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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승리는 치명적 자살행위일까? 유일한 생존의 방편일까? 본문

세바시 인생질문 에세이

정신승리는 치명적 자살행위일까? 유일한 생존의 방편일까?

beautician 2021. 3. 29. 13:04

이건 거의 일제와 군사독재의 논리

 

 

뭔가 일을 일답게 시작하려면 우선 하려는 일의 제목을 정하고 그 일의 본질이 무엇인지 정의하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뭔지도 모르는 걸 추진할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죠.

 

이번 챕터 관련 세바시 강사로 나온 가톨릭대학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이자 긍정학교 교장인 채정호 박사의 이야기가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든 건 그 단어의 정의에 너무 힘이 들어가 상식적인 선을 넘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확신에 차 있었지만 전반적인 강의내용은 ‘도를 아십니까?’라고 묻는 듯했습니다.

 

그는 베트남전 포로로 8년을 버티고 마침내 살아 돌아온 스톡데일 미군 중령이 '긍정적인 사람은 다 죽었다'고 증언한 것을 조명합니다. 곧 풀려 날 수 있을 것이란 제멋대로의 기대를 품었던 미군 포로들이 거듭되는 실망을 겪은 끝에 결국 스스로의 죽음을 재촉했다는 것입니다. 그걸 정신의학에서는 스톡데일 패러독스(Stockdate Paradox)라고 부른답니다. ‘가짜 긍정’이란 개념도 거기서 출발한 것이고요.

 

 

채박사가 말하는 '가짜 긍정'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정신승리'에 가깝습니다. 정신승리란 철저히 졌으면서도 사실은 자신이 이긴 거라고 스스로를 설득하는 정신과 사고의 메커니즘, 현실과 동떨어진 전제나 복선을 깔아 앞으로 뻔히 벌어질 일의 성격과 전개를 자기 좋을 대로 달리 전망하며 확신해 버리는 것을 말하죠.

 

처참한 상황에 처하면 낙담에 빠지는 사람, 독기를 드러내며 복수심을 불태우는 사람, 이해할 수 없는 이상행동을 하는 사람들, 동료들이나 아랫사람들에게 분통을 터트리며 해코지까지 하는 사람들.... 수많은 행태가 표출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채교수는 그 중 정신승리하는 이들을 콕 집어내 그들이 자가발전해 만들어낸 일말의 희망이 그들 스스로를 죽였다고 말합니다.

 

물론 채정호 교수나 스톡데일 중령의 주장이 완전히 틀렸다는 것은 아닙니다. 스톡데일 중령은 헛된 희망을 품지 말고 잔혹한 현실을 직면할 수 있어야만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건 분명 그의 위대한 성품이었으나 누구나 다 그럴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수사망이 좁혀올 때 어떤 이들은 자살을 선택하기도 합니다. 심지어 세상을 전쟁의 광기로 몰아넣었던 히틀러도 권총자살을 했죠. 그런 이들조차도 엄혹한 현실을 마주 대할 수 없었던 겁니다.

 

일상 생활에서 무슨 일만 있으면 정신승리하는 버릇을 가진 이들이 대개의 경우 상당히 짜증나는 존재라는 건 인정하지만 어떤 특수상황에서 그건 다른 이들에게 가장 폐해가 경미한, 어찌 보면 가장 온건한 처신이거니와 그것 말고는 자신의 정신상태를 그나마 온전히 지킬 방법이 달리 없는 이들에게는 최후의 보루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어떤 사업미팅에 가서 논리와 전략으로 철처히 깨지고 불리한 딜에 서명하고 나오면서 상대방도 느끼는 바가 있을 거라며 함께 간 동료를 설득하려 들던가, 다음 딜을 위해 이번엔 일부러 양보했다고 주장하며 안간힘을 다해 정신승리하려는 이들을 보면 그 복잡한 심경을 미루어 짐작하지 못할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편으로서 자신의 무너져 가는 멘탈을 지키기 위해, 남들에게 폐해가 그나마 적은 정신승리의 방식을 선택해 살아가는 이들도 있는 법이고 그렇게 자가발전시킨 긍정의 힘으로 어떡하든 자괴감과 모멸감에서 벗어나려 애쓰는 것입니다.

 

하지만 채교수는 그 부분을 개무시 해버립니다. 채교수가 강의에서 말하는 긍정의 정의는 ‘현실을 수용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합니다. 부정은 현실을 사실대로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것이고요. 즉, 긍정이란 현실을 수용하고 감수하는 자세이며 자신이 운영하는 긍정학교의 교훈은 ‘삶을 긍정하라’라고 합니다.

 

정신건강의학 교수이고 긍정학교 교장이신 분이 살아온 일생을 15분짜리 강의를 보고 평가할 수는 없지만 알제시대, 군사정권시절에서나 각광받았을 만한 그의 ‘긍정’에 대한 정의는 너무나도 패배적입니다. 그런 정의를 바탕으로 한 ‘삶을 긍정하라’는 교훈은 현재 처한 현실을 수용하고 네 처지를 감수하라는 말이죠. 그는 베트남전 포로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죽은 미군포로들을 ‘가짜 긍정에 현혹된 이들’ 정도로 폄하한 겁니다. 난 그가 대단한 지헤와 인생의 비밀을 알려주는 것 같은 표정과 목소리로 진행한 15분 강의를 듣고 좀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의 논리대로라면 강의 중에 잠시 이름이 나왔던 세월호의 경우 뒤집힌 배 속 에어포켓에 갇힌 아이들은 일말의 희망도 품지 말고 임박한 죽음을 받아들였어야 합니다. 결과적으로 그리 되고 말았죠. 저분은 자기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는 게 틀림없어 보였습니다.

 

 

사실 이런 건 확신에 가득 차, 사람들에게 이렇게 살아라 저렇게 살지 말라 얘기하는 자기개발 강사들이 자칫 범하기 쉬운 오류지만 아마 채교수의 경우는 자신의 심오한 철학과 오랜 경험을 15분짜리 짧은 강의에 충분히 녹여내지 못했던 거겠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세바시 강의는 박수를 받으며 끝났지만 난 이 글을 맺으며 박수까지 쳐드릴 수는 없겠습니다.

 

 

2021. 3.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