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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데르베익호의 침몰

<판데르베익호의 침몰> 번역후기

beautician 2021. 4. 21. 11:40

<판데르베익호의 침몰> 번역후기

 

함카의 비판적 시각

 

처음엔 마라 루슬리(Marah Rusli)<시티 누르바야(Sitti Nurbaya)>(1922)와 함카(Hamka)<판데르베익호의 침몰>(1938) 사이에서 조금 고민을 했습니다. 두 작품 모두 식민지 시대에 쓰여진 작품이고 공교롭게도 둘 다 독특한 전통과 관습을 가진 서부 수마트라 미낭까바우(Minangkabau) 지방을 배경으로 하고 있었거든요.

 

번역 후보작으로 최근작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100년 가까이 된 소설들을 후보작에 넣은 것은 인도네시아 문학을 논할 때 비켜갈 수 없는, 현대소설 초창기의 기념비적 작품이란 점에 주목했습니다. 이중 결국 <판데르베익호의 침몰>로 결정한 것은 함카라는 작가가 인도네시아 문화사는 물론 교육, 종교, 정치사에 있어 차지하고 있는 비중을 고려한 결과입니다. 그는 처음엔 언론인이자 작가였고 이후 이슬람 연합체 성격의 마슈미 당을 기반으로 현실정치에 뛰어든 인물입니다. 미낭까바우 지역을 포함한 수마트라의 독립을 도모해 부낏띵기(Bukittinggi)를 중심으로 군사봉기를 일으킨 PRRI 반란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르기도 했죠.

 

그의 인생을 관통하는 하나의 키워드를 들라면 그것은 이슬람일 것입니다. 인도네시아에는 나들라툴 울라마(NU)와 무함마디야(Muhammadiyah)라는 두 개의 거대 이슬람조직이 있는데 함카는 평생을 무함마디야에 몸담으며 여러 직책을 거친 성직자이기도 합니다. 자신을 투옥했던 수카르노 초대 대통령이 실각하고 몇 년 후 서거하자 기꺼이 진심을 다해 그의 장례식을 집전한 인물이기도 하죠.

 

그래서 일견 딱딱하고 종교적으로 흐를 것만 같은 그의 작품들은 실상 가슴 설레는 로맨스를 많이 담고 있습니다. <판데르베익호의 침몰>에서도 훗날 이슬람 큰 선생으로 추앙받게 되는 성직자가 써 내려간 아름답고 섬세한 표현에 깜짝 놀란 것도 사실입니다. 울라마(ulama)가 연애소설을 쓴다고 엄숙한 종교인들의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그는 별로 개의치 않았고 종교적으로도 문제가 없다고 보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테러리스트들의 종교라고 오해하고 있는 이슬람이 사실은 사랑과 관용을 가르친다는 것은 더 이상 비밀이 아닙니다.

 

<판데르베익호의 침몰>이 북부 수마트라 메단 소재 민중의 나침반(Pedoman Masjarakat)’이란 잡지를 통해 연재되던 1938, 30살이 된 함카는 이미 주류 이슬람 대규모 단체인 무함마디야(Muhammadiyah)의 주역이었고 미낭까바우 전통사회의 관례와 풍습에 있어서도 한 점 하자 없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미낭까바우만이 가진 독특한 모계상속 시스템과 그로 인해 파생된 다양한 문제들, 외부인에 대한 고질적인 차별, 여성에 대한 가혹한 속박을 이 책을 통해 강력히 비판한 것에 대해 후대에 그를 연구한 사람들은 무함마디야의 기조를 전파하는 데에 아닷(adat)이라는 단어로 대변되는 현지 전통과 관습이 걸림돌이 되었기 때문이라 분석합니다. 함카 스스로도 당시 무함마디야 대회 연설에서 그런 취지의 발언을 했다고 알려져 있고요.

