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으로 살아 가기
살아온 삶의 총량을 투영하는 가치관 본문
가치관은 불치병
한때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와 같은 생각을 한다고 확신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아는 상식에 반하는 일엔 혀를 차며 어처구니없어 하곤 했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 모두 각각 다른 생각과 주장을 가지고 살아가는 게 너무나 당연한 일임을 깨닫지 못한 시절이 어쩌면 누구에게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동문 단톡방에선 70대 전후 선배들이 마치 단체 구성원 전체의 가치관을 대변하는 듯 태극기집회 참석 인증사진을 올리며 서로를 격려하고 찬양하곤 했습니다. 그분들은 우리 모두 마음 한 구석엔 태극기 부대의 가치관을 당연히 공유하고 있을 거라 확신하는 듯합니다.
가치관이란 각자의 세계관에 근거해 형성되는 것이고 그 세계관은 전공분야와 경험, 그리고 자신을 둘러싼 환경과 주변사람들에 반응하고 작용하면서 구축되는 것이란 걸, 전역하던 날 새삼 깨달았습니다. ROTC 단기 복무자들은 같은 날 임관했다가 같은 날 전역하죠. 각자 부대에서 전역식을 마친 친구들은 미리 몇 주 전부터 연통을 돌려 약속을 잡은 서울 시내 모 식당에 모여 서로의 사회복귀를 축하했습니다. 임관 전, 한 몸, 한 형제처럼 느꼈던 동기들이 이젠 다른 세계의 낯선 사람들이 되어버렸다는 느낌을 받은 것도 바로 그 때였습니다.
2년간 함께 학군단 생활을 하면서 우린 대부분이 서로를 가장 잘 아는 친구들이었고 일상과 관심사를 다 함께 공유했는데 전역하고 만난 우리들은 언어의 혼란으로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는 바벨탑 시대의 사람들처럼 서로의 얘기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특전사들은 제3땅굴 의전장교의 경험에 코웃음 쳤고 탱크 몰던 기갑 소대장들은 고지에 올라 적진 좌표를 떠던 포병 관측장교들의 일상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해군이나 공군 없이 다 육군 출신이라 그 정도에 그쳐 그나마 다행이었을까요? 아이러니컬하게도 오랜만의 단합을 위한 그 자리에서 우린 우리들의 삶과 그 세계가 분화해 나가고 있으며 시간이 지날 수록 더욱 멀어져 결국 맞닿지 못하게 될 것을 어렴풋이 직감했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더 흘러 2020년 초 정보학교장 송운수 소장이 전역했습니다. 군에 마지막까지 남았던 동기였습니다. 그가 34년 간의 군복무를 마치고 군복을 벗으면서 우리 동기들은 의식하든 그렇지 않든 다 함께 한 시대를 마감했습니다. 비단 군에서만의 일은 아닙니다. 코오롱 부사장, 삼성전자 전무 등으로 대변되는 직장인 사회 최고봉까지 올랐던 친구들도 하나 둘 퇴진했습니다. 우리들의 시대가 끝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동기들 중 대기업이나 군대 같은 조직사회에서 꼭대기까지 올라간 친구들은 공교롭게도 일정한 공통점이 살짝 엿보였습니다. 학창시절 또는 학군단 시절 그 친구들은 자기 색깔을 거의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자기 주장이 강하지 않았다는 뜻인데 역설적으로 우리 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큰 조직들은 아이디어와 자기 주장이 넘치는 사람들보다 마른 솜뭉치처럼 조직문화와 상관의 지시를 대체로 저항없이 수용하여 체화시키는 사람들을 더욱 선호하는 것이 분명했습니다. 치기어린 정의감으로 회사의 부조리에 맞서거나 구국의 신념 비슷한 것을 품고 회사와 조직을 개선하려던 전면에 나섰던 친구들은 결국 순응하는 이들을 이기지 못했고 그 조직에서 살아남지도 못했습니다. 물론 그 중엔 성공적으로 자기 사업을 창업한 친구들도 있긴 합니다.
물론 치열하게 살았던 그 친구들의 삶을 폄훼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일정한 성공을 거두는 데에 일조한 그 성향과 성격은 본받아야 할 것인지도 모릅니다. 순응하여 조직과 일체가 되어 높은 곳에 다다른 이들은, 누군가의 등에 비수를 꼽고 모든 잘못을 부하와 동료들에게 돌리고 공을 독차지하며 모두를 희생시켜 승진을 거듭한 조직사회의 영웅들보다는 결단코 더욱 훌륭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어쨌듯 그들 역시 이제 그 시대를 마감했습니다.
코로나가 닥치기 반년 전쯤 대기업 현지법인장을 하던 동기와 식사를 하던 중 문정부 보편복지에 대해 그가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아 깜짝 놀랐습니다. "왜 우리한테 세금을 거둬서 나도 모르는 사람들을 도와줘야 해? 그 사람들이 나한테 뭘 해준 게 있지? 대체 우릴 뭘로 생각하는 거지? 호구?"
그 사람들이 네가 파는 핸드폰을 평생 호구처럼 계속 사줬잖아? 이 말이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올 뻔했습니다. 그는 학군단 시절 순진하던 그가 아니었어요. 많은 시간이 흐른 후 같은 식당에서 식사시간을 갖고 있었지만 그의 세계는 이미 나의 세계와 겹치는 부분이 없었습니다. 그는 평생을 대기업 조직에 순응하며 고위직까지 오르면서 그에 걸맞는 경험과 세계관을 갖게 되었으니 거기서 비롯된 가치관이 나와 다른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가치관이 있듯이 도저히 동의할 수 없는 가치관을 가진 사람도 있다는 건 세상의 순리에 속합니다.서로 다른 가치관은 각자 다른 삶을 살아온 삶의 총량을 투영하는 것입니다. 그놈이 바보라서, 악인이라서, 차별주의자여서 나와 다른 가치관을 가진 것이 아닌 것이죠. 그 친구의 말이 한심해 보인만큼 그 친구도 날 한심하게 여기는 부분이 있을 것입니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이미 살아온 인생을 다시 살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고 싶지도 않고요.
그러니 태극기부대 합류인증을 하며 자랑스러워하는 예의 그 선배들의 가치관을 딱히 비난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단지, 우리들도 자신과 같은 가치관을 가져야만 한다고 생각하고 강요하려는 그 사고방식이 돼먹지 못했을 뿐이죠.
다른 가치관에 공감할 필요도 없고 그걸 기어이 뜯어고치려 할 필요도 없습니다.
가치관을 바꾸려면 우선 세계관을 바꿔야 하는데 그건 불가능한 일이에요.
그러니 현격히 다른 가치관을 입에 담는 이들을 보면 몇 마디 구시렁거려 준 후 그냥 하던 일 하면 되지 않을까요?
2021. 3.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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