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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이란 입장과 환경에 따라 늘 달라지는 것 본문

세바시 인생질문 에세이

최선이란 입장과 환경에 따라 늘 달라지는 것

beautician 2021. 6. 7. 12:54

올바른 선택과 최선의 선택

 

 

늘 최선의 선택을 하려 했지만 그게 반드시 올바른 선택이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어떤 것이 과연 올바른 선택인지도 짚어 봐야 할 문제입니다. 결과적으로 개인과 가족 또는 조직에 경제적, 비경제적 이익을 가져다 주어야만 올바른 선택일까요? 아니면 온통 손해투성이에 만신창이가 되어도 양심과 신념에 비추어 한 점 부끄러운 점 없는 선택이 올바른 것일까요?

 

어떤 이는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고 사람들 손가락질을 당해도 가족들 잘 먹이고 잘 입힌 사람이 훌륭한 가장이라고 주장합니다. 신념과 의리를 지키겠다고 좌충우돌하는 남편이 결코 좋은 가장이 아니듯 정의롭고 순결한 선택 역시 꼭 올바른 선택이라 하긴 어려울 듯합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어떤 선택이 올바른가보다 그 순간, 그 상황, 각자의 처한 입장에서 과연 최선의 선택인가를 고민하는 것뿐입니다.

 

복무기간을 마치고 전역하던 당시 이미 입사한 대기업으로 돌아가느냐, 소설가나 대중가요 작곡가가 되기 위한 길을 걷느냐 또는 직업군인이 되느냐 하는 선택의 기로에서, 비록 지금 먼 길을 돌고 돌아 거의 전업작가가 되었지만 당시 대기업으로 돌아가기로 했던 선택은 지금도 최선이었다 생각합니다. 또 다시 그 순간이 돌아온다 해도 같은 결정을 했을 것 같아요. 하지만 그게 올바른 선택이었는지도 지금도 알 수 없습니다.

 

인생의 갈림길에 처할 때마다 늘 최선의 선택을 하려 했고 시간과 상황에 떠밀려 파장난 연회 테이블에 몇 점 남은 깍두기처럼 대체로 선택의 여지가 없어 단 하나의 길 밖에 남지 않았다 해도 그 역시 나름대로 그 상황에선 최선의 선택지였다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 최선의 선택이라는 게 같은 상황에서도 각자의 입장에 따라 얼마나 다를 수 있는지 새삼 경험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재무관리 회사를 잘 운영하고 있는, 그러나 당시엔 어떤 한국계 회사의 회계팀장을 맡고 있던 한 ROTC 후배가 우리 동네 병원에서 딸의 수술을 대기 중이라고 하여 아내와 함께 가서 만난 적이 있습니다. 병원은 자카르타에만도 여러 개의 대형 지점들을 두고 있는 미트라끌루아르가(Mitra Kuluarga)라는 영리병원이었는데 내가 사는 끌라빠가딩에서는 가장 큰 병원이기도 했습니다.

 

후배의 딸이 배가 아프다고 해서 병원에 왔는데 급성 맹장염이라며 다음날 새벽에 수술일정을 잡았다고 했습니다. 후배 부부는 당연히 매우 근심스러운 표정이었고 수술을 위한 예치금도 지불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상황이 참 이상했습니다. 급성맹장염이라면 당장이라도 수술을 해야 할 터인데 특정 의사가 출근하는 다음날 새벽까지, 그러니까 15시간 이상을 입원해서 대기해야 한다는 것이 그랬습니다. 위급한 환자라면 환자 상황을 따라야 하는데 의사의 스케줄을 우선 한다는 게 ‘위급한 상황’이 아니라는 신호였죠. 그 위급한 상황의 딸이 부모 옆에서 핸드폰으로 게임을 하며 킥킥거리고 있는 모습은 더욱 위화감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도대체 뭐가 위급하다는 것이었을까요?

 

“그러게요. 저도 좀 의아하게 여겼지만 수치가 그렇게 나왔다는 거에요. 수술을 안하면 위험할 수 있다고요.”

 

미트라끌루아르가는 ‘가족의 친구’ 영어 Family Friend의 인니어 번역.  

