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으로 살아 가기
빌어먹을 의리와 일말의 책임감 본문
인생 중대사를 결정하면서
인생의 반 좀 넘는 기간을 매 단계마다 다른 사람들의 결정에 의해, 또는 등 떠밀려 다음 수순으로 접어들곤 했던 것 같습니다.
자신이 진학할 학교를 스스로 선택할 수 없다는 건 매우 이상한 일인 것 같은데 심지어 부모조차 갖지 못했던 그 권리가 주어진 것은 대학을 결정할 때부터였어요. 고3 당시 서울대 농대를 가라고 윽박지르는 담임선생님의 집요한 설득을 들으며 난 그가 우리나라 농업발전에 뭔가 특별한 사명을 가진 사람이라 생각할 뻔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아버지는 20년 넘게 사회에서 모진 실패를 겪은 끝에 애당초 1950년 인민군들에게 붙잡혀 강경 면사무소 창고에 갇혀 다음날 처형을 기다면서 신 앞에 세운 서원대로 막 목사 안수를 받아 개척교회를 시작하던 중이었고 엄마가 평생 일했던 남침례교 선교회 한국지부에서 받는 쥐꼬리 만한 월급으로는 가족의 생계를 지탱하기에도 벅차 당시 아직 재수 중이던 형, 곧 수험생이 될 동생의 학비, 학원비를 대기에도 충분치 않았습니다. 장학금을 받지 않으면 내가 대학가기 힘들다는 건 기정 사실이었으니 어떤 식으로든 입학금, 등록금을 내야 하는 서울대 농대는 내 선택지 바깥에 있었습니다. 물론 난 농업에 뜻도 없었어요.
ROTC를 선택해 군에 장교로 간 것도 훗날 어깨에 별을 달겠다는 포부가 있어서가 아니었고 전역 당시 이미 입사했던 대기업으로 돌아간 것도 대학을 선택하던 때와 비슷한 이유였습니다. 경제적인 문제에 등 떠밀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전역을 3개월쯤 앞둔 시절 동기들은 앞다퉈 장기휴가를 받아 사회에서 구직전선에 뛰어들었습니다. 나 역시 추가 구직을 통해 좀 더 나은 조건의 회사에 갈 수도 있었겠지만 누군가 부대를 지켜야 했으므로 그건 결국 이미 취직해 둔 내 몫이 되었습니다. 대규모 전투부대였다면 나 말고도 육사나 삼사 출신 장기 복무할 친구들이 자리를 지켰겠지만 제3땅굴을 관리하던 우리 부대엔 ROTC 동기만 셋뿐이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둘은 나한테 모든 걸 미루고 2개월 넘는 장기휴가를 즐겼는데 그때 코오롱 상사에 취직한 동기는 재작년에 그 회사 부사장을 역임하고 퇴역했습니다. 어차피 우리 현역시절이 거의 동시에 저물고 있지만 그 당시 의리나 책임감을 따지지 않았다면 내 인생도 많이 달라졌을 지 모릅니다. 어쨌든 등 떠밀렸다 해도 그것 역시 내 결정이었으니 그 선택의 결과를 내가 일생을 통해 책임진 셈입니다.
대기업을 나와 의류팀 동료들과 함께 동업을 한 것, 그래서 인도네시아에 다시 돌아온 것, 그후 여기서 27년째 살고 있는 것 모두 어느 정도 상황에 등 떠밀린 측면이 적지 않지만 매 순간 최선의 선택을 했던 거라 생각합니다. 물론 평생을 따라붙은 그 빌어먹을 의리와 일말의 책임감 같은 것들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면 좀 더 가볍고 효율적인 결정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랬다면 그건 내가 아니었겠죠. 늘 하는 말이지만 사람은 변하지 않아요.
굳이 과거를 돌아보지 않아도 지금 역시 많은 결정의 순간들을 앞두고 있습니다.
바로 얼마 전 대만업체가 제시했던 니켈광산업체의 CEO 또는 감사위원장 자리는 해볼 요량이었지만 오랜 파트너의 이익에 반하는 요구를 받게 될 것이 분명해지면서 결국 최종적으로 거절하고 말았습니다. 내가 그랬다고 해서 파트너인 릴리가 앞으로 평생 나한테 고마워할 그런 인간은 아닙니다. 하지만 걘 이미 가족이니 어쩔 수 없습니다. 자식이나 부모가 고마워하지 않는다고 해서 등에 비수를 찌를 사람은 (요즘 뉴스를 보면 좀 있는 것 같지만) 거의 없으니까요.
