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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당초 내 인생에 뭔가 쉽고 만만한 게 있을 리 없었다.

한국인으로 살아가기

세바시 인생질문 에세이

우리 할아버지가 왜 그러셨을까?

beautician 2021. 6. 1. 12:15

골든하트

 

 

<사랑의 기술> by 에리히 프롬  

 

잘 생각해 보면 한 순간 내 인생 속으로 불쑥 다가와 평생 잊지 못할 긍정적인 흔적을 깊이 남긴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중 한 사람은 같은 교회에 다녔던 청년부 누나였는데 당시 내가 대학교 신입생 시절 직장에 다니고 있었으니 여섯 살쯤 많았던 것 같습니다. 활발한 성격에 피아노도 잘 쳐서 예배 반주를 하곤 했는데 알게 된 지 얼마되지 않아 스터디그룹을 하겠냐는 제의를 해왔습니다. 왜 나한테? 영어 원서를 읽고 번역해 의견을 나누는 것이었는데 <사랑의 기술>로 알려진 에리히 프롬의 <Art of Loving>라는 책이었어요. 당시 실력이 안되니 그 두껍지 않은 책을 떼는 데에 매주 토요일 만나는데도 몇 달이 걸렸습니다. 다른 사람이 더 참여하지 않아 나와 그 누나 단 둘이서 줄곧 만났으니 점차 자연스럽게 더 큰 호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 책을 떼던 날 선물을 받았는데 그게 내가 처음 갖게 된 영어성경이었고 훗날 자카르타 이사짐에 넣어 지금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누나가 왜 그 많은 시간을 나에게 할애했는지는 아직도 알 수 없습니다. 난 그 시기를 지내면서 영어번역에 눈을 뜨게 되었고 이후 군대를 전역하고 직장생활을 하다가 인도네시아에 오게 되기까지 요단출판사에서 펴낸 교회음악 관련 원서들을 여럿 번역했습니다. 그 누나는 내게 아무것도 원하지 않고 철저히 주기만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동명여고에서 교사로 오래 일한 동갑내기, 자발적인지는 알 길 없는 비혼 친구가 있습니다. 그를 황언니라고 부르게 된 건 의류팀 시절 바잉오피스에서 일하던 그를 처음 만났고 서로 특별한 직급이 없어 그렇게 부르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함께 홍콩 출장도 여러 번 갔습니다. 어느 날 기다리던 교사임용이 내려와 교직으로 가기 전까지 황언니는 나뿐 아니라 일로 만난 모든 이들에게 더할 수 없는 진심과 미소로 대했습니다. 그전에도 그 이후에도 황언니 같은 사람을 만나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가 특별한 사람이란 걸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절절히 느끼게 됩니다.

 

1988년에 처음 만났으니 이제 35년쯤 된 셈이고 아마 동명여고 생활도 얼마 남지 않은 걸로 압니다. 이미 퇴직했는지도요. 일년에 한 두 차례 오가는 카톡에는 여전히 정겨운 마음이 담뿍 담겨 있습니다. 스스로 어설픈 기독교인인 나랑 비슷한 인간들을 싫어하는 편이지만 황언니의 독실함은 몸소 경험한 바 있어 카톡에 묻어나는 평생 신실함의 흔적을 결코 폄하할 수 없습니다. 몇 달에 한번, 몇 년 만에 한번 톡을 보내도 반드시 따뜻하게 답해 주는 친구를 둔 건 마치 농 속에 꿀단지를 숨겨둔 것 같은 든든한 기분입니다.

 

메이의 첫인상은 그리 좋지 않았어요. 그 친구가 내 직원이 된 것도 정식으로 채용한 게 아니라 처음엔 최사장이란 망간업자에게 소개해 주었던 것인데 원래 다니던 다른 직장을 그만 두고 온 사람을 중간에 무책임하게 뱉어 버리는 바람에 내가 책임을 진다는 차원에서 울며겨자먹기로 인계받은 케이스였습니다. 하지만 소매 부문에서 메이는 발군의 실력을 보였습니다. 우린 미용가위나 드라이어 같은 것들을 팔았지만 저 친구한테는 자동차나 아파트를 팔라고 해도 잘 팔 거란 생각을 했습니다. 실제로 2015년 온라인 친구 명랑쾌활이 있던 플라스틱 포장재업체로 자리를 옮긴 메이는 이제 그 회사의 매출을 주도하는 위치에 올랐습니다. 최근 코로나 팬데믹으로 월급이 반으로 줄어든 게 문제이긴 하지만……

 

그러다가 당연히 메이의 아이들과 가까워지게 되었습니다.

우리 아이들에겐 좀 미안한 일이기도 합니다. 내가 한화그룹을 나와 동업을 시작하던 어수선한 상황에서 5년쯤 떨어져 지내 초등학교 전반기를 가까이서 돌봐 주지 못했고 자카르타에 와서는 파산의 나락으로 함께 끌고 들어가 위태로운 경제적 벼랑 끝에서 아이들 나름대로 스트레스와 열등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이젠 그 아이들이 싱가폴에서 당당한 생활인이 되어 살아가고 있지만 난 그때 아이들에게 해주지 못한 것을 어쩌면 차차와 마르셀에게 해주면서 마음의 보상을 얻으려 하는 건 아닌지 가끔 스스로를 의심하기도 합니다.

