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으로 살아 가기
What is BEING MYSELF? 본문
레지스탕스로 산다는 것
‘나다움’을 얘기하려면 우선 나에 대한 정의를 내려야 합니다.
난이도가 꽤 높은 주제인 거죠.
잘 생각해 보면 나는 다양한 색깔을 띄고 있는 것 같습니다. 모순된 행동을 하고 같은 사안에 전혀 다른 판단을 했던 것도 기억납니다. 옳다고 생각한 일을 하지 않기도 했고 옳지 않은 게 자명한 데도 끝내 해버린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라는 존재를 물리적으로, 그리고 반세기 가까운 시간을 통틀어 관통하는 특별한 기조를 생각해 내는 게 쉽지 않았습니다. 결국 50여년을 나 스스로를 잘 모른 채 살아왔다는 것만 확인했을 뿐입니다.
간신히 하나 떠오르는 게 있긴 합니다.
그건 ‘반항’이란 단어입니다. 뭔가에 부딪히면 돌아가거나 물결 따라 순리대로 흘러가면 될 것을 그렇게 못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기억이 솔솔 나기 시작합니다.
그 시작이 중학교 2학년쯤이었던 것 같습니다. 학교에서 매일 일기를 써와 선생님께 검사를 받으라 했죠. 난 초록색 볼펜을 준비했습니다. “학교가 왜 내 사생활을 궁금해하죠? 혹시 내 생각이 궁금해 일기를 써오라는 거라면 이런 비민주적인 짓을 하면 안된다는 게 내 생각입니다.” 선생님은 날 불러 반나절동안 귀싸대기를 때렸고 결국 엄마까지 불려와 돼먹지 못한 가정교육을 시켰다며 욕을 먹었습니다.
1987년 첫 대통령 직접선거에서 난 김영삼을 찍으려 했습니다. 그 사람이 누군지 잘 몰랐지만 교회 장로라니 좋은 사람인 줄 알았습니다. 문제는 당시 난 육군중위였고 1번을 찍으라고 강요당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막 시작된 부재자 투표에서 사단 포대 신병 두 명이 김대중을 찍자 작전부사단장 원스타 장군이 헬리콥터를 타고 나타나 포대장 쪼인트를 깠습니다. 난 투표용지 자체를 받지 못했고 우리 부대(제3땅굴을 포함한 안보관광지 관리부대) 실장님이 보안부대에게 압박을 받았습니다. “투표용지 주라구! 내가 계급장 건다는데 무슨 개소리야!” 실장님이 자기 중령 계급장까지 걸고서 날 다시 투표소로 보냈지만 난 역시 2번을 찍었습니다.
문제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어요. 기표소에 모자를 두고 나와 가지러 들어가다가 방금 전 봉해서 제출한 내 투표봉투를 뜯고 있던 보안대 선거관리위원 병장과 눈이 마주친 겁니다. 정훈 대위가 보는 앞에서 이성을 잃고 그 병장에게 이단옆차기를 날린 후 몇 달 동안 날 잡으러 다니는 보안반장을 피해 다녀야 했는데 부대에서 우리 실장님이 난 흘겨볼 때마다 보안대보다 저 분 권총을 조심해야 한다는 생각에 뒤통수가 땡겼습니다. 하지만 육사 출신인 전중령은 사실 전력을 다해 보안대로부터 휘하의 철없는 중위를 보호하던 중이었죠.
부평에서 우리와 거래하던 꽤 큰 봉제공장 사장이 경리 여직원과 야반도주하자 거기 오더를 넣은 한화 의류팀은 뒷처리에 애를 먹었는데 그대 마침 인천 간석동의 작은 봉제공장을 가진 홍사장이란 사람이 나서 밀린 오더들을 쳐내 주었습니다. 실력도 좋고 공임도 저렴했는데 우리 회사는 대기업답게 그를 은인취급 하기보단 벗겨 먹으려 들었습니다. 대량의 오더를 넣어주는 대신 너무 박한 공임을 준 것입니다. 이제 오더를 쳐낼수록 공장은 손해를 보는 상황. 그때 우린 인도네시아에 공장을 지었고 상당량의 오더를 이미 중국으로 뺀 상태였으므로 아쉬울 게 없어진 국내 봉제공장들에겐 뽑아 먹을 수 있는 만큼 뽑아 먹는 게 중요했습니다.
결국 간석동의 공장은 망했고 난 홍사장 얼굴을 볼 낯이 없었습니다. 회사는 공장운영비 명목으로 그 빠듯한 공임에서 선급금을 당겨주었는데 그로 인해 홍사장은 결국 우리 회사에 큰 빚을 지고 말았습니다. 회사가 은인을 빚더미에 앉게 한 것이죠.
법제부에서 홍사장이 맡긴 담보를 돌리자고 요청해 왔습니다. 그는 공무원 퇴직하신 자기 작은 아버지가 인천 달동네에 마련한 집 한 채의 권리증(집문서)을 우리와 거래하기 윈한 담보로 넣어둔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요즘과 달리 그런 담보 문건들은 각 부서들이 각각 관리했고 홍사장의 담보서류는 내 책상 서랍 속에 있었습니다. 그걸 3년 넘게 온갖 욕을 먹으면서도 법제부에 넘기지 않고 깔고 앉은 채 홍사장의 재기를 도우려 했습니다. 대기업이 영세기업의 빚을 탕감해주는 일은 절대 없지만 우여곡절 끝에 회계부처 쪽에서 대손처리 등 기술을 부려 결국 부채 80%를 탕감하면서 결말지었습니다. 그래도 홍사장이 얼마간의 돈을 우리 회사에 내야 한다는 것이 안타까웠지만 그는 작은 아버지 집을 살린 것을 고마워했고 우리 회사는 나를 더 이상 승진시키지 않았습니다.
학교과 군대와 조직을 떠나 내 사업을 하기 시작하자 이번엔 세관과 부딪히고 곧이어 대사관, 한인회와 이런저런 일로 마찰을 빚었습니다. 주로 인터넷에서 필명으로 쓴 글로 공격을 퍼붓곤 했는데 대사관, 한인회와 좋은 관계를 빚고 있는 요즘 내가 그때 그 놈이란 걸 저 사람들이 알면 많이 곤란해집니다.
파산을 겪은 후 다른 사람들 일을 봐주는 알바를 할 때마다 매번 깨진 것도 따지고 보면 내가 고분고분하지 않아서입니다. 좀 틀린 게 보여도 그냥 지나가야 하는데 그걸 못하는 거죠.
그러니 난 굳이 나다움을 찾아 떠날 필요가 없을 듯합니다. 그냥 평생 나답게 살아왔던 것 같으니까요. 그런데 그 ‘나답게’ 산다는 게 사회생활에 그리 도움이 되지 않았던 건 분명합니다. 요즘은 예전의 나다움을 내려놓고 적당한 비열함과 무책임으로 무장한 ‘새로운 나다움’이 개봉박두입니다.
그리고 아무리 내 인생의 키워드가 반항이라 해도 와이프한테는 반항해 본 적 없습니다.
진짜루.
2021. 3.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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