 

하지만 이 책에 표출된 함카의 비판정신은 종교적인 관점을 넘어, 작가가 인간의 본질과 상식에 더욱 주목한 결과라고도 생각합니다. 늘 주류 사회 속에 머물며 여러 업적과 결과물을 통해 사람들 응원과 칭송에 익숙했던 그가 이 소설 속에서 아버지의 고향에서조차 아낙삐상(anak pisang)이라 불리며 굴러들어온 돌 취급을 받던 자이누딘과 촘촘하기 그지없는 여성에 대한 전통사회의 속박 속에서 진정한 자아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하야티를 조명하며 그 상황을 절절히 묘사한 것은 함카에게 다른 사람의 입장을 십분 공감하는 각별한 역지사지(易地思之)의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라고요. 어떤 이의 작품이 시대를 관통하는 고전이 된다는 것은 그 작품이 발산하는 고결하고도 유려한 아우라가 작가의 공감능력이란 기초 위에 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서부 수마트라에 위치한 미낭까바우 지역 위치

 

한편 미낭까바우의 전통이 너무나 독특하다는 것은 번역에 큰 걸림돌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이 번역 후기를 쓰기 시작할 때 제일 먼저 떠오른 이름은 페페(Pepe)입니다. 반둥 파라향안 대학(Parahyangan University)를 나와 한양대학교 어학원에서도 공부한 페페의 본명은 뿌뜨리 뻐르마타사리(Putri Permatasari). 별명이 페페인 것은 이니셜인 PP를 인도네시아식 알파벳 발음으로 읽은 것이죠.

 

한국어 전공이 아니면서도 유창한 한국어를 구사하는 젊은 통-번역사 페페는 이 책이 포함하고 있는 미낭까바우(Mingakabau) 지역 전통과 관례를 조사해준 친구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페페가 인도네시아인이라 해서 현지 모든 문화에 통달했을 리 없습니다. 페페의 어머니가 수마트라 남쪽 끝의 람뿡(Lampung) 사람이라 하지만 같은 수마트라라 해도 미낭까바우는 전혀 다른 문화를 가진 곳입니다. 그래서 서로 이해가 되지 않는 지점에 대해 카톡이나 전화로 긴 대화를 하며 결과에 접근해 가곤 했습니다. 그건 마치 만화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머리 위 전구에 반짝 불이 들어오는 것 같은 경험이었습니다.

 

여러 차례 퇴고하다 보면 사전 조사된 정보를 바닥에 깔고 초창기에 번역한 앞부분과, 좀 익숙해진 후 번역한 뒷부분 사이에서 뭔가 위화감을 생기는 곳들이 발견되는데 그냥 읽어서는 잘 알 수 없지만 자세히 보면 십중팔구 오역이 있거나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쓴 묘사가 포함된 부분들입니다. 수도 없이 그런 곳에 부딪혔습니다. 그럴 때마다 애당초 내가 왜 그렇게 번역했는지, 그런데 왜 이상하다고 느끼는지, 이런 가능성, 저런 개연성은 없는지 생각의 흐름에 따라 내가 쭉 이야기를 하고 페페가 인도네시아인의 감각으로 대꾸하다 보면 어느 순간 그 문장의 뭐가 문제였는지, 그 문화에서 내가 이해하지 못했던 게 어느 부분이었는지를 깨닫게 되면서 앞뒤 맥락에 딱 들어맞는 번역문장이 완성되곤 했습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시간이 하염없이 소요됐으니 결코 효율적이라 할 순 없지만 오역방지를 위한 최선의 방법이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비슷한 도움을 준 사람으로 악바르 뻐르다나(Akbar Perdana)라는 본격적인 미낭까바우 출신 변호사가 있습니다. 2019년 초 내가 몸담고 있던 조직의 법무팀장이었던 그는 <판데르베익호의 침몰>을 추천해 준 사람들 중 한 명이기도 합니다. 그는 대형 건설회사로 이직한 후에도 자문에 흔쾌히 응해주곤 했습니다. 그래서 사전은 물론 건전한 상식과 대화로도 해결되지 않는 미낭까바우의 난해한 관습과 속담들 대부분에 있어 그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물론 그뿐만 아니라 내 주변의 모든 미낭까바우 출신 지인들을 번역기간 내내 괴롭힌 것에 대해 많이 반성하고 있습니다.

 

이 책이 만약 영화라면 처음 한세예스24문화재단과 인연을 맺도록 소개해준 자카르타 소재 한인니문화연구원의 사공경 원장님과, 가용한 모든 도움과 응원을 아끼지 않은 자카르타 소재 초소형 한인 문학동아리 은영동(隱英洞)’의 이은주 시인, 이영미 작가도 엔딩 크레딧에 올라야 합니다.

