공연대를 경유하게 될 터인데 그보다 당장 대위를 달려면 OAC라고 부르는 중급 군사훈련을 받아야 했고 거기 공수부대 훈련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 이유 중 하나였습니다. 낙하를 위한 지상훈련을 무리하게 하다 보면 그동안 잠잠했던 내 무릎이 다시 문제가 되기 쉬울 거라 생각했습니다. 군이 내 상태를 고려해 훈련강도를 조절해 줄 리 없었고 군복 왼쪽 가슴에 날개 마크 하나를 달려고 내 무릎을 걸고 싶지 않았습니다.  

 

일상적으로 하던 운동은 전역과 동시에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곧바로 돌아간 대기업은 입대 전 이미 오리엔테이션을 마친 상태여서 별도의 교육과정 없이 곧바로 말단 부서에 배치되었는데 몇 년간 매일 야근이 이어졌고 고작 한다는 운동이 한달에 한 번 토요일마다 회사 전체가 가는 서울 변두리 산행이었습니다. 무등산 이곳저곳을 뛰어다녔던 상무대 14주 훈련을 마치면서, 그리고 매일 오르내렸던 제3땅굴을 떠나면서 다시는 산이나 동굴을 쳐다보지도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세상은 내 뜻대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그후, 그리고 인도네시아에 들어온 후 내 체력을 가장 많이 갉아먹은 것은 흡연과 운동부족일 것입니다.

 

다행히 6년 전쯤 담배는 어렵게 끊을 수 있었지만 계속 줄어들던 운동량은 2015년 베트남에서 돌아온 후 거의 중단되다시피 했습니다. 어떤 식으로든 돌아가던 사업이 거의 완전히 멈추면서 컴퓨터 화면 안쪽 인터넷의 심연 너머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를 탈출구를 모색하며 책상을 떠나지 못하던 시절이 한동안 계속되었고 이후 어쩌다 작가의 길에 들어서면서 더욱 운동과는 담을 샇게 되었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라는 에세이집에서도 그렇고 여러 유명 작가들도 따로 시간을 내 일상적인 운동을 하고 있다지만 그건 어쩌면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둔 여유로운 작가들의 세계여서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늘 마감에 쫓기는 상황에서 육체의 운동에 마음의 여유가 꼭 필요한 것이란 생각이 들게 됩니다.

 

특히 코로나 팬데믹이 시작되고 여러 부문에 활동제한이 걸리면서 운동할 수 있는 공간도 크게 제한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더욱이 대기오염이 심한 자카르타에서 야외운동할 만한 곳이 업어 쾌적한 공기를 찾으려면 최소 20~30킬로미터 정도 차를 타고 나가야 하고 근교 산에 오르려면 60킬로 정도 가야 합니다. 험난하죠. 그래서 골프를 치는 게 가장 간단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모양입니다.

 

체력의 중요성과 운동의 필요성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 절실히 느껴집니다. 글 쓰는 것도 결국 체력을 바닥에 깔고 하는 것이니까요. 하루에 30분 정도 집안에서 페달을 밟지만 제대로 하려면 체중을 10킬로 정도 빼서 재택근무 이전으로 되돌려야 합니다.

 

당장 팔굽혀펴기부터라도 시작해야 할까요?

아니면 최근까지도 주로 바퀴벌레 잡을 때 쓰던 7번 아이언을 다시 꺼내야 될 때가 온건 지도 모르겠습니다.

 

 

 

2021. 5.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