 

 

토요타 하이룩스 더블캐빈 반트럭  

 

마르셀은 둘째로 태어나면서 메이에게 ‘바보 같은 미혼모’라는 타이틀을 안겼습니다. 마르셀은 태어날 때부터 이상한 일이 많았습니다. 임신사실을 몰랐던 메이는 임신 초기에 감기약을 남용하다가 외근 중 여러 번 실신하는 사고가 벌어져 병원 두 군데에서 검사를 받고서야 임신이란 걸 알았습니다. 정상적인 의사라면 아마도 문진이나 촉진을 통해 심증이 있었겠지만 거의 모든 검사를 요구하며 환자의 주머니를 털은 후였습니다. 초음파 사진은 태아에게서 뭔가 이상한 조짐을 보였습니다. 혹시 기형은 아닐까 싶었어요. 그렇게 태어난 마르셀은 쌍둥이였는데 형은 사람의 모습을 갖추지 못한 핏덩어리에 눈동자만 형성되어 있었고 그 대신 마르셀은 육체적 정신적으로 아무런 하자가 없는 완벽한 사내아이였습니다. 형이 엄마의 실수를 모두 안고 간 것입니다. 그렇게 마르셀은 두 사람의 운명을 타고 났습니다. 난 이 기이한 아이에게 자연스럽게 큰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차차의 매력에 폭 빠지기 전, 내 첫사랑은 마르셀이었어요.

 

2013년은 마르셀이 만 세 살 되던 해였는데 어느날 메이에게 이런 말을 하더랍니다.

 

“엄마, 빠빠 배한테는 아무 문제도 없대. 할아버지가 그러는데 걱정하지 않아도 된데.”

 

빠빠 배(Papa Bae)는 납니다. 메이는 당연히 그게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날 난 이미 일주일째 술라웨시 출장 중이었고 당시 소말리아 반군들이 많이 타고 다니던 토요타 하이룩스 더블캐빈 반트럭을 타고 릴리네 광산을 오르내리고 있었죠. 그러다가 오른쪽은 깎아지른 벼랑인 산길인 바짝 마른 비포장 도로에 아마 다른 트럭이 얇게 흘리고 간 굵은 모래 위에서 바퀴가 미끄러지면서 차가 두 바퀴 회전하는 사고가 벌어졌습니다. 벼랑 밑으로 떨어지면 뼈도 못추릴 판이었는데 다행히 트럭은 그 좁은 도로 한복판에 안전하게 멈춰 섰습니다. 사고 당시엔 아무 생각이 없었는데 트럭이 멈추고 나니 모골이 송연해지더군요.

 

그런 후 끈다리 시내로 내려와 메이에게 그런 얘기를 전화로 듣고서 마르셀에게 신기(神氣)가 있는 건 아닐까 싶었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일은 얘가 가르쳐주지도 않은 한국말을 한 마디씩 한다는 거였어요. 너무나 이상했습니다.

 

“너 그거 누구한테 배웠어?”

“꿈속에 매일 오는 할아버지가 가르쳐 준 말이야.”

 

아니, 얘네 할아버지가 왜 한국말을 해?

그게 2013년 일이지만 2021년, 그러니까 바로 몇 달 전에 내가 나중에 제사를 드리게 되면 쓰려고 액자에 보관 중인 내 할아버지 사진을 보더니 마르셀이 하는 말에 감짝 놀랐어요.

 

“내 꿈에 나타나던 할아버지네.”

 

히로시마에서 원폭에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징용 끌려가기 전에 찍은, 그러니까 30대 초반쯤의 사진이었습니다. 전혀 할아버지 모습이 아니었는데 마르셀이 알아본 겁니다. 나중엔 난 사진 속 할아버지를 유심히 살펴보았습니다. 할아버지는 살짝 웃고 있는 듯했어요.

 

“할아버지, 왜 걔한테 가서 그러셨어요?”

 

이쯤 되면 신의 뜻 아닐까요?

 

물론 마르셀은 이젠 아기 때 하던 한국말도 다 잊었고 요즘은 할아버지랑 꿈 속에서 잘 만나지 않는 모양입니다. 그런 마르셀은 이슬람 경전의 기도문도 잘 외우고 고양이들과 잘 교감하고 언니인 차차와 티격태격하며 지내는 정상적인 아이로 커가고 있습니다. 차차와 마르셀은 숄랏 기도를 할 때마다 나를 위해서도 기도한다고 합니다. 목사님인 아버지도 기도하시고 장모님도 조계종 산사에 내 이름 적힌 연등을 매년 내건다고 하니 천하무적이 된 느낌입니다.

 

잘 생각해 보면 내가 살아가는 삶의 동력은 비단 가족들뿐 아니라 승조누나, 황언니, 차차와 마르셀처럼 골든하트를 가진 사람들이 주변에 있기 때문입니다. 돌아가신 후에도 유머와 배려를 잃지 않은 할아버지를 포함해서요.

 

 

할아버지, 도대체 무슨 생각이세요?  

 

 

2021. 5.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