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으로 살아 가기
선택할 때 미래에 닥칠 그 결과를 미리 알 수 있다면 본문
김부장의 우클렐레
2013년쯤에 한국에 간 적 있습니다.
한국과 하는 일들이 워낙 없어 부모님 뵙는 것 말고는 딱히 오갈 일이 없었는데 그간 협조가 잘 되던 한국 미용가위 공급선에 젊은 친구가 동남아 담당을 맡으면서 상황이 좀 복잡해지는 중이었습니다. 영어를 전혀 못하는 그가 매년 라스베가스, 볼로냐와 홍콩을 비롯해 전세계 4군데 도시에서 순차적으로 개최하는 가장 큰 미용박람회 코스모프로프(Cosmoprof)에 늘 끼어서 나가고 그가 전역한 지 1년 되었을 때 갔던 출장에서 자기 차라며 외제 승용차를 자랑하길래 아마도 저 회사에 따로 투자자 또는 동업자가 있는 모양이었고 그 투자자가 전공이나 이력이 전혀 관계없는 투자자기 자기 아들을 끼워 넣은 거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국가별 판매처를 한 군데만 두기로 했던 당초의 약정을 깨고 자카르타의 파키스탄 출신 미용기기 수입상에게 내게 파는 것과 똑 같은 제품을 팔기 시작했지만 시치미를 떼고 있었습니다. 그게 그해 한국출장을 간 이유였죠.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시치미를 뗐고 결국 내가 그간 힘겹게 만들어 놓은 시장에 땅 짚고 헤엄치기로 들어와 같은 제품, 같은 브랜드를 나보다 반값 정도에 들이미는 파키스탄 경쟁사를 이길 방법이 없었습니다. 결국 그해 말 한국 공급선과 거래가 깨지고 이듬해 난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 베트남으로 날아가게 되죠. 미용기기를 고집하지 않았다면 인도네시아가 더욱 매력적인 시장이었을 텐데 말입니다.
아무튼 그런 배경을 가지고 갔던 서울 출장에서 오래된 친구들을 찾아보았습니다. 그 중엔 한화시절 동업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들과는 1998~1999년 외환위기 당시 선을 넘은 부분들이 있어 얼굴 붉힌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내가 일본수출담당을 할 당시 유럽수출담당을 하던 친구 A가 서울 사무실을 이끌었는데 외환위기 특수가 끝난 후 많은 시간이 지난 후 그의 주변엔 의류팀 동료들이 하나도 남지 않았습니다. 내가 자카르타에서 고군분투하던 시절, 서로 도와도 동업관계가 유지될 동 말 동 한데 결정적인 시절 메인 파트너였던 나를 떨궈내려 등에 비수를 꼽았던 그는 다른 동업자들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지 못했습니다. 당시 한화그룹을 나왔을 당시 사무실을 함께 쓰자고 내어주었던 거래선의 김부장이란 분이 동업자 중 한 명으로 들어왔는데 내가 출장할 당시 대형학원 부속 서점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젠 그도 동업을 중단한 상태였지만 A와 가끔 술잔을 나누는 유일한 상대였습니다.
“그 친구 아직 옛날 그 거래선이랑 거래하지. 워낙 오래된 파트너이니 이익이 거의 나지 않아도 먹고 살 정도 오더는 정기적으로 주는 모양이야.”
A는 1988년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했던 의류수출을, 당시 노르웨이 거래선을 연결해 준 홍콩의 바잉오피스를 통해 2013년에도 근근이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김부장은 밤늦게 서점을 마치고 가진 짧은 선술집 술자리에서 근황을 얘기하다가 A에게 전화를 걸어 내가 인도네시아 귀국하기 전에 한번 같이 식사하자고 약속을 잡았습니다. 그동안 완전히 끊고 지낸 건 아니었지만 그날 오랜 만에 통화한 A는 전화기 저쪽 편에서 쭈뼛거리고 있었습니다.
