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서와 소설 사이, 그 어디쯤

애당초 내 인생에 뭔가 쉽고 만만한 게 있을 리 없었다.

한국인으로 살아가기

세바시 인생질문 에세이

아이들의 미래는 소박하면서도 원대한 계획

beautician 2021. 5. 25. 12:25

출발점

 

전날 밤 늦게까지 이어진 미팅으로 몸이 물먹은 솜처럼 무거운 금요일 아침이지만 기어이 차를 몰고 나가야 했던 건 20킬로미터쯤 떨어진 남부 자카르타 까르티니(Jl. R.A. Karniti) 도로변 한국인들 많이 사는 베벌리 타워 아파트에서 약속이 있기 때문입니다.

 

전날 아이들에게 딱 맞을 듯한 영어 소설책 20권이 중고나라에 올라와 급히 찜했는데 그걸 가지러 간 겁니다. 직접 픽업해 가라는 조건을 달아 먼 길을 온 사람에게 원 주인이 얼굴도 보이지 않고 가사도우미 시켜 책을 내려 보낸 걸 실망스러워 했던 건 요즘같이 각박한 시대에 내가 너무 많은 걸 기대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통성명이라도 하며 인사라도 할 거라 생각했거든요. 물론 그렇게 처신한 상대방의 입장도 이해되지 않는 바 아닙니다. 요즘의 험한 세상은 예전처럼 정감 넘치지 않습니다. 하지만 톡으로 오가는 대화 속 거래상대방은 예의 바르고 싹싹했습니다.

 

싱가포르에 사는 아이들은 아직 임대계약기간이 남았는데도 집 주인으로부터 퇴거요청을 받아 어제부터 급히 다른 집을 알아보는 중입니다. 집 주인이 집 용도에 대한 계획이 바뀐 모양이죠. 현재 사는 집 구조가 아들이 딸 부부랑 같이 살기 딱 좋은데 그런 분위기의 집을 가격에 맞춰 한 달 안에 구해야 하니 마음이 급한 모양입니다. 그렇게 세상의 세파에 부딪히며 스스로 살 길을 찾아가는 아이들은 생활인이 된 지 오래입니다. 저 아이들이 어릴 때 좀 더 좋은 출발점을 만들어 주지 못한 게 아쉽지만 이젠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응원과 기도밖에 할 일이 없는 거죠.

 

 

남부 자카르타에서 돌아와 정오쯤 들른 차차와 마르셀은 막 학교 온라인 수업을 마친 상태였습니다. 책들을 안겨주니 반색을 합니다. 베벌리 아파트에서 사온 책들 중 15권 정도는 로알드 달(Roald Dahl)이란 작가의 책들인데 죠니 뎁 주연으로 영화화되었던 <찰리의 초콜렛 공장>도 이 사람 작품으로 그 중에 끼어 있었습니다. 학교에서 참고교재로 사용되는 모양인데 도서관에서 대출받기 그렇게 힘들었다고 합니다. 차차가 로알드 달 전집 중 달랑 한 권은 가지고 있었지만 전집이 생겨 정말 좋아하더군요. 5월 중에 다 읽으라고 했지만 단어 찾으며 읽으려면 1년은 걸리지 않을까요? 마르셀은 2년?

 

이 아이들도 독립해야 할 날이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습니다. 특히 건축가가 되고 싶어하는 차차는 올해 7월이면 고등학생이 됩니다. 마르셀은 6학년이 되고요. 저 아이들이 사회생활을 시작해야 할 때 남들에게 심하게 꿀리지 않는 상태로 출발선에 설 수 있게 되기를 바라지만 그걸 위해 내가 얼마나 서포트해 줄 수 있을까요?

 

이제 다 큰 싱가포르의 아이들처럼 차차, 마르셀도 언젠가 성인이 되어 스스로 상황을 판단하고 나에 대한 평가도 하게 될 텐데 최소한 내가 아이들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하지 않았다는 인상을 남기고 싶진 않습니다. 그건 학비를 대주는 것 이상의 뭔가가 더 필요한 일임에 틀림없습니다.

 

아이들의 미래를 생각하는 건 소박하면서도 원대한 계획입니다.

치매가 오기 전까지 평생동안 고아원 여자아이가 세상에 나갈 때까지 한 명씩 살뜰하게 보살피고 지원한 내 어머니가 얼마나 뜻 깊은 삶은 살았는지 차차와 마르셀의 함박웃음을 보면서 새삼 느낍니다.

 

 

2021. 4.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