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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바시 인생질문 에세이

결별에 임하는 자세

beautician 2021. 6. 3. 11:43

산뜻한 이별

 

인생이 순탄하게만 흘러간다면 이별이란 꽤 긍정적이면서도 신선한 인생의 필수과정일 것 같습니다. 졸업이나 이사, 전학을 하면서 피치 못하게 겪어야 하는 이별은 한 시대의 종말과 새 시대의 서막, 아쉬움과 재회의 희망 같은 것들을 내포하는 것이니까요.

 

대학을 졸업하면서 각 병과로 흩어지게 된 ROTC 동기들도 보병, 포병, 기갑, 화학 같은 전투병과들은(가만, 화학이 왜 전투부대지? 독가스 뿌리니까?) 나중에 광주 상무대에서 잠깐 다시 만나지만 전국으로 흩어지고 나면 전역하고도 몇 년이 더 지나 사회에서 과장 차장쯤 달고서야 비로소 동문회를 할 생각을 갖게 되죠. 그동안 엇갈려 걸어간 인생 행로 때문에 서로 하는 얘기가 잘 이해는 되지 않아도 그 반가움과 정겨움은 전혀 줄어들지 않습니다. 잘 기억해 보면 그런 친구들, 그런 사람들이 몇몇 떠오릅니다. 내가 인생을 아주 막 살진 않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육군보병학교 마크. 요즘은 보병학교, 공병학교, 이런 식으로 나눠진 모양입니다.  

 

준비없는 이별은 안타깝고 아쉽습니다. 군에 있던 시절 외할머니가 돌아가셨고 학창시절 예전 드라마 ‘복희누나’의 장미인애 배우를 연상케 하는 고모도 새벽기도를 다녀오는 길에 뺑소니차에 치어 세상을 떠났습니다. 군에 연락을 넣는 것도 쉽지 않았겠지만 그 사실을 전역한 후에나 알게 되어 억울하고 화가 나기도 했습니다. 엄마를 닮아 엄청난 미모를 보였던 고모의 아들 딸들도 이젠 아름답고 멋진 40대가 되었겠지만 이젠 그 이름도 잊었습니다. 고모의 죽음으로 교류가 끊기고 말았거든요.

 

할머니는 6.25 당시 강경에서 퇴각하던 국군에게 납치당하듯 빼앗겨 연락을 끊어진 큰아들과 전쟁이 끝나고도 좀 더 시간이 지나서야 재회했습니다. 당시 할머니는 피난갔던 부산에서 다시 강경으로 돌아와 피나는 노력 끝에 사람들을 많이 고용해 집에서 염색공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사업이 잘 되었다면 지금쯤 우리 집안은 한국 섬유업계에서 한 자리를 꿰어 차고 있었을 지도 모릅니다.

 

큰아들은 전투 중 몇 차례 부상을 당했던 모양이지만 1956년쯤에 크게 상한 곳 하나 없이 멀쩡한 모습으로 강경으로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전장이란 우리가 영화를 통해 간접 경험하는 것처럼 영웅적인 애국심이 넘치는 곳이 아니라 공포의 총량이 어느 쪽을 더욱 짓누르느냐로 승패가 결정되는 지옥이었고 그곳에서 전우들의 피와 살을 뒤집어쓰며 악귀처럼 싸워 끝내 살아 돌아온 큰 아들은 사람의 몰골을 하고 있었지만 너덜너덜해진 그 영혼이 원래 상태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오랜 치료를 필요로 했습니다. 하지만 국내에선 아직 정신적 외상 증후군에 대한 개념도 없던 당시엔 아무도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강경에선 잔치가 열렸고 큰 아들은 곧 혼인식도 올리게 됩니다.

 

하지만 큰아들은 그런 안정적인 생활이 오히려 불안했던 모양입니다. 기행을 거듭하던 그는 공장의 예쁘장한 여성 신입과 눈이 맞아 그 여인의 고향인 전남 완도로 들어가 버립니다. 그게 이후 60년도 넘게 이어지게 되는 이복형제들 전쟁의 서막이었습니다. 할머니의 큰 아들, 즉 내 큰아버지는 역시 전쟁 환경이 편안했던 것 같습니다.

