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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레스와 미친 짓의 상관관계

beautician 2021. 3. 18. 01:35

스트레스를 받을 때 했던 미친 짓들

 

 

난 스트레스 받을 때 이렇게 풀어….라고 말할 만큼 나 스스로를 잘 알고 있지 않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사실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잘 모르죠. 자신에 대한 분명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긴 하지만 그게 현실 속의 자신과 반드시 일치하는 건 아닙니다.

 

스트레스란 압력이죠. 짓누르는 힘.

난 시간이 지날수록 스트레스를 잘 견디는 사람이 되어 가고 있다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부임해온 자카르타 현지법인이 지옥처럼 변해 결국 본사에 들어가 사표를 냈을 때, 2002년 파산했을 떄, 그 파산의 절벽을 힘겹게 기어오르며 온갖 수모를 견디던 2006년 전후엔 몸무게가 5킬로, 8킬로씩 빠졌는데 요즘은 어떤 역경에 처해도 살이 찌니 말이죠. 이젠 살찌는 게 스트레스입니다.

 

어느 새 영화진흥위원회 보고서를 내야 하는 5일이 다가오고 있는데 마감이 다가올 때마다 살짝 맛이 가는 요즘 내 모습을 보면서 내가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이상한 짓을 하던 시절들을 떠올려 보았습니다. 그건 분명 엄청난 스트레스에 방어기제가 발동한 상황이었을 터입니다.

 

<장마비 그치던 날>

   

 

1980년대 후반 임진각에서 자유의 다리를 건너면 나오는 멸공관 건물 뒤 시설관리 독립소대 막사(요즘은 ‘생활관’이라 하죠)에선 귀곡성이 밤하늘에 메아리 치며 위병소 경비병들 간담을 서늘하게 했는데 그건 내가 혼자 쓰는 BOQ 숙소에 스튜디오를 차려 놓고 노래를 부르던 현장이었습니다. 대학 4학년 때 자작곡을 들고 팀을 꾸려 교내 가요제에 나가 노래를 불러 상도 타고 이종환의 디스크쇼에도 나간 적 있었는데 학창시절 잠깐 했던 취미생활을 전방 군대에서 아예 본격적으로 했던 겁니다. 무려 2년 간 곡을 쓰고 노래하고 녹음을 했습니다. 생각해 보면 낮의 군생활이 그렇게 빡셌던 모양입니다.

 

2015년부터 2016년 사이엔 밤을 새며 글을 쓰는 일이 잦았습니다. 베트남에서 1년 3개월을 지내고 자카르타로 돌아왔을 때 당시 이미 기울고 있었지만 자리를 비운 사이 직원에게 맡겨 두었던 미용기기 수입판매 사업이 완전히 소멸해 버렸다는 걸 절감하던 시절이었습니다. 2000년대 초에 한번 겪었던 파산의 경험을 또 다시 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닥쳤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베트남에서도 자카르타에서도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스트레스를 받으면 술을 먹거나 여행을 떠나거나 운동을 하거나 스스로를 학대한다고 하는데 나는 밤새 글을 쓰면 스트레스가 풀렸습니다. 그때 귀신에 홀리기라도 한 듯 온-오프라인에서 온갖 자료들을 뒤지며 1년간은 인도네시아 역사를 파고 들었고 그 다음 1년은 무속과 신화를 공부하며 엄청난 양의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를 글로 썼습니다. 2016년 5월 재외동포문학상에 소설을 한 편 보냈다는 사실도 까마득히 잊어버렸던 그해 8월, 비자 연장하러 싱가포르에 가 있던 중 수상통보를 이메일로 받았는데 그때의 복잡한 심경을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2017년은 <막스 하벨라르>를 번역하던 때였고 ROTC 인도네시아 동문회의 부회장이 되던 해이기도 합니다. 원래 동문회에서 그런 직책을 맡는 것은 이제 꽤 높은 기수가 되었으니 찬조금을 내놓으라는 의미이기 쉬운데 당시 난 뒤늦게 작가의 세계로 막 들어선 초짜였고 가난한 작가가 되기 전에도 이미 충분히 가난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문회에 뭔가 기여해야 한다는 생각은 나중에 강박관념이 되어 편두통처럼 머리 한 쪽을 짓눌렀는데 결국 내가 한 일은 스케치북과 HB, 4B, 8B 연필과 잘 드는 연필깎이를 사서 동문 전원의 초상화를 그리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스스로 1년의 시간을 정했습니다. 어차피 전문 분야도 아니고 워낙 시간이 드는 작업이었지만 사람들 얼굴만큼은 제법 비슷하게 그릴 줄 알았고 그 정도 품이 들어가야 그 기여에 일정한 가치가 깃드는 것이라 생각했죠. 결국 사진이 확보된 동문들 수십 명은 물론, 하는 김에 주변 교민들도 수십 명 그렸습니다. 그리고 2018년 1월 1일이 되면서 원래 정했던 대로 화방 문을 닫았습니다.

 

데일리인도네시아 부부

  

 

사실 스스로도 내가 그런 짓들을 할 지 몰랐습니다.

너무나 소모적이었어요. 하지만 난 충분히 만족했고 당시 날 짓누르던 상황들이 더 이상 스트레스로만 다가오진 않았습니다.

 

모두 눈치채고 계셨겠지만 최근의 스트레스는 마감과 함께 찾아옵니다.

하지만 그게 기분 나쁘거나 버겁기만 하진 않습니다. 목을 옥죄어 오는 마감이란 것도 사실은 내가 아직 할 일이 있고 쓸 모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죠.

 

만약 내가 어느 날 또 다시 곡을 짓기 시작하고 초상화를 그리기 시작한다면 그건 내가 맨 정신으로 견뎌 내기 힘든 스트레스를 겪고 있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그땐 날 좀 위로하고 다독거려 주세요.

 

그런데 요즘 새벽마다 카카오톡을 가득 채우는, 누군가 보내온 시와 건강요법, 성경구절, 유튜브, 동영상들을 볼 때마다 초상화를 그려야겠다는 충동이 사정없이 밀려들곤 합니다.

 

 

2021. 3.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