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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일생의 도전
언젠가부터 도전이란 단어가 본질적으로 다른 의미인 시도와 거의 같은 뜻으로 쓰이게 된 것은 수시로 '도전'을 외처대는 무한도전, 1박2일 같은 리얼리티 TV 예능 프로그램들과 뻑하면 뭔가 도전받았다고 주장하며 성도들에게 도전하는 호전적인 목사님들 때문이라 생각한다.
내가 뭔가 ‘도전해 보았다’고 생각한 것들이 사실은 ‘그냥 해본 것’의 수준을 크게 넘지 못했다.
ROTC 모집에 응한 것, 재외동포문학상에 응모한 것, 미용기기수입판매 사업을 하면서 현지 미용시장과 여성 취향의 ‘벤쫑’들 넘쳐나는 세상에 깊숙이 들어가 봤던 것들도 사실은 한 번 해본 것 또는 어찌하다 보니 그리 된 것이라 감히 도전이라 말하기 어렵다. 인도네시아에 와 만 26년차를 살게 된 것도 처음엔 다니던 회사에서 발령을 내 준 것이니 내가 도전한 것이 아니라 회사가 도전한 것에 가깝다.
그럼 그 동안 난 뭘 도전해 보았던 걸까?
작년 내내 중국어를 공부해 보겠다고 미팅하러 오가는 길, 차 안에서 유튜브 강의들을 열심히 듣던 것도 도전이라 하긴 좀 어렵다. 작년에도 마감에 시달리긴 마찬가지였지만 코로나 초창기엔 그나마 하던 일을 못하게 된 것들이 많아 시간이 남아돌던 차였다. 그것도 원래 역사를 좋아하다 보니 유튜브 역사강의를 들었는데 김성민이란 강사가 중국사를 한 시간에 요약하는 것을 듣다가 그의 맛보기 중국어 강의 공개본을 몇 개 들어본 게 계기가 되었으니 처음부터 마음먹고 본격적으로 시작해 보려던 것도 아니었다. 그나마 당시 중국어를 배우려 한 건 베트남에 다시 가보겠다는 생각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베트남에 1년 넘게 가 있었지만 결국 베트남어로는 아주 짧은 대화조차 제대로 소통하지 못한 채 철수해야 했다. 현지 대학교 어학원을 다니면 좋았겠지만 시간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그럴 여건이 되지 못했다. 독학과 낯 가리는 성격은 내 몸이 물리적으로 이미 현지에 가 있다는 장점을 결국 살리지 못했다. 그런데 당시 호치민에서 사업하던 베트남어과 출신 친구가 군 전역 직후 취직이 잘 안되자 중국어를 열심히 팠다. 베트남어도 기반이 중국어니 중국어 기초를 다져 놓으면 베트남어 공부에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이었다. 팬데믹이 터지자 뜬금없이 그 말이 생각났다.
그런데 도전이 최소한 뭔가를 걸거나 뭔가를 감수하고 다른 기회를 희생하며 하는 남다른 시도를 뜻하는 거라면 중국어를 공부하기 시작한 게 아니라 내가 2014년에 베트남에 간 것이 어쩌면 일종의 도전이었다. 내가 10년 넘게 하며 두 아이들 유학비용을 대주었던 미용기기 수입판매 사업이 거의 막을 내리고, 차제에 전업해 오랜 친구 릴리의 니켈 광산 행정관리를 맡아 하겠다는 계획도 2014년 초 인니 정부가 광물원석 수출을 막으면서 친구와 내가 그 조치에 동시에 발이 걸려 넘어지던 시절이었다. 인도네시아가 내 눈앞에서 야박하게 문을 걸어 잠그고 있었다. 그래서 그해 하반기에 하노이로 날아갔다. 순전히 내 의지에 의한 것이었고 인도네시아를 버릴 준비도 마쳣다. 그런 것이 도전이어야 한다.
물론 1년 3개월 만에 그 도전이 실패로 끝난 건 여러 이유들 중에서 언어 문제도 적지 않았다. 말이 통하지 않는 나라에서 일할 수 있을 리 없는 것이니 말이다. 돌아와 보니 희생할 각오가 되었던 것들은 이미 티끌이 되어 흩어져 버렸지만 하고자 했던 방향전환에 실패한 나는 또 한동안 세상의 모진 풍파를 온몸으로 맞아야 했다. 그리고 나서 5년도 더 지난 후 갑자기 그곳에 가려면 중국어를 먼저 배우는 게 도움될 거라 생각하며 1년 간 중국어 유튜브 강의를 들었다. 물론 제대로 된 중국어는 아직 한 마디도 못한다.
내 도전은 실패로 끝난 베트남행 뿐이었던가?
곰곰이 생각해 보면 전업작가의 길로 들어선 것도 나름대로 도전이 맞다.
공모전에 글을 낸 건 앞서 얘기한 것처럼 ‘그냥 해 본 시도’ 축에 드는 일이다. 정작 도전은 어느 날 난 이제 앞으로 글 쓰는 일을 주업으로 살아가겠다는 결심을 한 것이다.
물론 글 쓰는 것 말고 다른 용역이나 파트타임 아르바이트를 모두 끊었다는 건 아니다. 예전에 회사에 다니거나 다른 사업을 하면서 틈틈이 글을 썼지만 이젠 기본적으로 눈 뜨면 글 쓰는 일로 하루를 시작하면서 틈틈이 다른 용역들을 받아 생계를 충당하는 생활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생계의 패러다임을 바꾸면서 필연적으로 예전보다 수입이 줄어들 상황을 각오하며 결정을 내린 것이다.
물론 다행스러운 일은 있다. 주로 군사관련 글을 쓰는 '펜더'라는 필명의 딴지일보 필진이 있었다. 그 친구가 쓴 많은 글들 중 ‘글이 돈이 되는 기적’이란 기사가 기억난다. 글 쓰고 원고료 받기가 그리 어렵다는 뜻이다. 다른 매체에 비해선 새 발의 피인 원고료를 딴지일보로부터 처음 받았던 것이 불과 몇 년 전의 일이다. 인도네시아 한인회 발행 한인뉴스에도 2년 넘게 인도네시아 현대사를 무료로 연재하는 중이다. 글이 돈이 되는 건 교민매체에서는 대체로 아직도 기적에 속하는 사건이다. 하지만 요즘은 글을 보내는 다른 모든 곳들은 거의 대부분 꼬박꼬박 원천세 떼고서 원고료를 입금시켜 준다. 심지어 딴지일보도. 그러니 글쓰기에 노력과 시간을 들이는 것이 이젠 늘 괴롭기만 하진 않다.
도전은 해본 후에야 그게 정말 도전이었는지, 그냥 해본 일이었는지 알 수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아직도 해보고 싶은 일들이 많지만 감히 ‘도전’이란 이름을 붙이지 않는다. 만약 그 시도를 위해 결과적으로 내가 뭔가 희생할 것을 각오해야 하는 상황이 된다면 그게 바로 도전이었음을 그제서야 깨닫게 될 것이다.
내가 절대 까나리액젓 도전도 하지 않고, 누가 환갑에 신학교를 들어가 심지어 목사 안수까지 받아도 딱히 별반 도전 받지 않는 건 아마도 당초 그들과 나의 ‘도전’이 표기법만 같을 뿐 전혀 다른 뜻이어서 그런 것 같다.
2021. 2.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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