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으로 살아 가기
명사형 꿈? 동사형 꿈? 본문
꿈을 이루는 삶
안구건조증이 심할 때면 모니터를 보는 게 고역입니다. 눈이 아프다 못해 머리까지 깨질 듯 아파오죠. 하지만 그렇다고 “아, 그래? 좀 쉬었다 해” 하며 봐줄 마감이 아닙니다. 오늘 마감인 원고를 어제 간신히 마무리하고 퇴고만 남긴 상태에서 한숨 돌리고 나니 다른 걸 더 할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로 머리가 아팠습니다. 아침에 일어나고 나서도 두통이 사라지지 않아 ‘파나돌’이라 하는 거의 만병통치에 가까운 두통약(겸 해열제 겸 감기약)을 털어 넣고 다시 모니터 앞에 앉습니다.
어쩌면 이게 옛날에 내가 열망하던 ‘작가’의 생활인지도 모릅니다. 소설이 아니라 보고서를 쓰고 있지만.
군복무를 마쳤을 때 잠시 고민하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대학 4학년 때 내가 곡을 들고 나가 노래를 부른 1985년 외대가요제와, 이름도 몰랐던 용인분교의 후배가 내가 근무하던 부대까지 찾아와 곡을 달라 해서 주었던 것이 1987년 왕산가요제 대상을 타면서 난 당시 딴따라로 나가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역사 선생님이 되고 싶은 마음도 있었습니다. 학교에서 배운 국사와 세계사는 역사상 벌어진 사건들을 암기하는 시간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지금이라면 인터넷에서 얼마든지 찾아보면 역사적 배경과 세밀한 에피소드들이 궁금했지만 선생님들의 기조는 가르쳐 주는 거나 제대로 외우라는 것이었죠. 그래서 역사 선생님이 되어 그 모든 이야기들을 곳곳에 숨어 있는 이야기들을 들여다보고 싶었습니다. 물론 지금 생각해 보면 역사선생님이 아니라 사학자를 꿈꿔야 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작가가 되고 싶다는 열망도 있었습니다. 군 BOQ에서 꽤 많은 습작을 하면서 꿈을 키웠습니다. 내 책상서랍 속에 잔뜩 쌓인 원고가 당시 내가 경험하고 있던 보안부대와의 갈등을 담고 있는 걸 본 학군 선배가 날 보호하겠다면서 그 원고를 갈갈이 찢어 소각장에서 태워버리지만 않았으면 좀 더 일찍 작가가 되었을 지 모릅니다. 아니면 일찍 포기했을 지도요. 뭔 보호가 그렇게 폭력적이었는지.
하지만 한화그룹에 돌아가는 것은 사실 되돌리기 어려운 기정사실 같은 것이었습니다. 이제 전역하면 빠듯한 생계를 꾸려 나가야 할 성인으로써 일정한 수입이 보장될 리 없는 연예 입문이나 소설가, 공부를 더 해야 하는 사학자가 되기보다는 입대 전 취직한 후 휴직상태였던 대기업에 돌아가는 것이 보다 현실적인 선택이었으니까요. 물론 나중에 시간이 지난 후 돌아보니 그게 꼭 최선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군에 남는 것도 선택지 중 하나였습니다. 당시 그렇게 꼬시는 사람들이 꽤 있었는데 내가 군체질이라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사실 사회생활이 복잡하게 꼬이기 시작할 때 재입대를 심각하게 고민해본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내 성향상 만약 내가 군에 남았다면 순조롭게 대령이나 장성까지 승진하기보다는 중간 어딘가에서 누군가와 크게 충돌하는 사고를 내고 군형무소에 들어갔기 쉬울 거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전역 당시 이미 우리 부대를 담당하는 보안부대와의 관계가 이미 많이 틀어져 있었습니다. 군에서 반골이 살아남을 리 없습니다. 쿠데타라도 하지 않으면.
요즘 명사형 꿈이 아니라 동사형 꿈을 가져야 한다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이젠 장래의 희망을 꿈꾸는 것도 그 방식의 패러다임이 바뀌어 가는 모양입니다. 소속이나 정체성을 뜻하는 명사형 꿈보다 그 기능, 하는 일에 방점을 둔 동사형 꿈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죠. 그럼 왜 존재의 색깔을 규정하는 형용사형 꿈은 이야기하지 않을까요?
