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으로 살아 가기
누군가와 상처를 나누는 게 위로가 된다는 논리 본문
약점을 들켜서는 안된다
타인과 나눌 수 있는 상처가 있다면 누구와 나눠야 하는가?
타인과 상처를 나눈다는 말을 풀어 쓰다면 이런 뜻일 듯싶습니다. 살아오며 온몸 이곳저곳에 얻게 된 수많은 상처 중엔 결코 나눌 수 없는 것이 필시 있을 것이고 어떤 상처도 내 약점이 될 만한 것이라면 절대 공유해선 안될 대상도 분명 있을 터입니다.
J사장에게 끊임없이 사기꾼들이 꼬여드는 이유는 만나는 사람들마다 자기가 예전에 사기꾼들에게 이렇게 뜯기고 저렇게 갈취당했다면서 거액의 액면가까지 들먹이며 말하지 않아도 될 온갖 얘기를 쏟아놓기 때문입니다. 물론물론 그런 얘기를 하는 목적은 하소연도 하고 싶고 상대로부터 이해와 동정을 얻어 가능하다면 그간의 고생을 보상받을 만한 쏠쏠한 도움도 얻겠다는 것이지만 상대방은 오히려 그가 해먹기 쉬운 사람이란 강한 확신을 갖게 됩니다. 그런 이야기를 털어놓아서는 안될 사람에게 털어놓을 때마다 매번 사달이 났던 것이죠. 자기는 그러면서 다른 이들에겐 보안이 중요하다며 입단속 시키는데 아마도 자기 입이 가장 싸다는 걸 인식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1995년 1월에 인도네시아에 처음 부임한 후 불과 6개월도 되지 않아 본사에 공개되지 않은 비자금 문제로 법인장과 충돌하면서 현지생활이 지옥으로 변해갈 즈음 ROTC 16기였던 시내 지사장은 가끔 나를 불러내 저녁을 사며 애로사항을 들어주곤 했습니다.
법인장은 전임자가 본사 귀임을 앞둔 시절부터 내가 부임하고 4-5개월이 지나던 때까지 대략 1년기간 동안 28만불 정도 회사돈을 당겨쓴 후 그걸 채워 넣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걸 그는 '비자금'이라 칭했지만 그 본질은 횡령이자 유용이었죠. 그 돈을 모두 어디에 썼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내가 인도네시아에 부임한 후 곧 다가온 이둘피트리 휴무에 한국직원과 가족들 10여명이 롬복에 회사가 비용을 지원한 2박 3일 여행을 다녀왔는데 법인장은 그것도 비자금에 쓴 것이니 그 여행을 함께 다녀온 나 역시 공범이라고 목에 핏대를 세웠습니다.
이미 현지법인 8년차였던 법인장을 귀임시키고 차기 법인장이 올때까지 임시로 법인을 인수하러 온 내가 그 '비자금'을 인정할 수 없으니 본사에 오픈한 후 인수인계를 진행하자고 말하자 법인장은 분명한 적개심을 보이며 공격해 오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후임 공장장을 곧바로 발령하면 될 일을 왜 훨씬 아래 직급인 나를 먼저 보내 우선 인수인계를 받고 공장을 장악하라 했는지 지금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법인장은 왜 내가 그 28만불을 떠 안을 거라 생각했을까요? 난 본사 와 현지법인, 양쪽이 암묵적으로 동의한, 지사의 비리를 뒤집어 씌울 일종의 총알받이였을까요?
누구에게도 꺼내기 어려웠던 그런 얘기를 시내 지사장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들어주었습니다. 당시 어떻게 난관을 해쳐 나가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던 상황에서 속마음을 털어놓을 곳이 있다는 것, 그것도 법인장과 같은 직급의 회사 관계자가 내 편에 서 있다는 게 여간 위로가 되지 않았습니다. 더욱이 그는 내가 지금도 여전히 내 인생의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했다고 생각하는 ROTC의 구성원이었고 후배를 보호할 책임이 있는 선배였으니까요.
그가 사실 법인장과 한 통속이란 걸 알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어느날 아침 공장에 출근해 보니 일찌감치 미리 와서 회의실에서 기다리던 법인장 창고장 사이에 그 시내 지사장이 함께 앉아 있었고 안면을 바꾼 그는 메모장을 꺼내 놓고 ‘너 언제 몇 월 며칠 몇 시에 어느 식당에서 이런 말 한 적 있지?’ 이러며 날 다그쳐 물어왔습니다. 그는 간첩이었어요.
법인장이 퇴근길에 내 뒤에 미행을 붙인 것, 내가 사는 주택가의 지인 부인을 통해 내 아내에게 위협을 가한 것, 내 운전수를 사주해 자동차 바퀴에 칼자국을 내 그가 출근하지 않은 다음 날 아침 출근길에 내가 직접 운전하다가 톨에서 처박히길 기도한 것을 나중에 다 알게 되었을 때에도 담담할 수 있었지만 믿어 의심치 않았던 그 16기 학군 선배가 내 등에 비수를 꽂으리라고는 미처 상상치도 못했으므로 큰 충격이 되었습니다.
그날 시내로 돌아가려 차를 타는 그를 따라잡아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 있냐고 묻자 그의 대답은 이랬습니다.
“착각하지 마, 이 새끼야. 난 너 같은 후배 둔 적이 없어! 네가 내 동기 등에 칼을 꼽아? 에라, 이 새끼야!”
사람마다 우선순위가 다르듯 그의 우선순위는 ROTC 후배를 보호하는 게 아니라 입사동기인 법인장 편을 드는 것에 있었습니다. 해외에서 나 자신 말고는 그 누구도 믿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새삼 통감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런 인간은 시간이 흘러도 용서가 안됩니다.
그는 본사로 돌아간 후 나중에 1998~1999년의IMF 시대라 통칭되는 동남아 외환위기도 잘 버틴 후 신장성 우룸치 지사장까지 역임했습니다. 하지만 끝내 이사를 달지는 못했습니다. 그에게도 자카르타에서의 사건이 꼬리표로 달려 있었던 걸까요?
나는 세바시가 왜 남들과 자신의 상처를 나누는 것이 인생에 도움이 되고 위로가 된다는 뉘앙스를 전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어떤 부류의 사람들에게는 어떠한 상처도 절대 나누어선 안됩니다.
2021. 5.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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