 

실제로 인도네시아의 대표적 영화사 팔콘픽쳐스(Falcon Pictures)2018~2020년 기간 3년 연속 로컬영화 흥행순위 1위 영화들을 연출한 파자르 부스토미(Fajar Bustomi) 감독이 제작한 부야 함카(Buya Hamka)’라는 제목의 전기영화 개봉계획이 2020년에 알려졌을 때 참 우연한 일이 벌어진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부야(Buya)란 아랍어에 어원을 둔 아버지란 의미의 경칭입니다. 당초 2020년 개봉 예정이었던 이 영화는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도네시아 상영관들이 반년 넘게 문을 닫고, 영업을 재개한 이후에도 관객들이 돌아오지 않아 2021년으로 개봉이 연기되었는데 어쩌면 이 책과 영화 <부야 함카>는 적도를 사이에 두고 멀리 떨어진 양국에서 때맞춰 서로를 축하하는 의미를 갖게 될 것 같습니다.

 

<부야 함카> 영화 포스터

 

<판데르베익호의 침몰>은 한국외국어대학교 양승윤 명예교수님과 공동번역한 <막스하벨라르(Max Havelaar)>(2019, 도서출판 시와진실) 이후 본격적인 두 번째 문학 번역서가 됩니다. <막스하벨라르>1860년 암스테르담에서 출간된 네덜란드 소설입니다. 그래서 어쩌다 보니 내 정체성이 80년에서 160년쯤 전에 원서가 출간된 작품들만 취급하는 고전전문 번역가로 고착되는 느낌도 듭니다. , 나쁘지 않습니다.

 

최근 에카 꾸르니아완 작가의 <호랑이 남자>, <아름다움, 그것은 상처> 같은 인도네시아 현대소설들도 한국에 소개되고 있는데 이 책도 그간 영미권 작품들이 대부분을 차지해온 한국 서점가의 외국번역서 편식상황 개선에 기여할 또 한 권의 작품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품습니다.

 

같은 목표를 품고 아시아문학 소개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이 책의 번역기회를 허락해 준 한세예스24문화재단에도 큰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소설 <판데르베익호의 침몰(Tenggelamnya Kapal van der Wijck)> 작품소개

 

<판데르베익호의 침몰>은 서로 사랑하는 한 커플의 삶을 통해 미낭까바우의 전통과 관례(adat)가 어떤 이들에게는 분에 넘치는 권력이 되고 또 어떤 이들에게는 심장을 꿰뚫는 비정한 화살이 되는 모습을 때로는 담담하게, 때로는 격정적으로 묘사한다.

 

나중에 함카라는 필명으로 더 잘 알려지게 되는 압둘 말릭 까림 암룰라(Abdul Malik Karim Amrullah)는 고향 미낭까바우에서 개구장이로 자라다가 16살 이후부터 자력으로 자바와 메카를 다녀오며 자립심과 이슬람 신앙을 키웠다. 그는 북부 수마트라의 델리(Deli)에서 이슬람 선생으로 학생들을 가르쳤고 거대 이슬람 단체 무함마디야의 중책을 맡아 남부 술라웨시의 마카사르에서도 4년을 지냈다. 함카는 1935년에 마카사르를 떠나 북부 수마트라의 메단에서 잡지 민중의 나침반’(Pedoman Masjarakat)의 편집장을 맡게 되었는데 함카라는 필명을 쓰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의 일이다.

 

<판데르베익호의 침몰>은 그가 30살 되던 1938년에 이 잡지에 연재했던 소설이다. 책으로 인쇄된 것은 1939년이었고 지금까지도 중쇄가 이어지고 있다. 이 책은 1963년 말레이어로 번역되었고 이후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 학생들의 필독서가 되었다.

 

그의 전작 <카바의 보호 아래(Di Bawah Lindungan Ka'bah)>에서처럼 <판데르베익호의 침몰> 역시 당시 미낭카바우의 부조리한 전통과 관례들을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그는 자이누딘이라는 상징적 인물을 통해 모계상속 시스템을 고수하는 미낭까바우에서 아버지가 미낭까바우 사람이라도 어머니가 외지인이면 그들의 아이 역시 외지인 취급을 받는 문제와 그런 구조 속에서 하찮게 여겨지는 남자의 위상, 그래서 정작 외동아들은 부모의 재산을 상속받지 못하고 마막(mamak)이라 불리는 어머니 쪽 남자형제들이 재산관리의 전권을 갖게 되는 부조리를 지적했다. 한편 하야티는 아무리 최선을 다하고 심지어 스스로의 욕구를 모두 부정해도 결국 전통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마는 미낭까바우 여인들의 초상이다.

