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서와 소설 사이, 그 어디쯤

애당초 내 인생에 뭔가 쉽고 만만한 게 있을 리 없었다.

한국인으로 살아가기

세바시 인생질문 에세이

난 글을 쓸 테니 넌 사과나무를 심거라

beautician 2021. 3. 31. 13:01

납치범에 대한 단상

 

세상이 무너져 내릴 때 어떤 이들은 사과나무를 심으러 갈지 몰라도 골방에 들어가 글을 쓰기 시작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결정이 바보 같아 보일지 모릅니다. 사실 세상이 멸망할 때엔 버둥거리며 뭘 하려 하든 똑같은 바보짓입니다.

 

1997년 불어오기 시작하던 외환위기가 인도네시아를 때린 것은 이듬 해인 1998년이었고, 그것은 시위가 벌어지던 뜨리삭티 대학교에서 군경이 쏜 총에 학생 사망자가 나오면서 한 편으로는 수하르토 대통령을 끌어내리는 민주화운동으로, 또 다른 한편으로는 자카르타를 마치 전쟁터처럼 만들어 버린 도시 빈민들의 폭동으로 번졌습니다. 자카르타에 살던 교민들로서는 이전에 알고 있던 세계가 무너지고 있었습니다.

 

당시 난 한국의 동업자들이 받은 봉제오더를 인도네시아 공장에서 뿌리고 생산과 수출을 감독하는 일을 했습니다. 하지만 서울에서 더 이상 오더를 받지 못하는 상황이니 당분간 알아서 버텨 달라는 요청을 받고 생계를 꾸릴 다른 방법을 찾아보았습니다. 하지만 도네시아 온지 4년 차에 맞은 외환위기 한 가운데에서 장기간 아무런 성과를 내지 못하자 난 본국으로 철수해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돌아갔다면 난 지금 전혀 다른 인생을 살고 있을 것 같습니다. 결국 그로부터 반년쯤 후인 1999년 6월쯤 결국 철수해 숨을 고르기로 합니다. 자카르타에 벌려 놓은 것들을 다 정리하지도 않았고 파트너와 직원들이 아직 사무실에 남아 있었습니다. 하지만 난 이후 자카르타에 돌아갈 수 있을지, 과연 한국에서 직원들에게 월급을 보내줄 수 있을지 자신할 수 없었습니다.

 

그 후 한화그룹에서 함께 나와 동업하던 친구들이 사실은 내가 자카르타에서 고군분투하는 동안 자기들끼리 다른 주머니를 차고 중국으로 생산지를 몰래 바꾸고 급격한 환율 차이로 돈벼락을 맞고서도 나에게만 비밀로 했다는 사실을 알았고 절치부심하던 끝에 어찌어찌 한 제약회사의 인도네시아 지사장이 되어 3개월 만에 다시 자카르타에 돌아가게 됩니다. 그 회사와도 두 달 만에 깨지면서 다시 자카르타에 낙오하게 되죠. 인생 정말 다이내믹합니다.

 

다시 시간을 되돌려 자카르타를 떠나기 전인 1999년 초. 당시 세상이 내게 칼을 겨누고 조여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모든 노력이 무위로 끝났고 더 이상 뭘 해도 같은 결과라는 것을 예상되던 시절. 난 오랫동안 하지 않던 짓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용량이었던 1기가짜리 하드디스크를 장착한 싱가포르 산 랩톱을 열고 글을 쓰기 시작한 것입니다. 군대에서 노래만 불렀던 게 아니라 원고지를 사놓고 소설도 썼는데 – 그 소설은 당시 같이 근무하던 학군 선배가 어느 날 갈갈이 찢어 소각시키고 말았지만 – 그게 1988년의 일이었으니 10년도 더 지난 후의 시도였습니다.

 

세상이 내 머리 위로 무너지고 있는 상황에서 이게 무슨 헛발질이냐고 스스로 생각한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정신없이 살 길을 찾아 산지사방을 두리번거리던 마음을 다잡고 진정시키려면 뭔가 차분한 상황을 만들어야 했는데 명상은 해본 적이 없고 그 시점에 통성기도를 올리는 건 너무 뻘쭘해서 차선책으로 떠올렸던 것이 글을 써보는 것이었죠. 그렇게 쓴 글 몇 편을 딴지일보 게시판에 올렸습니다.

 

당시 딴지일보는 문을 연지 얼마 안된 시점이었지만 그 엄혹한 상황에서도 웃음을 터트리지 않을 수 없는 참신하고도 맹랑한 콘텐츠를 담고 있었습니다. 기사가 실린 홈피 정문의 업데이트는 한 두 달에 한 번 될 동 말 동 했지만 매니아들이 몰려든 게시판은 하루에도 몇 페이지씩 넘어갔습니다. 나한테는 딱 맞는 곳이었죠. 고요한 게시판 첫 페이지에 너무 오래 머물며 시선을 받는 건 부담스러운 일인데 그렇게 마구 넘어가는 게시판에서는 내가 뭘 올려도 금방 몇 페이지 뒤로 밀려나 버렸으니까요. 하지만 그렇다고 읽는 사람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얼마 안되는 사람들이라 해도 랜선 저 반대편 어딘가의 사람들과 그런 식으로 연결된다는 것이 동남아 외환위기를 온몸으로 맞으며 고사되어 가던 시절 그나마 숨통을 트는 일이었습니다. 글을 쓰는 것이 견딜 수 없는 압박을 완화해 줄 수 있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그렇다고 거기서 암울한 얘기를 쓴 건 아닙니다. 오히려 내 처지와는 전혀 상관없는 얘기를 썼습니다. 당시 이슈에 대한 의견, 논평, 어떤 일의 단상……. 그러다가 ‘은이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오래 전 첫 사랑 이야기를 썼는데 갑자기 수많은 감상평이 이메일로 몰려들어 깜짝 놀랐습니다. 독자 게시판에 올린 글을 김어준 총수가 홈피 정문으로 옮겨 내걸었던 것입니다. 그게 13호인가 그랬습니다. 지금은 400호인가 500호까지 나온 걸로 압니다.

 

그렇게 내 글을 맘대로 납치해 간 김어준에게서 이메일이 한 통 도착했습니다. 귀하를 인도네시아 특파원으로 임명하니 앞으로 오직 충성만이 살 길이란 취지의 내용이었습니다. 또 한 번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글쓰기를 이후 한 번도 멈추지 않고 지금까지 쓰고 있습니다. 2002년 파산을 맞았을 때에도 글쓰기는 내게 유일한 위안이었죠. 글 쓰는 이들에게 마감이 시퍼런 칼을 휘두르며 따라붙는 것은 운명과도 같은 일이지만 그래서 그게 마냥 부담스러운 것만은 아닙니다. 한편으로는 고마운 일이죠. 내가 아직 쓸모 있는 사람이란 생각을 하게 만들어 줍니다.

 

김어준은 그때의 일이나 그때 내가 쓴 글을 기억하고 있을 리 없지만 그 친구가 오늘의 내가 있도록 어느 정도 영향을 끼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글을 쓰면, 그것도 밤새서 쓰면, 스트레스 풀립니다.

 

납치범 김어준

 

 

2021. 3.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