코로나 시대에 만들어 놓은 포트폴리오는 위태롭기 짝이 없습니다. 가장 중점을 둔 영화진흥위원회 일은 기본적으로 한-아세안 영화기구를 만들기 위한 전초작업 같은 것이어서 원래 유럽과 북미에서만 운영하던 현지 주재원 제도를 작년부터 인도네시아와 베트남까지 확대한 것이었죠. 하지만 코로나가 확산되던 시기에 그런 변화가 생긴 것은 당시 임기가 얼마 남지 않았던 전 영진위 위원장의 급한 마음이 반영된 것 같습니다. 결국 코로나 팬데믹은 1년 넘게 지속되고 영진위 위원장이 지난 1월 교체되면서 그 일 역시 위기에 처했습니다. 신임 위원장으로서는 전임자가 별려 놓았으나 앞으로 어찌 될지 불분명한 일들은 우선 정리하고 싶겠죠. 그건 인지상정이니까요.
J사장이 추진하는 북부 자카르타의 부동산 개발 프로젝트를 돕고 있지만 지난 2016년부터 아직까지 허가가 나지 않은 일이 이제 와서 팬데믹 와중에 간단히 승인이 나서 진행될 리 없습니다. 오히려 얼마 전 각 부처 차관급, 국장급들이 나왔던 관련부처 줌 미팅에서 주무부처인 국가사무처는 매우 부정적인 입장을 피력했습니다. 해당 지역의 토지사용 허가는 ‘모라토리움’ 상태라는 겁니다. 특별한 경우가 아닌 한 허가를 내주지 않겠다는 거죠.
J사장으로선 이미 들어간 돈과 시간이 있으니 어떡하든 여러 비싼 줄들을 동원해 상황반전을 도모하겠지만 지난 십 수년간 여러 한국 시행사들이 용감하게 들어와 그런 비슷한 프로젝트들을 추진하다가 인도네시아 정부에 돈만 뜯기고 결국은 빈털터리가 되거나 사기꾼으로 몰려, 또는 정말 사기꾼이 되어 번번히 퇴출된 것은 그만큼 그게 돈이 많이 들면서도 성공의 기약이 없는 일이란 증빙이기도 합니다. 큰 진전이 없는 한 J사장은 앞으로 몇 개월 더 버티지 못할 것이고 그의 선택지는 사기꾼이 되는 걸 무릅쓰고 (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문서 변조나) 여타의 범상치 않은 방법을 동원해 돈을 더 끌고 들어와 기약 없는 사업을 계속 추진하거나 깨끗이 두 손 들고 귀국해 그간 수십 억을 투자했던 사람들에게 아무 결과도 내지 못한 채 그 돈을 모두 소진한 이유를 소명하며 청산하는 수순에 들어가야 할 것입니다.
결국 그래서 내가 노력해 끼워 맞춘, 생계를 위한 포트폴리오가 조만간 무너질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입니다. 단지 그 시기가 언제인가 하는 것뿐이죠. 전업작가로서는 선택지가 그리 많지 않은 상황입니다. 하지만 그런 포트폴리오를 맞춰 가는 일은 그래서 늘 주기적으로 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징검다리를 타듯 크고 작은 프로젝트들을 시도하면서 없는 길을 만들어 가는 것이죠. 영진위처럼 장기적인 프로젝트라면 더할 나위 없는 일이지만 몇 주짜리 조사용역, 번역용역 같은 것들도 요즘은 더욱 소중해집니다.
이런 상황에서 나에게 서울대 농대를 가라던 고3 시절 담임선생님이 가끔 떠오릅니다. 최소한 그분은 한국 농업발전을 위해 나에게 인생의 진로를 제시해 주셨는데 이젠 그런 얘기조차 해주는 사람이 없어요.
자기 삶의 온전한 주체로 살아가는 게 어떤 이들에겐 가슴 벅찬 일이겠지만 때로는 꽤 막막한 일이기도 합니다.
2021. 5.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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