 

함카는 이 책을 통해 미낭까바우의 차별적 전통을 비난하는 한편 궁극적으로는 네덜란드에게 강점당한 조국의 독립이라는 목표 앞에서 차별 철폐와 민족의 단합과 단결을 촉구했다.

 

<판데르베익호의 침몰>민중의 나침반에 연재될 당시 꾸타라야(Kutaraja)나 아쩨(Aceh)에 배포할 잡지를 실어 보내면 소설의 다음 이야기를 궁금해한 수많은 독자들이 아예 역에서 줄지어 기다리고 있을 정도로 독자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하지만 일부 보수적인 무슬림들은 울라마인 함카가 로맨스 소설을 썼다는 사실을 비난했다. 하지만 이 작품은 문단의 호평을 받았고 훗날 문학평론가 바크리 시레가르(Bakri Siregar)<판데르베익호의 침몰>을 함카의 작품들 중 최고봉으로 꼽았다.

 

하지만 책이 처음 나온 지 20여년이 지난 1962년에 이르러 이 책이 쟝-밥티스트 알퐁스 카(Jean-Baptiste Alphonse Karr)1832년 작 <린든 나무 아래(Sous les Tilleuls)>의 표절이라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다. 두 소설의 주인공인 자이누딘과 스티브, 하야티와 막달레나 사이, 그리고 스토리 전개에 일부 유사점이 보인다는 것이었다. 표절을 주장하는 이들은 대부분 인도네시아 공산당(PKI)와 연관된 좌익문학조직 레크라(Lekra) 쪽 사람들이었고 우익진영은 적극적으로 함카를 옹호했으므로 두 이데올로기가 문학계에서 충돌하는 양상을 보였다. 특히 인도네시아의 대문호로 통하는 쁘라무댜 아난타 뚜르(Pramoedya Ananta Toer)도 함카를 공격하는 레크라 소속이었으므로 그를 존경하는 이들에게 표절에 대한 확증편향을 키웠다.

 

하지만 문학서적 전문가 H.B. 야신(H.B. Jassin)은 장소에 대한 함카의 묘사가 매우 세밀하고 전작에서의 서술방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어 표절일 리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야신은 소설 <판데르베익호의 침몰>이 외국작품들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미낭까바우의 전통과 관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도 표절이 아니라는 증거로 들었다. 네덜란드 출신 문학평론가 A 테이우(A. Teeuw) 역시 두 소설 사이의 유사점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나 의도된 것이 아니라고 보았고 오히려 <판데르베익호의 침몰>은 온전히 인도네시아 고유의 테마를 가진 오리지널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소설 <판데르베익호의 침몰(Tenggelamnya Kapal van der Wijck)> 작가 소개

 

 

압둘 말릭 까림 암룰라 (Abdul Malik Karim Amrullah)

 

함카(Hamka)로 잘 알려진 압둘 말릭 까림 암룰라(Prof. DR. H. Abdul Malik Karim Amrullah)1908217일 서부 수마트라 아감(Agam)의 딴중 라야(Tanjung Raya) 지역 숭아이바땅(Sungai Batang)에서 태어났다.

 

그는 타왈립(Thawalib) 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후 1924년 자바에서 1년을 지냈고 메카에서 7개월을 지내며 아랍어와 이슬람의 역사를 깊이 공부했다. 고국으로 돌아온 그는 기자생활을 시작했고 동시에 델리의 종교학교 선생으로 일하며 울라마와 문인이 동시에 될 결심을 굳혔다.

 

그는 남부 술라웨시의 마카사르에서 4년 여를 보낸 후 1936년 메단에 돌아와 민중의 나침반이란 잡지의 편집장을 맡아 언론인으로서 위상을 분명히 했고 <카바의 보호 아래(Di Bawah Lindungan Ka'bah)><판데르베익호의 침몰(Tenggelamnya Kapal Van Der Wijck)> 등의 작품을 연이어 발표하면서 작가로서도 이름을 날렸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마자 인도네시아가 식민 종주국으로 복귀하려는 네덜란드를 상대로 독립전쟁을 시작하자 함카는 게릴라전에 투신해 서부 자카르타의 산악과 정글 속에서 네덜란드군에 맞서 싸웠다. 전쟁이 끝나고 인도네시아가 주권을 회복하자 1950년 함카는 자카르타로 들어가 잠시 종교부에서 일하지만 곧 사표를 던지고 본격적으로 정치에 뛰어들었다.

