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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의 맹세 (Sumpah Pemuda, 1926. 10. 28) 본문

인도네시아 현대사

청년의 맹세 (Sumpah Pemuda, 1926. 10. 28)

beautician 2019. 10. 31. 12:37


청년의 맹세



91년 전인 19281028일 바타비아에서 열린 청년회의에서 청년의 맹세(Sumpah Pemuda) 선언문이 탄생했다. 이 의회는 1945817일 독립선언서가 낭독되기 오래 전부터 독립을 위한 젊은이들의 투쟁이 있었다는 반증이다. 젊은이들은 각종 조직을 만들어 활발히 활동했다,.

 

 

인도네시아 모임(Perhimpunan Indonesia)에서 뜨리 꼬로 다르모(Tri Koro Darmo)까지

 

그런 조직들 중 하나로1908년에 만들어진 인도네시아 모임(뻐르힘뿌난 인도네시아)이 있었다. 초창기 이 모임은 단지 네덜란드에서 공부하는 동인도 학생들의 친목모임이었으나 이후 이들은 인도네시아로 돌아가 인도네시아 독립에 중대한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이들 젊은이들은 앞날에 대한 비젼을 함께 나누었고 민족과 종교의 차이로 인해 발생하는 간극을 좁히려 노력했다. 회원들 중엔 훗날 유명인사가 된 이들이 적지 않은데 1913년엔 찝또 망운꾸수모, 수와르디 수르야닝랏(끼 하자르 데완따라) 등도 당시 회원들이었다.




뻐르힘뿌난 인도네시아 (인도네시아 모임)


 

이후 뜨리 꼬로 다르모라는 또 다른 청년단체를 사티만이란 자가 조직해 나중에 청년운동의 중심축이 되었다. 이 조직은 청년모임과 191537일 설립된 학생협회의 출발점이다. 뜨리 꼬로 다르모 조직은 그 이름이 뜻하는 바와 같이 역량, 증거, 헌신이라는 세 가지 가치를 목적으로 했다. 뜨리 꼬로 다르모는 청년들의 시각에서, 그리고 당시 동인도 열도에서 전개되고 있던 상황에 기반하여 모종의 변화를 일으키려 했다.

 

그러던 중 여러 파벌들의 압력과 충돌을 겪으며 조직의 이름은 용자바(Jong Java)로 바뀌었고 자바, 마두라, 발리, 롬복 출신의 젊은이들이 이 조직에 참여했다. 숨빠뻐무다 박물관에서 발간한 <청년의 맹세 45>(45 tahun Sumpah Pemuda, 1974)이라는 책에서는 용자바가 결성된 이후 여러 청년단체들이 탄생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들 조직들 중 상당수는 용 바딱, 용 마나하사, 용 셀레비스, 용 암본, 스까르 루꾼, 용 이슬라민뗀 본, 버따위 청년단, 인도네시아 학생청년단(PPPI) 등등 민족지엽적 성격을 띠면서 서로 일정한 마찰과 알력을 빚었다.

 

 

1차 청년회의 (Kongres Pemuda I)

 

인도네시아 청년들은 1926430일 지금 제1차 청년회의(Kongres Pemuda I)로 알려진 움직임을 통해 그들의 역량을 결집하려 했다. 이 시기에 이르러 젊은이들은 그들의 투쟁이 결실을 맺기 위해서는 모든 파벌들이 하나로 연합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언어통합을 위해 말레이어를 공용어로 사용하자는 의견이 제시된 것도 이 청년회의에서였다. 이 아이디어를 낸 사람은 무하마디 야민으로 그는 활발하게 활동하며 용 수마트라 본드 조직을 이끌었다. 야민은 한 연설을 통해 언어와 문학의 미래 가능성을 위해 공용어로서 말레이어 사용을 제시한 것이다.

 

나는 말레이어가 모든 인도네시아인들에 의해 점차적으로 일상어와 공용어로 채택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인도네시아의 미래 문화도 바로 이 언어로 기록될 것입니다이러한 그의 발언은 <신질서 국가의 지성과 권력> (Cendekiawan dan kekuasaan dalam negara Orde Baru, 2003) 책에도 실려 있다. 그러나 그러한 그의 연설도 청년회의 당시에는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했다. 이는 참가자 각각의 지역적, 민족적 집단 이기심이 아직 너무 강했기 때문이었다.

 

 

2차 청년회의 (Kongres Pemuda II)

 

이런 문제에 대한 자각을 가진 상태에서 이들은 19281027일과 28일에 걸쳐 바타비아(지금의 자카르타)에서 제2차 청년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에서 각 지역 출신 청년들의 생각은 압제자에 대항하는 투쟁이라는 하나의 목표로 모아졌다. 그리하여 이틀에 걸친 이 회의에서 역사에 남을 선언문이 발표되기에 이른다.

 

이 선언을 기안한 인물은 앞서의 무하마드 야민이었다. 청년회의가 진행되는 동안 야민은 한 장의 종이 위에 청년의 맹세’(Sumpah Pemuda)라는 아이디어를 기안해 청년회의 의장이었던 수곤도 조요뿌스삐토에게 제출했다. “"Ik heb een eleganter formulering voor de resolutie (나는 고상한 해결방법을 가지고 있습니다)” 야민은 조곤도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위대한 국가의 아들이자 국가영웅 H 무하마드 야민 교수를 기리며>( buku Mengenang Mahaputra Prof. Mr. H. Muhammad Yamin Pahlawan Nasional RI. 2003)라는 책이 기록되어 있다.




무하마드 야민

 

이에 대해 참석자 모두가 동의하고 청년들의 단결을 촉구하면서 비로서 <청년의 맹세>라는 이름으로 나온 선언문이 탄생한 것이다. ‘청년의 맹세라는 단어 자체는 이 선언문에 등장하지 않는다. 그 전문은 다음과 같다.

 

Pertama:
Kami poetra dan poetri Indonesia, mengakoe bertoempah darah jang satoe, tanah Indonesia.
Kedoea:
Kami poetra dan poetri Indonesia mengakoe berbangsa jang satoe, bangsa Indonesia.
Ketiga:
Kami poetra dan poetri Indonesia mendjoendjoeng bahasa persatoean, bahasa Indonesia.

 

첫째, 우리 인도네시아의 아들과 딸들은 인도네시아 국토를 위해 피흘릴 것을 맹세하며,

둘째, 우리 인도네시아의 아들과 딸들은 인도네시아 모든 민족들을 하나의 나라로 구성할 것을 다짐하며,

셋째, 우리 인도네시아의 아들과 딸들은 공용어로 인도네시아어 사용을 주장한다.

 

이 선언은 이후 네덜란드 식민정부에 대한 인도네시아인들의 독립투쟁에 있어 큰 방향성을 제시하는 모토가 되었고 수카르노와 하타 등 걸출한 독립투사, 건국영웅들도 영향을 받았다.




출처: 일간 꼼빠스

https://www.kompas.com/tren/read/2019/10/28/075634465/hari-ini-dalam-sejarah-kongres-pemuda-dan-lahirnya-sumpah-pemuda?page=all


 

(이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