 

그 병원은 그로부터 몇 년 전에 메이가 길에서 몇 차례 실신하는 상황이 벌어져 검사를 받으러 왔을 때 그건 나중에 알게된 바 마르셀을 임신했기 때문이었는데 그 사실을 아마 앞서 몇 건의 검사결과를 받아 이미 알게 되었을 게 분명한 의사가 메이에게 돈이 많이 드는 검사 중 하나인 위내시경 검사까지 요구하며 환자의 주머니를 탈탈 털려 했던 곳이었습니다. 내게 그 병원에 대한 인상이 좋을 리 없었고 그 병원이 무리하게 강요하는 듯한 분위기에 의구심이 고개를 들었습니다. 게다가 금쪽 같은 딸의 몸에 메스를 데는 건 어떤 부모도 원할 리 없는 일입니다.

 

난 후배에게 내 생각을 말했습니다. 병원 진단이 그렇다니 오늘 밤 입원하는 건 당연한 일이겠지만 지금 보기에 딸은 멀쩡하고 이젠 아프지도 않다고 하니 내일 아침까지도 상태가 나빠지지 않으면 수술은 취소하고 다른 병원으로, 가능하면 한국인 의사가 있는 병원으로 옮겨 한 번 더 검사해 보는 게 어떻겠냐고요. 그러고서도 급성 맹장염이 맞다면 그때 가서 수술을 결정하자고요. 그게 딸의 안전도 지키고, 가능하면 수술을 피할 가능성도 있고, 불필요한 의료행위에 큰 지출을 하는 것보다 나을 거라 덧붙였습니다. 인도네시아 영리병원에서 맹장수술을 하는 것은 미국처럼 몇 만 불이나 들지는 않지만 한국보다 족히 열 배는 비쌀 겁니다.

 

고개를 끄덕인 후배와 함께 응급실 담당 의사에게 그런 의견을 전하자 30대 초반쯤의 여성 의사가 인도네시아 사람 답지 않게 격앙된 목소리로 삿대질까지 하면서 반응했습니다.

 

“그건 순전히 당신들 결정이니 아이가 죽어도 난 책임 못집니다. 당신 의사에요? 아이가 죽으면 당신이 책임질 겁니까?”

 

내일 아침까지 추이를 보고 수술을 결정하자는 말에 의사가 그런 반응을 보일 줄은 몰랐습니다. 게다가 그 죽을 지도 모르는 아이가 바로 몇 걸음 옆에서 여전히 핸드폰 게임을 하고 있는 중이었는데요. 미트라끌루아르가 병원의 젊은 의사는 한국의사라면 절대 입에 담지 못할 소리로 당연하다는 듯 윽박지르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사실 그 결정에 반신반의하던 후배가 그 대목에서 폭발했습니다.

 

“수술해보니 맹장염이 아니면 당신은 어떻게 책임질 건데? 당신 맹장이라도 내놓을 거요?”

 

다음날 아침 퇴원해 이 병원에서 한 검사결과들을 가지고 다른 병원에서 간단한 문진과 검사를 한 결과 병명은 배탈이었고 어제 났던 배탈은 그날 이미 다 나은 상태였습니다. 아무 이유도 없이 후배는 딸의 몸에 칼자국을 낼 뻔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나중에 곰곰이 생각해 보면 내가 위험한 오지랍을 부린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누구보다도 이성적인 그 후배가 딸의 안위를 위해 자기 판단보다 의사의 말을 전적으로 신뢰해 내린 선택을 내가 이성과 비용효율, 그리고 내 개인적 경험까지 얹어 반대방향의 선택을 제시했던 것이니 말입니다. 비록 그것이 강권이나 윽박지름이 아닌, 충분히 다듬어진 간곡한 조언이었지만 자칫 주제넘은 참견으로 비칠 수도 있었습니다.

 

우린 그날 둘 다 최선의 선택을 한 것이지만 각자의 입장에 따라 그 선택이 완전히 달라질 수도 있다는 것을 그 일로 새삼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올바름’이라는 것 역시 지극히 주관적인 것이라 생각하게 됩니다.

 

 

2021. 5.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