 

1955년 총선을 통해 함카는 마슈미 당을 대변하는 헌정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마슈미 당은수카르노가 내세운 공산주의와 교도민주주 이념과는 정치색이 너무나 달라 수카르노 대통령과 대립하다가 결국 195975일 결국 대통령령에 의해 당이 해체되고 만다.

 

이후 함카는 <민중의 깃발 (Panji Masyarakat)>이라는 잡지를 창간하지만 그 수명은 길지 않았다. 초대 부통령이었던 모하마드 하타가 수카르노와의 정치적 이견으로 결국 사임하고 갈라져 나온 후 우리들의 민주주의라는 제목의 글을 썼는데 그걸 잡지에 실었다가 폐간당하고 만 것이다. 그는 본격적으로 정권의 핍박을 받았다.

 

공산주의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함카와 그의 작품들은 좌익문학단체인 레크라(Lekra: Lembaga Kebudayaan Rakyat 민중문화위원회)의 전방위적 공격을 받았고 그는 급기야 국가전복행위 혐의로 1964년에 수카부미 자택에 연금되었다. 그는 거기서 <-아자르의 해석(Tafsir Al-Azhar)>의 집필을 완료했다. 그후 수카르노가 실각하자 함카도 1966년 연금에서 풀려났다.

 

수하르토의 신질서 시대에 그는 아궁 알-아자르 사원과 RRI(인도네시아 국영라디오), TVRI(인도네시아 국영 TV)에서 설교하는 데에 많은 시간을 쏟았다.

 

그는 1975년 인도네시아 울라마 대의원회(MUI)의 수장으로 선출되었다가 1981519일 그 직을 내려놓은 후 1981724일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해는 자카르타 따나꾸시르 공동묘지에 매장되었다.

 

그는 알-아자르 대학교(Universitas al-Azhar)와 말레이시아 국립대학교(Universitas Nasional Malaysia)에서 명예박사를 받았고 자카르타의 무스토포 대학교(Universitas Moestopo)에서는 그를 큰 선생으로 모셨다. 무함마디아는 그를 기념해 함카 대학교(Universitas Hamka)를 세웠으며 그는 사후에도 인도네시아 국가영웅의 반열에 오르는 영광을 누렸다.

 

 

 

함카 연보

1908 1217일 서부 수마트라 아감(Agam), 숭아이 바땅 지역(Nagari Sungai Batang)에 해당하는 따나 시라(Tanah Sirah)에서 출생. 본명은 압둘 말릭 까림 암룰라(Abdul Malik Karim Amrullah).
1916 자이누딘 라바이 엘 유누시(Zainuddin Labay El Yunusy)가 디니야(Diniyah) 종교학교를 열고 사원(surau)를 중심으로 전통적 교육시스템을 개혁하던 시기에 학교 입학
1918 중학교 중퇴
1920 부모님 이혼
1922 이혼한 부모 사이에서 방황하던 아들의 장래를 걱정한 아버지가 빠라벡(Parabek)의 울라마인 쉑 이브라힘 무사(Syekh Ibrahim Musa)에게 데려가 멍아지(Mengaji-알꾸란 읽기) 공부 사사.
1924 7월 자바섬으로 떠나 같은 미낭 출신인 마라 인탄(Marah Intan), 아버지의 동생 자파르 암룰라(Jafar Amrullah), 알꾸란 선생 끼 바구스 하디꾸수모(Ki Bagus Hadikusumo) 등과 교류, 사레깟 이슬람(Sarekat Islam – 이슬람연합)에 가입해 HOS 쪼끄로아미노토(HOS Tjokroaminoto), 수리요쁘라노토(Suryopranoto) 등의 교사들과도 교류.
1925 족자의 무함마디야 큰 선생이 미낭까바우에 파견한 자형 수딴 만수르와 함께 지부 구축. 그해 무함마디아 빠당빤장 지부의 부지부장 취임.
1927
 
