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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바시 인생질문 에세이

과거를 들여다보는 창

beautician 2021. 5. 19. 11:30

메모하는 습관

 

 

사회생활 초창기에 정말 열심히 다이어리를 적었습니다.

회사에서 받게 되는 지시나 진행되는 상황에는 늘 회사의 이익이 걸려 있곤 했으므로 대학이나 군에서 했던 것처럼 내 알량한 기억력에만 기대서는 사고 나기 십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뭔가 문제가 생기면 늘 책임소재를 따지는 일이 뒤따랐습니다. 메모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으면 모든 잘못된 일들은 아랫사람들 책임이 되어 버리기 일쑤였습니다. 정작 잘못된 지시를 내려 일을 망친 상관들이 시치미를 뗀 채 아랫사람들을 처벌하며 ‘내가 이렇게 엄격한 놈이랍니다’하며 자기 상관들에게 생색을 냈고요. 그렇게 돌아가는 세상 속에서 다이어리의 메모는 스스로를 보호할 최후의 보루이곤 했습니다. 물론 압도적인 권력구조 안에서 아랫사람의 노트가 그리 큰 힘을 쓰지 못한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나중에 그런 비밀스러운 서류나 플래시디스크 같은 것을 놓고 벌어지는 서스펜스 스릴러 영화들을 볼 때마다 남의 일 같지 않았습니다.

 

다이어리 적는 버릇을 멈추는 것이 15년 넘게 걸렸습니다.

한화를 그만 둔 것이 1996년. 그 후 대부분 인도네시아에서 내 사업을 해왔는데 넥타이 매는 버릇, 보고서를 쓰는 버릇, 모든 것들 것 메모로 남기는 버릇을 몇 년을 주기로 순차적으로 그만 둘 수 있었습니다. 마치 군생활을 고작 2년 3개월 하고서 중위 계급장과 함께 힘 들어간 어깨에 잔뜩 올라간 벽돌들을 하나씩 내려놓는 데에 몇 년이 결렸고 언제든 끊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며 시작한 담배를 끊는 게 30년 가까이 걸렸던 것처럼 ‘데일리 저널’이라 이름 붙인 파일을 마지막으로 업데이트한 것이 2011년의 어느 날이었습니다. 그걸 멈추는 게 그렇게 오래 걸렸습니다. 사람들의 인생 상당부분이 관성에 의해 움직인다는 것을 그렇게 매번 실감했습니다.

 

2015년 딴지일보 해킹 사건

 

하지만 사람은 좀처럼 변하지 않습니다.

어떤 일을 당하거나 기이한 상황에 처했을 때 느낀 감상을 메모해 두는 것은 습관이 되었습니다. 단지 그것을 더 이상 다이어리에 적지 않을 뿐입니다. 그런 파일들이 인터넷과 내 컴퓨터 곳곳에 남겨졌는데 2010년쯤에 블로그를 개설하면서 대부분 그쪽으로 옮겨 놓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그렇게 창고를 옮기다 보면 유실되는 자료들이 적지 않습니다. 최소한 인터넷에 올려놓은 것들은 나중에 다시 검색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2004~2005년경에 글을 많이 올려 두었던 조선일보 ‘인도네시아통’이란 게시판은 아예 없어져버렸고 오랜 기간 동안 딴지일보의 기사면과 독자게시판에 올려 두었던 글들은 2015년 딴지일보가 모종의 지독한 방식으로 해킹당하면서 상당수 날아가버리고 말았습니다. 지금 내 블로그에 올려놓은 글들도 어쩌면 어떤 사고로 모두 복구 불가능한 상황이 되어버리고 말지 모릅니다. 그럼 결국 내 랩톱 어딘가에 남아 있을 흔적들 만이 그 파일들의 단서가 되겠죠.

 

어쨌든 메모를 남기는 습관으로 인해 1999년 다시 글을 쓰기 시작한 이후에 겪었던 일들에 대해서는 비교적 소상한 자료들이 남게 되었습니다. 만약 1999년에 일어난 일을 머리 속으로만 기억하고 있다가 2021년에 쓰려고 하면 인간 기억력에 한계가 있는 만큼 스토리 완성을 위해 여기저기 창작이 가미되면서 왜곡되고 잘한 건 내 탓, 잘못된 건 다른 놈들 탓인 전형적인 자서선 형태가 되기 쉽습니다. 하지만 상황이 발생했던 당시의 메모들과, 그 이후 그 사건들을 곱씹으며 후회하고 한탄하고 이를 갈면서 쓴 글들을 읽으면 ‘그 당시 내가 이런 생각을 했구나’라는 새삼스러운 감정이 들면서 당시 일들을 비교적 선명히 기억해 낼 수 있었습니다. 그건 분명 즉각적으로 메모하는 습관이 가진 가장 긍정적인 순기능입니다.

 

물론 어떤 이들은 블로그의 글을 모아 책을 내기도 하지만 요즘 분류작업 제대로 안된 택배 물류창고처럼 엉망진창이 되어 있는 내 블로그에선 쉽지 않은 일입니다. 전 포스코 자원부문 노경래 법인장이 인도네시아 곳곳을 다니며 넓힌 견문과 현지 문화에 대한 공부를 담은 블로그 글들을 모아 2017년 <한국인이 꼭 알아야 할 인도네시아>라는 책을 펴낸 것처럼 실제 그런 식으로 책을 출간하는 이들이 적지 않은 모양입니다.

 

내가 이 인생질문의 답변으로 에세이를 쓰는 동안 포함된 술라웨시 니켈광산 포지션과 관련된 내용은 그 시기에 있었던 일들을 나중에 기억해 내는 데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내 블로그 안의 글들을 돌아보면 그런, 오래 전 잊었던 감상을 다시 떠올리게 하는 포스팅들이 많이 있습니다. 파산 당시 허물어지던 자존심, 나락의 밑바닥에서 겪었던 모멸스러운 순간들, 오랜 기간 꼬리표처럼 따라다녔던 열등감, 아이들을 대학에 보내지 못하진 않을까 노심초사했던 마음, 나를 크게 도와주었다가 크게 말아먹기도 한 릴리나 메이에 대한 복잡한 감정, 재외동포문학상 수상을 알리는 이메일을 받던 날 말로 표현하기 복잡했던 심경, 문협에서 쫓겨나던 날 그 웃기고도 열받던 상황, 글 쓰는 일에 대한 마음가짐, 한인사.

 

세바시의 강사가 주장하는 바와 달리 메모는 천재들의 전유물도 아니고, 천재들만 노트를 남긴 것도 아닙니다.

 

메모란, 오늘의 내가 그 노트를 남기던 10년 전, 20년 전의 나와 동시에 공존하게 만드는 타임머신 같은 것입니다.

 

메모는 타임머신

 

 

 

2021. 4.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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