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끌렌더르 몰에 새겨진 낙인

beautician 2021. 2. 10. 11:37

 

자카르타 폭동 당시 최악의 사망자를 낸 몰 끌렌더르 (Mall Klender)

 

 

아시아 외환위기가 터지자 자카르타에서는 1998 5 수하르토 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민주화운동이 일어났고 이에 편승한 도시빈민들의 폭동과 약탈이 벌어졌다. 자카르타 폭동이 공식적으로 1998년 5월 12일에서 15일까지 나흘간 전개되면서 폭도들이 날뛰던 자카르타는 곳곳에서 방화로 인한 화재가 벌어져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며 마치 전쟁터를 방불케 되었고 1200명 넘는 사람들의 목숨도 사그러졌다. 여기저기서 약탈과 소요가 벌어졌고 특히 화교들에 대한 린치와 화교 여성들에 대한 잔혹한 겁탈과 살해가 공공연연하게 자행되었다. 이후 수하르토가 하야한 후에도 전국적인 팽팽한 긴장감은 오래 동안 계속되었고 이로 인해 촉발된 종교분쟁, 종족분쟁이 1년 넘게 열도 전체를 휩쓸며 더욱 많은 희생자 발생을 강요했다.

 

상황이 치안당국의 통제능력을(혹은 통제의지를) 훌쩍 벗어나 있던 1998년 5월 15일에 벌어진 족자 플라자 (Yogya Plaza) 약탈사건 역시 방화와 화재로 이어졌는데 여기서 자카르타 폭동을 통틀어 가장 치명적인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현재 몰 끌렌더르(Mall Klender)’라 불리는 정직 명칭 ‘몰 찌뜨라 끌렌더르(Mall Citra Klender)’은 당시 전소한 ‘몰 족자(Mall Yogya)’를 수리하여 재건축한 곳이다.

 

 

현재의 몰 끌렌더르(Mall Klender)

 

머르데카닷컴 기사에 따르면 그날 오전 몰의 경비원들이 바리게이트를 세워 폭도들의 난입을 막으려 했으나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폭도들은 오전 11시 경부터 마침내 바리게이트를 뚫고 몰 안으로 들이닥쳤다.

 

그들의 약탈행위는 캄캄한 몰 안에서 한 시간가량 계속되었는데 몰은 당시 며칠 간 계속된 폭동으로 정식 개장하지 않은 상태였다고 하나 또 다른 보도에서는 당시 상인들과 손님들도 몰 안에 있었다고도 한다. 아무튼 폭도들이 몰 안에 난입했을 때엔 내부 조명이 꺼진 상태여서 폭도들은 암흑 속에서 약탈을 벌였고 상당수가 방향감각을 잃었다.

 

그런 와중에 6층까지 올라간 폭도들이 침대와 옷가지들을 1층 홀에 집어 던졌고 누군가는 그것들을 모아 기름을 뿌려 불을 붙였다. 여기서 나온 자욱한 유독성 연기로 1층에 있던 사람들 일부가 호흡곤란으로 졸도했고 윗층에서 출구를 찾지 못한 사람들은 창 밖으로 뛰어내리기도 했다. 사람들이 밑에서 이들을 받아주는 광경도 목격되었다.

 

일각에서는 이 화제가 정체불명의 일단의 사람들이 계획적으로 저지른 방화라고 주장한다. 당일 SLTA(고등학교) 학생복장을 한 일단의 청년들이 푸조(Fuso) 트럭에서 기름통을 내리는 것이 목격되었고 이후 화염이 솟아오르며 건물을 타고 오르자 이들은 예의 트럭을 타고 그곳을 벗어났다고 한다.