약속한 날이 되어 먼저 김부장을 보러 갔더니 그는 학원에 새 학기가 시작되어서 도저히 서점을 비울 수 없다고 양해를 구했습니다. 학원에 딸린 서점은 일반서점과 달리 오직 학원 교재들만 취급했는데 그 업무량이나 매출이 장난이 아니었어요. 나랑 A의 약속을 위해 생계를 두고 나오라 할 수 없었습니다. 김부장이 안되면 나 혼자 A를 만나면 될 일이었습니다. 이제 오후가 깊어지는 시간이었고 A는 의정부에 살았으므로 내가 그쪽에 갈 요량으로 전철역에 들어서며 당시 아직 남아 있던 공중전화박스에서 A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나 혼자 간다고 하자 그의 반응이 이랬습니다.
“왜요?”
“김부장님이 시간이 안되니 우리 둘만 보자고요. 나도 이틀 후엔 인도네시아 돌아가야 하니 따로 시간잡긴 어려워요.”
“그래도 다음에 보는 걸로 하죠?”
“뭐, 식사하기 곤란하면 간단히 차라도 할까요? 내가 그쪽으로 갈 테니.”
“아니, 그게 아니라….”
그는 이런 대화가 귀찮은 듯했습니다.
“원래 김부장이랑 같이 만나기로 한 약속이에요. 그 분 안나오면 나도 안나갑니다. 그 뿐이에요.”
전화를 끊고도 기가 차서 한동안 전화부츠를 떠나지 못했습니다. 그는 그토록이나 내가 껄끄러웠던 거였고 그건 십중팔구 1999년, 15년도 더 넘은 그 시절 그가 나한테 한 짓이 아직도 마음에 걸렸기 때문일 터였습니다. 나중에 그 이야기를 전해 들은 김부장도 혀를 끌끌 찼습니다.
김부장은 작은 체구였지만 몸이 탄탄해 운동을 좋아하고 사교성과 친화력이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쉽게 스스로의 이익을 조금 희생해 다른 이들의 편의를 봐주곤 한 것은 기본적인 인성이나 넉넉한 경제적 배경 탓도 있었겠지만 아마 그가 독실한 천주교인이었던 부분도 컷을 것 같습니다. 그는 언젠가부터 우클렐레에 심취해 얼마 후엔 우클렐레 선교단이 되어 국내외를 돌아다니며 페이스북에 사진들을 올렸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난 건 2017년 4월의 일입니다. 바로 한달 전까지만 해도 성당 친구들과 여행하던 사진을 페이스북에 올렸으므로 실로 갑작스러운 죽음이었습니다.
오늘 아침 우연히 그의 페이스북에 다시 들어가 보았습니다. 그가 세상을 뜬 후에도 2018년, 2019년, 2020년에도 그의 페이스북엔 날자 맞춰 생일안부를 묻는 포스팅이 가득했습니다. 김부장은 그렇게 많은 사람들 가슴 속에 아직 살아있는 것이죠.
그리고 A는 김부장의 죽음과 함께 내게도 죽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김부장이 없으니 그도 다시는 날 만나러 나올 일이 없습니다.
내가 한 가장 잘못된 선택은 1996년 어느 날, 그 친구와 동업을 하겠다고 인도네시아에 돌아와, 내게 손을 내민 다른 기업들, 다른 기회들을 모두 거절했던 것입니다. 당시엔 최선이라 생각했고 그게 의리를 지키는 바른 행동이라 생각했지만 이제 와 생각하면 한낱 치기, 미친 짓이었습니다. 그 결정 이후 진행된 일과 관계가 지금까지 남아 있는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후회하지 않으려면 가장 중요한 요소가 ‘실리’라는 걸 모르던 시절이었습니다.
그 후 가장 잘한 선택은 2016년 어느 날부터 서서히 전업작가의 길로 들어서는 자신을 용인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옛날엔 절대 이 일로 밥 먹고 살 수 없다고 생각해 외면했던 길입니다. 그러니 밥 먹고 살 정도만 된다면 기대 이상의 성공인 셈이죠.
하지만 그 결정들을 내리던 순간엔 그 결과 내 인생에 어떤 파국이 올 지 도대체 무슨 수로 알 수 있겠어요?
2021. 4.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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