사실 우리가 명사형 꿈을 꿀 당시 그것은 이미 동사형, 형용사형 꿈을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이돌을 꿈꾸는 중학생이 있다고 하면 그가 어떤 류의 아이돌이 되어 어떤 일을 하려는 것인지도 분명 마음에 담고 있을 테니 말입니다. 그러니 명사형 꿈을 꾸는 것이 역시 맞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좀 구체적으로 동사형 형용사형 부사형 꿈까지 첨가해 좀 더 구체적이고 입체적인 미래상을 만드느 것은 나름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꿈’을 갖는 것이죠. 그게 명사형이냐 동사형이냐 하는 것은 모든 것을 파고들어 분석하고 세분화시키는 세태에 편승한 말장난일 뿐입니다.
영어과를 나온 내가 인도네시아에 흘러 들어와 30년 가까이 살며 현지 역사책을 쓰고 인도네시아 문학을 번역하는 사람이 될 것이란 건 예전엔, 그것도 6년 전까지만 해도 생각도 하지 못했던 일입니다. 세상 사는 건 예측할 수 없다는 반증이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꿈을 갖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청소년들뿐 아니라 우리들도 말입니다. 어쩌면 앞으로 50년쯤 더 살아야 할지도 모르는데 미래에 대한 꿈이 없다면 많이 곤란할 것 같습니다. 물론 요양원에서 일생을 마치고 싶다, 아니 난 집에서 가족들이랑 살다 죽을래…..이런 건 말고 말이죠. 그래서 인생의 1막을 마치고 다시 대학에 돌아가 공부하는 사람들, 시와 문학을 배우는 사람들, 미술학원이나 언어학원을 다니기 시작한 사람들을 보면 존경과 응원의 마음이 절로 생깁니다.
난 지금도 동사형의 꿈을 하나 가지고 있습니다. 그건 어려운 이들을 돕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것입니다. 엄마 영향이 큽니다. 평생을 미남침례회에서 한국에 만든 침례교 진흥원에서 일했던 엄마는 활발한 사회활동을 하면서 외국출장도 많이 다니셨는데 미국출장이 잡혀 있던 어느날 나한테 하루 시간을 빼 누구를 꼭 만나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엄마는 평생 고아들을 후원했고 한달에 한번 정기적으로 후원하는 아이들을 만나 식사하고 필요한 물건들을 사주곤 했습니다. 그게 별거 아니라 해도 그 아이에게는 가장 기다리는 시간일지 모르는데 당신이 출장이라고 그 일정을 취소하고 싶지 않았던 겁니다. 그래서 커다란 원숭이 인형을 안고 나간 그 자리에 중학교 2학년쯤 된 여자아이가 나와 있었습니다. 서로 서먹서먹하기 이를 데 없었지만 난 엄마가 정말 좋은 일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렇게 30~40년 전에 후원했던 아이들이 이제 중년이 되어, 엄마가 치매에 걸려 움직일 수 없게 되자 집에 찾아와 음식도 싸오고 설거지, 청소도 해주고 있습니다. 그때 내가 만났던 그 수줍은 소녀도 엄마를 찾아오는 사람들 중 하나인지 모릅니다.
난 해외에 선교하러 가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옛날 유럽인들이 선교사를 보낼 당시 그들의 본국 사람들은 거의 100% 기독교인들이었습니다. 본국에서 더 이상 선교할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한국에서 기독교인 비중은 불과 30% 정도. 멀리 외국에 나가 선교할 게 아니라 옆집 사는 이웃을 전도해야 마땅하다 생각했습니다.
전쟁과 기아에 허덕이는 난민들과 해외고아들을 지원하는 사람들의 손길은 숭고하지만 우리 곁에도 결식아동들과 학대당하는 아이들이 지천에 널렸는데 그들의 손을 잡아 주기 전에 먼저 외국 아이들에게 손을 뻗치는 것은 순서에 맞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난 먼저 차차와 마르셀의 손을 잡았습니다. 그 아이들이 가장 불행한 처지에 있는 건 아니지만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아이들이었으니까요. 내가 좀 더 힘이 생기면 내 주변에 더 많은 아이들의 손을 잡아주고 싶습니다.
이렇게 글을 쓰다 보면 결국 꿈을 이룬다는 게 과연 뭘까 생각하게 됩니다.
그보다는 내가 어떤 퀄리티의 인간이 되느냐가 더 중요한 것 같아서요. 그렇다면 우린 정작 사람의 색깔을 결정하는 형용사형 꿈을 가져야 하는 건 아닐까요?
2021. 3. 20
PS. 은퇴하면 신학교에 가겠다는 계획도 세운 적이 있습니다. 세상을 왜 이렇게 만들었는지 그분한테 좀 물어보고 싶은데 어디 계신지 몰라서….쿨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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