 

2000년대 중반에 이복형제들의 싸움은 법정으로 번져 있었습니다. 내가 자카르타에서 파산의 나락, 그 깎아지른 벼랑을 맨몸으로 타고 오르던 시절 서울에서는 서자이면서도 당시만 해도 서슬 퍼렇던 도시개발과 공무원 신분을 이용해 가문의 장손 자리를 꿰찬 완도사촌형(여성신입, 나중에 완도 큰엄마라 불렀던 분의 아들)에게 본처의 아들이 소송을 걸었던 것입니다. 삼남매의 막내였던 그 사촌형은 두 명의 누나와 어머니(나에겐 큰엄마)와 함께 결혼할 때까지 우리 집에 같이 살았습니다. 이혼을 용납하지 못한 할머니가 그들을 모두 데리고 살기로 했으므로 내 아버지와 어머니가 받아들여 한 집에서 살았던 거죠. 그들이 장성해 모두 결혼하고 분가해 나간 후 또 한참 시간이 흐른 후 예의 소송이 벌어졌는데 그건 큰아버지가 마침내 세상을 떠난 직후였습니다.

 

소송과정에서 내 아버지는 곤란한 입장에 처했습니다. 본처 소생의 사촌형이나 완도사촌형 모두 아버지에겐 똑 같은 피붙이였는데 양쪽 모두 증언을 해달라고 요청한 상황에 어느 한쪽에 유리한 이야기를 하기 어려웠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증언에 양쪽 모두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어느 날 또 한 번의 공판이 있은 후 재판정 밖에서 사촌형이 아버지에게 삿대질을 했다고 합니다.

 

“당신을 더 이상 작은아버지라 생각하지 않겠소. 이제 우린 남남이니 내가 당신한테 존댓말 할 필요도 없겠지!”

 

본처 소생의 사촌형, 사촌누나들이 평생을 친아버지를 완도에 빼앗긴 채 살았으니 그 깊고 깊은 원한을 이해하지 못할 바 아닙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내 아버지에게 기염을 토했고 결국 그날 부로 그쪽 집안과의 모든 연이 끊기고 말았습니다. 한이 깊으면 연 정도 싹둑 자르는 것은 하나도 어려운 일이 아닌 듯합니다.

 

소송이 어떻게 끝났는지 알고 싶지도 않았지만 세 딸을 낳고서 결국 가문을 이을 아들을 낳지 못한 완도사촌형은 아직도 이른 나이에 비극적인 말년을 보내다가 최진실이 자살했던 그해 비슷한 방식으로 강원도의 한 모텔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결국 가문의 장손 자리가 본처 소생 사촌형에게 돌아간 것은 두 말할 나위 없습니다. 장례식에서 내 아버지는 본처 소생 사촌형을 마지막으로 보았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아직 연락처가 남아 있어 완도사촌형의 부고를 전하자 그가 온 것입니다. 원수의 죽음을 자기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겠죠.

 

“어머님은 잘 계시니?”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사촌형은 아버지의 질문을 칼로 베듯 끊고 자리를 떠났는데 나중에 큰아버지의 본처였던 큰엄마는 이미 세상을 뜨신 지 1년쯤 되었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사촌들의 마음 속에 자리잡은 방향을 잃은 원한이 얼마나 큰지, 아직도 얼마나 매섭게 불타오르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큰아버지가 돌아가신지 얼마 후 완도큰엄마도 암으로 세상을 떠났는데, 딱히 누구에게도 부끄럽지 않게 의롭게 산 것은 아니더라도 결과적으로 세상의 악의와 외로움에 짓눌려 죽어간 완도사촌형마저 죽은 후 그쪽 집안은 완전히 멸문한 셈입니다. 하지만 본처 소생 사촌들의 멈출 수 없는 원한이 이제 누구를 향하고 있을지는 너무나 뻔한 일이었습니다.

 

십년도 넘게 시간이 흘러 그 사촌들, 그리고 그들의 소생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해지곤 했지만 모든 연락처가 바뀌어 있었습니다. 연이 끊어졌다는 것을 실감했죠. 아마도 호적이나 주민등록등본 같은 것들을 떼어보거나 어딘가 관청에 문의하면 알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굳이 그러진 않으려 합니다.

 

이별은 산뜻한 게 좋습니다.

 

2021. 5. 9.

복희누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