 

자카르타 폭동 당시 약탈 장면 및 화재가 진압된 후의 몰 끌렌더르 모습

 

그렇게 시작된 불이 격렬하게 번져 건물 전체를 집어삼켰다 그런데 화재가 진압된 후 몰 안에서 완전히 전소되어 신원확인조차 어려운 약 400구의 시신이 발견된 것은 누구에게나 충격적이었다. 이 화재로 목숨을 잃은 사망자 숫자는 정확하지 않다. 수습된 시신이 300여구라는 보도에서 최고 450구라는 기사도 있다.. 워낙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고 당시 시신 수습이나 신원확인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상당수의 시신은 완전히 녹아내렸거나 전소되어 형체가 제대로 남아있지 않은 경우가 허다했다.  자카르타폭동의 변곡점이 수하르토 대통령의 하야선이라 하지만 사실 어찌보면 몰 끌렌더르의 참사가 막무가내로 약탈을 일삼던 폭도들에게 너희도 목숨을 잃을 수 있다는 경종을 울린 측면도 분명히 있다고 보인다.  

 

'인권을 위한 자원봉사팀’이 자카르타 폭동 후 취합한 자료에 따르면 끌렌더르의 족자 플라자(Yogya Plaza) 약탈사건은 자카르타 폭동이 최고조였던 1998년 5월 15일 오전 11시부터 오후 1시 경까지 두 시간 사이에 벌어졌고 이후 방화로 전소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다양한 경로를 통해 구축한 공식 집계에 따르면 자카르타 폭동과 그 후속 치안불안 상황이 벌어지던 1998년 5월 12일부터 6월 2일까지 약 1200 여명이 사망하고 31명 실종되었는데 이중 총기나 도검에 의한 사망자는 27명에 불과했지만 화재로 사망한 이들(화재에 휘말리거나 폭도들에게 겁탈당한 후 불 속에 던져진 화교 여인들을 포함)이 1,190명에 달했다. 족자 플라자 사건이 발생했던 날 자카르타 전역에서 564명이 화재로 목숨을 잃었다고 집계되어 있다.

 

<표1. 1998년 자카르타 폭동 사상자 집계>

날자

사망자

사상자

실종자

총포도검

화재

12 Mei 1998

5

-

16

-

13 Mei 1998

-

-

10

43

14 Mei 1998

12

-

43

-

15 Mei 1998

3

564

6

27

16 Mei 1998

-

84

1

1

17 Mei 1998

4

476

-

1

18 Mei 1998

-

-

-

1

19 Mei 1998

-

55

-

-

20 Mei 1998

-

-

-

1

24 Mei 1998

-

4

-

-

27 Mei 1998

-

5

-

-

28 Mei 1998

1

1

15

-

30 Mei 1998

-

1

-

-

2 Juni 1998

2

-

-

-

Total

27

1.190

91

31

 

신원파악이 제대로 되지 않아 사망한 이들이 누구인지 그 숫자가 정확히 몇 명인지도 자세히 확인되지 않았다. 대부분 폭도들일 것으로 추정하지만 가족들을 구하러 들어간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다고 전한다. 또 한편에서는 당시 겁을 집어먹은 상인들과 손님들은 몰 안 3층으로 대피해 몸을 숨겼다가 화재를 피하지 못했다는 보도도 있다. 하지만 당시 폭동 나흘 째였고 몰이 정상영업하지 않던 상황이었으로 몰 끌렌더르 화재로 사망한 이들의 가족들이 사망자가 폭도나 약탈자가 아니었다고 주장하는 과정에서 여러가지 버전의 사건 배경이 나온 것이라 추정된다.

 

 

화재 진압 후 몰 글렌더르에서 수습된 시신들

 

자카르타 폭동이 남긴 흔적은 이제 대부분 사라졌으나 파괴된 건물들 일부는 오랫동안 방치되기도 했다. 뜨리삭티 대학생들 여러 명이 군경의 총탄에 목숨을 잃으며 촉발된 1998년 5월의 사건은 수하르토 철권정치를 종식시킨 민주화운동의 승리였지만 또 한편으로는, 어떤 기회와 여건이 주어지면 살인과 방화도 서슴지 않고 파괴와 약탈행위를 저지르는 자카르타 도시 빈민들의 민낯을 여실히 드러낸 잿빛 5월로도 기억되고 있다.

