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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당초 내 인생에 뭔가 쉽고 만만한 게 있을 리 없었다.

한국인으로 살아가기

세바시 인생질문 에세이

타인을 내 세계에 들였을 때 벌어지는 일

beautician 2021. 5. 11. 12:04

건강한 인간관계를 위해 꼭 필요한 것

 

 

프로베이션 기간의 목적은 저 가면 속 얼굴을 알아보기 위한 것.  

 

신입이든 경력이든 회사에 새로운 사람이 들어오면 이른바 ‘프로베이션’이란 이름으로 1~3개월 정도의 잠정평가기간을 갖습니다. 딱히 뭔가 벌어진 문제나 상황을 수습하는 것도 아닌데 이 시기를 ‘수습기간’이라 부르는 건 아마 쓰는 한자가 다르기 때문일까요? 아무튼 수습할 일이 별로 없어 보이는 이 기간은 서로가 어떤 사람, 어떤 기업인지 스팩과 실제를 비교, 평가하는 기간인 셈입니다.

 

처음 만난 사람들 사이에도 특별히 공식적으로 그런 원칙을 세워놓진 않아도 비슷한 기제가 작동합니다. 일정 기간 서로 간을 보는 거죠. 그런 다음 등급을 매깁니다. 이 사람은 50미터짜리, 저 사람은 5미터짜리……, 이런 식으로요. 그렇게 적정 안전거리를 정하는 겁니다.

 

대개는 그다지 영향을 주지도, 받지도 않을 정도의 거리에서 관계를 시작합니다. 굳이 그 카테고리의 이름을 붙이자면 ‘안면 있는 타인’이라 할까요? 필요에 따라 연락을 주고받고 때로는 의례적인 식사약속에 다른 사람들과 함께 만나는 정도. 거기서 어느 정도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되면 보다 구체적인 거리 조정을 하게 됩니다. 진상들은 바깥쪽으로, 진국들은 안쪽으로.

 

예전에 사람들은 모두 선의를 가졌고 한국인들이 해외에서 당연히 서로 돕고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던 시절엔 이런 거리조절을 잘 하지 못했습니다. 처음 만난 사람들을 무조건 내 세계 안으로 데리고 들어와 여러 편의를 봐주고 일도 도와주고 지인들을 모두 소개해 주었습니다. 때로는 나와 관련없는 분야까지 조사해 일과 사람들을 연결해주기도 했습니다.

 

늘 그런 건 아니지만 그런 버릇이 때로는 아주 좋지 않은 파국을 불러오곤 했습니다.

막돼먹은 상사가 부하들 함부로 굴리다가 어느 날 한번 따뜻하게 대해주면 저 사람 원래 따뜻한 사람이었다며 직원들 칭송이 드높아지지만 늘 잘해주던 상사가 한번 냉랭하게 굴면 천하의 배신자, 위선자 취급을 하는 것처럼 내가 성심을 다했던 새로운 지인이 어떤 사소한 일로 한번 마음이 상하면 이미 들어와 버린 내 세계에서 분탕질을 치며 내가 소개해 준 지인들과 거래선들 사이에서 이간질하며 그들을 내게서 돌려 세우려 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습니다. 그런 사람이란 걸 미리 알아차리지 못했던 겁니다.

 

끝내 한결같이 친절하지 못했던 내 잘못일까요?

 

그래서 결국 건강한 인간관계를 위해 꼭 필요한 것은 ‘안전거리 확보’라는 것을 반복되는 경험을 통해 뼈저리게 알았습니다. 상대방의 인성을 따지기 앞서 그런 간단한 절차를 두어 내 세계는 물론 새로이 맺은 그와의 인간관계도 원만히 지킬 수 있다는 것을요.

 

얼마 전 6년여만에 다시 연락하기 시작한 호치민의 친구가 요즘 부쩍 전화를 자주 해옵니다. 적당한 예의를 지키면서도 궁극적으로는 주변의 모든 것들(사람 포함)을 이용해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시키려는 그의 성향을 잘 아는 만큼 그가 내게 요구하는 바도 자명합니다. 호치민에서 부업으로 하고 있던 다단계사업을 인도네시아로 넓히고 싶은데 그 교두보로 날 쓰고 싶어하는 것이죠. 그가 나와의 화해를 통해 얻고 싶은 것은 자카르타에서의 내 경험과 인맥입니다.

 

2014~2015년 사이 1년 3개월 동안의 베트남 생활에서 그와 파국을 맞았던 것 역시 그가 내 목적엔 관심 없이 너무 일방적으로 자기 위주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람은 변하지 않습니다. 특히 자신이 어떤 분야에서 한번 성공했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더욱 그렇습니다. 그는 이번에도 내가 자기 목적에 동의하는지 여부는 관심도 없이 내 개인정보를 달라고 일방적으로 독촉할 뿐이죠. 나를 자기 아래의 인도네시아 사업자로 등록하겠다는 겁니다. 아마 조금 지나고 나면, 등록된 사업자는 일단 얼마라도 실적을 내야 하니 물건을 좀 사라고 요구할 것은 불 보듯 뻔한 수순입니다.

 

그래서 지금의 그와 나는 안전한 관계입니다. 적정 거리를 두고 있으니까요. 다시는 그가 도와줄 거라 믿고 베트남에서 1년 3개월을 허송하는 일도 없을 것이고 그가 요구하는 인도네시아의 다단계사업 전개를 위해 내가 휘둘리는 일도 없습니다. 거리를 유지하면 여유가 생깁니다. 그가 독촉한다고 해서 내 마음이 급해질 이유가 하나도 없는 거죠.

 

작년에 밑바닥을 드러낸 악당들과도 마찬가지입니다.

글을 쓰는 사람들, 글과 관련된 사람들이라는 동질감만으로 그 직전까지만 해도 내 세계에 상당히 들어와 영향을 끼치려던 그 진상들을 모두 외곽으로 밀어내고 나니 다시 그들과의 관계에서도 안전이 확보되었습니다. 그래서 요즘 정부에서도 자꾸 이웃과 거리를 두라고 하는 모양입니다.

 

그런 거리두기는 코로나가 종식되어도 계속 유지되어야 합니다.

 

 

2021. 4.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