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으로 살아 가기
사람들 때문에 불편해지는 공간 본문
불편한 장소
대학졸업 직전 대기업 전형을 통과하고 연수까지 마친 후 을지로 2가 본사 건물에 배치된 것이 1986년 초였다. 당시 군대가기 전까지 했던 일은 플라자호텔에 납품되었지만 선도가 살짝 나빠져 훈제되어 다시 포장된 연어를 팔러 다니는 예상 외의 일이었지만 뭔가 과업을 받아 사무실을 나서는 것이 다행스럽게 느껴졌던 것은 신입사원들에게 앉으라고 한 자리 때문이기도 했다.
엘리베이터에서 해당 층에 내리면 왼쪽과 오른쪽에 큰 문이 하나씩 있는데 그걸 열고 들어가면 통으로 뻥 뚫린 사무실이 펼쳐졌다. 신입사원들 자리는 그 문 바로 앞의 책상들. 우린 문이 열릴 때마다 일어나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허리 숙여 인사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이렇게 외치면서.
그게 절대 좋은 아침일 리 없었다. 그 자리에 앉힌 사람들의 의도나 그걸 바라보는 시선은, 신입사원들 한 번 당해보라는 가학적인 장난기, 또 한편으로는 그것도 필수적인 훈련이라 생각하는 꼰대들의 꼬여버린 사고방식(아, 그래서 꼰대구나!), 그리고 그런 신입사원들 모습을 보며 키득거리는 기존 직원들의 비웃음, 연민, 공감능력 높은 사람들이 함께 느꼈던 수치심…… 그런 것들이 뒤섞였다. 전혀 방문판매 훈련이나 경험도 없이 포장된 연어들을 잔뜩 들고 회사 건물은 나서던 우리들은 그날 그렇게 그 책상에서 벗어난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했다.
파산의 후유증에 후달리던 2004년인가 2005년, 자카르타 외곽 빠룽(Parung)이라는 곳의 한 공장에 취직생활이 6개월로 단명했다. 그들이 날 채용한 건 원래 있던 담당과장이 나갔기 때문이었는데 어느 날 공장사장이 그를 도로 받아들였기 때문이었다. 사장은 이제 더 이상 장기 무단결근 없이 일 잘 하겠다며 능글거리는 이차장과 함께 자기 방에서 나오더니 내가 앉은 자리가 원래 이차장 자리라며 나에게 다른 책상으로 옮기라고 했다. 내 입지가 애매해졌다. 하지만 자존심 상하고 상황이 석연치 않다고 해서 쉽게 집어 던지고 나갈 수도 없었다. 당시 내가 거기 붙어 있어야만 가족의 생계를 이을 수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궁지에 몰린 사람을 반드시 짓밟아 버린다. 그런 건 예외가 없다.
간신히 첫 월급날이 되었는데 그가 날 사장실로 불러 던져주는 봉투엔 약속한 월급의 반만 담겨 있었다. 나머지는 언제쯤 줄 거냐 묻자 그의 대답은 이랬다.
“당신은 촉도 없어? 이차장이 나간다고 해서 당신 채용한 거야. 근데 쟤가 계속 일한다잖아? 다른 사람들 같으면 일찌감치 알아서 나갔을 텐데 당신 계속 붙어있는 거 보니 눈치가 심하게 없든가 정말 살기 어려운 모양이지? 그래도 내가 책임감 있는 사람이라 그거라도 주는 거야. 그거라도 받고 일하든가 아니면 따로 살 길 찾으라구. 당신 나이에 꼭 똥인지 된장인지 찍어 먹어 봐야 알겠어?”
사장실을 나왔을 때 우연히 눈이 마주친 이차장이 빙긋 미소 짓는 모습에 난 결국 속이 뒤집어지고 말았다. 화장실에서 그날 먹은 것을 모두 토해내고도 계속 치밀어 오르는 욕지기를 참을 수 없었다.
이차장이 그날 월급을 받고 다시 무단결석을 시작한 후 결국 돌아오지 않자 날 다시 불러 감언이설로 설득하려는 사장의 말이 더 이상 귀에 들어올 리 없었다. 그의 밑바닥을 이미 봐 버렸는데 내 몸이 거기 있다는 것 자체가 더없이 혐오스러웠다.