2월 초, 블라완 항구에서 제다(Jeddah)로 출발. 메카(Mekkah) 입성하여 7개월 간 지내며 이슬람과 아랍어 수학.
1928 <시라바야(Si Sibaraya)> 출간
1929 45일 시티 라함(Sitti Raham)과 결혼.
잡지 <시대의 갈망(Kemauan Zaman)>을 창간했지만 5호까지 발행하고 폐간.
이 시기에 <이슬람 수호(Pembela Islam)>, <미낭까바우 관습과 이슬람(Adat Minangkabau dan agama Islam)> 등을 출간
1931 벙깔리스(Bengkalis)에 무함마디야 지부 설립. 마카사르에서 열리는 제21회 무함마디야 대회 준비위원장 취임.
1932 마카사르에 머물며 <이슬람의 의무(Arkanul Islam)>, <라일라 마지눈(Laila Majnun)> 등 집필
1934 서부 수마트라와 잠비, 리아우를 대표하는 중부 수마트라 무함마디야 대의원회 회원으로 승격.
1936 마카사르에서 메단으로 돌아와 민중의 나침반편집장 취임
1938 <카바의 보호 아래(Di Bawah Lindungan Ka'bah)> 출간
1939 <판데르베익호의 침몰(Tenggelamnya Kapal Van Der Wijck)>, <집을 떠나 델리로(Merantau Ke Deli)>출간
   
1944 1942년부터 시작된 일본군 강점 상황에서 동부 수마트라 주둔 나카시마 중장의 고문 역할
1945~1949 인도네시아 독립전쟁기간 동안 지역 및 도시 수호전선(Barisan Pengawal Nagari dan Kota-BPNK) 게릴라전 가담
1949 가족들과 함께 자카르타로 이사
1950 메카로 하지순례를 한 후 인근 아랍국가를 방문하며 영감을 얻어 <성지에서 빛으로 목욕(Mandi Cahaya di Tanah Suci)>, <나일 계곡에서(Di Lembah Sungai Nil)>, <다자강 유역에서(Di Tepi Sungai Dajjah)> 등 세 편의 소설 집필 
1952 미국 외무부 초청으로 미국을 방문한 후 <미국에서의 4개월(Empat Bulan di Amerika)> 집필
1953 끼 망운사르코로(Ki Mangunsarkoro가 이끄는 문화사절의 일원으로 태국 방문 
1954 버마에서 열린 싯다르타 가우타마 열반 2,000년 기념식에 인도네시아 종교부 대표로 참석
1955 총선을 통해 마슈미당을 대표하는 헌정위원으로 선출되어 수카르노의 교도민주주의를 반대하고 모하마드 낫시르(Mohammad Natsir), 모하마드 룸(Mohammad Roem), 이사 안샤리(Isa Anshari) 등과 함께 이슬람 샤리아법 도입을 주장.
1958 파키스탄 라호르(Lahore) 소재 펀잡 대학(Punjab University)에서 열린 이슬람대회 참석한 후 수카르노 대통령 이집트 국빈방문 수행.
1960 817일 수카르노 대통령의 탄압을 받아 마슈미당 해산되며 함카를 비롯한 당지도부 투옥.
1962 9월부터 좌익문학단체 레크라(Lekra)<판데르베익호의 침몰>에 대한 표절의혹 제기.
1967 수카르노 실각 이후인 1130일 정부-종교간 회의를 통해 종교인 탄압금지 요구.
1968 알제리의 아나바 기념 모스크(Peringatan Masjid Annabah)와 스페인, 로마, 터키, 런던, 사우디, 태국을 연이어 방문.
1969 모로코의 라바트(Rabat)에서 열린 이슬람 고위급회의에 인도네시아 대표로 참석해 팔레스타인-이스라엘 갈등에 대해 논의.
1970 수카르노 초대 대통령 서거, 장례식 집전
1974 68일 말레이시아 민족대학(niversitas Kebangsaa)에서 명예학위 수여.
1976 동 말레이시아 사라왁 꾸칭(Kucing)에서 열린 이슬람대회 참석
1975 인도네시아 울라마 대의원회 (MUI) 초대의장 취임
1976 말레이 문학에 대한 이슬람의 영향"이라는 제목으로 말레이시아 국립 대학교에서 열린 말레이시아 문화 및 이슬람 세미나 참석.
1977 라호르에서 열린 무하마드 익발(Muhammad Iqbal) 100주년과 카이로에서 열린 울라마 대회 (Al-Buhust Islamiyah) 참석.
1981 1981519일 인도네시아 울라마 대의원회 (MUI) 의장 사임
1981724일 타계.
자카르타 외곽 따나꾸시르(Tanah Kusir) 공동묘지에 매장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