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으로 살아 가기
사과의 기본은 때린 만큼 맞을 각오 본문
진심어린 사과
우린 매일 진심어린 사과를 하며 살아갑니다. 길을 가다 누구랑 어깨를 부딪히거나 커피를 쏟거나 할 때마다 급히 고개를 숙이며 미안하다는 말을 하게 되죠.
하지만 내 실수로 인해 상대방이 입은 손해의 정도가 커질 수록 사과에 담기는 진심이 적어지다가 급기야 사과할 마음이 생기지 않기도 하고 오히려 내 실수를 상대의 잘못으로 몰아가기도 합니다. 내가 실수로 쏟은 뜨거운 물에 아무 생각없이 그 앞을 지나던 아이가 화상을 입으면 ‘왜 하필 거기 있었어?’ 하는 소리가 먼저 튀어나오기도 하고 자동차로 누굴 심하게 치기라도 하면 피해자의 안위보다는 그로 인해 앞으로 겪을 자신의 녹록치 않을 미래를 그리며 ‘재수에 옴붙었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런 게 인지상정일까요?
그러다가 나로 인해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나서 목소리를 높이면 대개의 경우 사과할 마음이 들기보다는 맞받아쳐 주고 싶은 마음이 생기죠. ‘그리 할 만하니까 내가 그리 한 거야!’ ‘다 네가 자초한 일 아니야?’ 이러면서 말이죠.
그런 걸 보면 우린 작은 실수는 쉽게 사과하면서 큰 잘못을 사과하지 않는 습관을 가지게 된 것 같습니다. 그건 아마도 사과 받는 쪽과 사과하는 쪽을 각각 승자와 패자로 나누곤 하는 우리들의 성의 없는 사고방식, 사과하는 사람을 더욱 짓밟아 모멸감을 주는 성숙하지 못한 평균적 인성 같은 것들 때문이겠죠. 국정연설에서 대통령이 사과 한 마디 하면 그걸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야당을 본 적 있습니까? 왜 사과를 했을까 싶게 만드는 조롱과 빈정거림으로 일관하는 걸 매번 봐오지 않았어요? 그러니 사과하는 건 손해입니다.
그렇지만 그런 것을 모두 감내할 각오로 사고하는 사람들의 대인배스러움에는 역시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홀로코스트에 희생된 유태인 묘역에 참배하는 역대 독일총리들의 모습엔 존경심도 우러납니다. 그들은 절대 용서받을 수 없는 역사적 과오를 저지른 선대의 잘못에 대해 사과를 받는 사람들이 미안할 정도까지 매번 되풀이해 사과를 하고 있습니다. 진심을 느끼게 하는 것은 한번의 사과가 아니라 그 행위의 ‘반복’에 있는 것이죠. ‘내가 사과할게. 이제 됐지?’ 이렇게 윽박지르며 자기가 사과했다고 주장하는 인간들은 사과와 진심의 의미를 모르는 겁니다.
그런 측면에서 우린 어쩌면 전혀 사과하지 않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나는 절대 악의를 가지고 나쁜 짓을 한 적이 없다고 믿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시라도 내가 한 일, 내가 내린 결정으로 피해를 당해 상처입은 사람이 있다면 그건 내가 의도한 게 아니라고, 그래서 내 잘못이 아니라고,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거기 있었던 네가 나쁜 거라고 말하는 거죠. 그런 상황을 멋지게 표현하기 위해서 영미권 사람들은 콜래트럴 데미지(Collateral Damage)라는 말을 만들어 냈습니다. 대규모 군사작전이 벌어질 때 어쩔 수없이 뒤따르는 민간인 피해를 뜻하는 단어죠. 그런 세계관에서는 세상의 상처입은 사람들 대부분이 흐르는 유탄에 맞은 것입니다. 그래서 미국영화에선 이런 말도 많이 나옵니다.
“Nothing personal.”
내가 널 쏴죽이게 되어 유감이지만 딱히 감정이 있으서 그런 건 아니란 겁니다. 말이 되는 얘기인가요?
진심으로 사과하면 모든 상처가 치유될 거라 생각하는 사람들은 어쩌면 영화를 너무 많이 보았든가 이 세상이 아름답기만 한 이상적인 곳이란 환상을 가진 것이라 생각합니다. 아니면 결론을 정해 놓고 이야기를 전개시켜 가야 하는 자기계발강사이든가요.
진심은 잘 통하지 않습니다. 사과하려 할 때마다 사과를 받는 상대방이 더욱 도발해 오는 경우를 아마 누구나 한두 번쯤 겪어 보았을 겁니다. 네이버 화요 웹툰 중 ‘은주의 방’ 최근화에선 학창시절부터 반목했던 해경에게 화해를 청하며 사과하는 혜진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하지만 3화에 걸쳐 대화가 시도되지만 그 사과는 결국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웹툰이 그렇게 현실적인 상황을 그려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기에 감탄하면서도 그런 현실이 안타깝기도 했습니다. 그 사과가 진심이라면 독일총리들이 그런 것처럼 사과가 받아들여질 때까지, 그리고 사과받는 사람들이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 때까지 반복해야 할 것입니다. 그럴 각오가 없다면 어쩌면 처음부터 사과하는 방식을 취하지 않는 게 나을지도 모릅니다. 정말 사과하려 한다면 ‘미안해’라는 말을 하는 것 말고도 얼마든지 다른 방법이 있을 테니 말입니다.
요즘 스포츠계와 연예계에서 승승장구하던 학교폭력 전력자들에 대한 폭로가 벌어지는 것을 보면서 난 내 학창시절과 내 아이들의 학창시절을 자연스럽게 떠올립니다. 우리 시절의 학교 주먹들은 마치 자기들만의 세계가 있는 듯 다른 아이들을 잘 건드리지 않았던 것 같은데 요즘은 사람들을 괴롭히고 때리고 갈취하는 양아치 조폭들의 행태를 그대로 학교에 옮겨와 더욱 창의적인 방법으로 집요하게 그것도 특정 대상을 정해 죽고 싶은 정도로 괴롭히고 실제로 그걸 견디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학생들은 비단 보도되는 숫자 정도가 아닐 것이라 생각합니다.
십 년 이십 년이 지나 예전 학폭 피해자들이 목소리를 올리자 어떤 이는 사과하고 어떤 이는 법적으로 대응하겠다 하지만 남의 인생을 파괴한 사람은 자기 인생이 파괴되는 것을 당연히 감내해야 하는 게 공평합니다. 그러니 학창시절 학급 친구의 인생과 미래를 망가뜨린 학폭 가해자는 절대로 인생을 누리며 살도록 놓아 두어서는 안됩니다. 그 피해자가 정의를 깅제하거나 집행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사회가 나서 응징해야 합니다. 뒷북이란 소리를 듣더라도요. 그럼 지금 전국 학교에서 폭력을 자행하는 일진들도 그 처절한 응징을 보고 뭔가 생각하는 바가 있을 겁니다.
사과의 매커니즘은 사실 의외로 간단합니다.
내가 상대방을 한 방 때릴 때 나도 당연히 한 방 맞을 것이라 각오를 하는 겁니다.
사과가 힘든 이유는 내가 널 때렸지만 난 절대 맞을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인 거고요.
그러니 진심이 전달되지 않는 거고 사실 그런 상황에 사과에 진심이 담길 리도 없습니다.
2021. 5.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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