오늘 다녀온 저녁식사 자리도 견디기 힘든 공간이었다. 대표가 따로 밥을 먹자고 할 때마다 열이면 열 번 모두 거절하는 이유는 자리에 앉으면 몇 시간이고 쏟아져 나오는 개똥같은 인생관과 자기 자랑 때문이다. 특히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모든 사람들을 하대하고 경멸하고 비난하며 차마 입에 담기조차 민망한 욕설을 퍼붓는 그의 말이, 비록 날 향한 게 아니라 해도 정말 듣기 싫기 때문이다. 오늘 어쩔 수 없이 그 자리에 참석한 것은 로펌과 식사하는 공식적인 자리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여지없이 온갖 욕설이 섞인 소리를 시작했는데 앞에 앉은 이변호사는 그래도 일때문에 나온 사람답게 꿋꿋이 잘 참고 있었다. 단지 시계를 가끔 들여다 보며 자긴 빨리 가야 될 사람이란 신호를 주고 있었지만 대표는 정말 몰라서인지 아니면 알고도 그러는 건지 이야기를 멈출 생각이 없었다. 식탁 위의 모든 반찬 위에 그의 침이 튀었다.
가장 불쾌한 것 중 하나는 말도 안되는 에피소드를 지어내 말하면서 내게 자꾸 맞장구 쳐달라며 눈짓으로 신호를 보내는 것이다. 함께 거짓말해 달라는 것이다. 예전에도 그런 일들이 있어 이번에 저 인간과 다시 일하기로 하면서 계약서에 일부러 넣었던 조항을 그가 기억하지 못하는 게 분명했다. ‘갑은 을에게 불법적인 사안, 비윤리적인 사항의 실행이나 조치를 요구하지 않는다.’ 생각해 보면 그의 주사가 딱히 불법적이진 않은 건지도 모른다.
“내가 무섭죠? 그렇죠”
술 먹으면 늘 그렇듯 그는 늘 선을 넘는다. 특히 로펌 변호사가 앞에 앉아 있으니 그는 자길 더욱 과시하고 싶고, 그래서 더 큰 목소리로 한인사회에서 누구나 알 만한 사람들 이름을 대면서 욕설을 퍼부었다. 홀이나 다른 자리에 이 이야기와 관련된 사람이 있을까봐 내가 넌지시 제지하자 그는 더욱 기염을 토했다. 자긴 무서울 게 없는 사람이라며 옛날에 칠성파가 보낸 암살자에게 칼 맞을 뻔했다는, 100% 뻥일 게 틀림없는 헛소리까지 하다가 나온 소리였다.
“네?”
“내가 하는 말이 무섭냐고요?”
험악한 표정을 짓는 그의 얼굴을 보자 피로와 짜증이 확 몰려왔다.
“우습지 무섭겠어요? 저 밖에서 대표님이 자기 욕하는 듣고 있을 사람들이 무서운 거죠.”
“그 사람들이 뭐가 무서워? 욕먹을 놈들은 똑바로 살도록 욕을 해주는 게 맞는 거요!”
“그 사람들 아빠에요? 뭘 똑바로 살도록 해요?”
그는 갑자기 앞에 앉은 변호사에게 급히 웃음을 흘리며 상황을 수습하려 한다.
“우리 배이사가 이렇게 사회생활을 잘 못해요. 이변이 이해해 주세요.”
내가 더 이상 들이받지 않고 그쯤에서 참는 이유는, 그래도 명색이 내가 일해주는 회사의 사장이고 그것도 혼자 취해 주사에 한창인 사람을 다른 사람 앞에서 더 이상 공박하는 것이 그리 바람직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월급은 받아야지. 하지만 그 자리는 더 없이 불쾌하기만 한 공간이고 내가 앞으로도 그의 저녁식사 제의를 건건이 거절할 것은 너무나 자명한 일이다.
결국 자리와 공간이 불편하고 불쾌한 것은 대개의 경우 같은 공간에 있는 사람 때문이다.
불편한 인간들이 없는 공간, 가장 마음 편한 최적의 공간은 그런 곳이다.
거기에 모니터가 많이 달리 랩톱이 놓인 큰 식탁이 있다면 더없이 좋을 것이고.
2021. 4.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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