 

몰 끌렌더르는 화재 2년 후인 2000년에 다시 건축되어 몰 끌렌더르(Mall Klender)라는 이름으로 바꿔 영업을 시작했으나 인근 주민들에겐 예전의 트라우마가 그대로 남았고 꼬리에 꼬리를 무는 수많은 괴담과 목격담들은 지금까지도 오래된 상처를 드러내고 있다

 

재개장 초기 몰에 손님들이 아직 많지 않던 시절에도 특정시간에 갑자기 많은 사람들이 북적거리며 들썩거리지는 분위기가 느껴지곤 했는데 이는 당시 희생자들의 유령들이 남아있기 때문이라는 말이 돌았다..

 

라와망운으로 가는 27번 앙꼿 버스를 탄 한 승객은 함께 타고 있던 다른 승객들이 아직 전소된 상태로 재건축이 이루어지기 전 상태인 몰 끌렌더르 앞에 내려 그 몰 안으로 사라지듯 들어가는 것을 보고 자신이 유령들과 함께 버스에 타고 있었음을 알았다는 경험담을 전했다.

 

실제로 몰 끌렌더르의 화재사건이 있고 나서 사흘쯤 되는 시점에 인근 앙곳버스를 운행하던 다수의 기사들은 기괴한 손님들을 태우는 집단적인 경험을 했다. 손님들은 처음엔 전혀 이상해 보이지 않았지만 몰 끌렌더르 앞에 내린 이들이 눈 앞에서 홀연히 사라지거나 그들이 버스요금으로 낸 지폐가 나뭇잎으로 변했다는 것이다.

 

몰 끌렌더르의 괴담이 퍼지며 그 앞을 지나는 것조차 사람들이 두려워하던 시절, 몰 주변에 화재나 연기가 보이지 않는데도 매캐한 연기냄새와 함께 어디선가 사람들이 울부짖으며 아우성치는 소리가 들리곤 했다.

 

괴담이 돌기 시작하면 담력시범을 보이려 찾아오는 사람들이 꼭 있기 마련인데 족자플라자 1층 전화박스에 귀신이 출몰한다는 괴담을 들은 두 명의 대학생들이 이를 확인하려 했다. 그들은 몰 안에 숨어들어 1층 전화박스에서  11시경 세 시간쯤 기다렸으나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아 지루해져 막 돌아가려 하던 순간 살이 불에 타는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복도에 켜 있던 전구도 갑자기 불이 꺼졌고 어둠 속에서 타는 냄새가 더욱 강해지면서 몸이 전소되어 뒤틀리고 얼굴이 녹아 흘러내린 한 남자의 모습을 보았다.

 

몰 끌렌더르 주변에서 이런 식의 유령 목격담은 얼마든지 넘쳐난다. 2000년에 마글랑에서 자카르타에 온지 얼마 안된 아버지와 아들이 새벽 두 시경 집에 가려고 몰 앞 정류장에서 앙꼿 버스를 기다리는데 판매원 복장의 여성이 몰 방향에서 걸어와 정류장 의자에 앉았다. 잠시 후 아버지가 급히 아들을 잡아 끌어 정류장을 벗어났는데 이상하게 여긴 아들이 정류장을 돌아보자 여성 판매원은 몸이 반쯤 타버린 모습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고 한다.

 

재건축이 진행될 당시에도 그곳에 귀신이 출몰한다는 소문이 끊이지 않았는데 밤 늦게 그로박(간단한 조리기구를 장착하고 음식재료를 실은 폭이 좁은 리어카)을 끌고 그 앞을 지나던 영세상인들의 목격담이 특히 많았다. 새벽 한시 반쯤 족자 플라자 앞을 지나던 나시고렝 상인이 자신을 불러 세우는 목소리에 돌아보았지만 거기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살짝 겁을 먹은 상인이 그곳을 벗어나려 몇 걸음 옮겼을 때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무도 없던 길가에 한 사람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자세히 보니 옷과 몸이 일부 타버린 남자는 다리도 없이 공중에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재건축을마친 몰에서 일하게 된 한 경비원은 야간경비를 서다가 동료들을 따라 윗층으로 올라갔는데 3층에서 복도 끝을 돌아 사라지는 동료에게 좀 기다려 달라 외치며 뒤를 급히 따라가다가 갑자기 시체냄새가 풍기는 것을 느꼈다. 3층은 폭동 당시 가장 많은 시체들이 발견된 곳이다. 무서움을 느낀 그가 급히 달려 복도 끝을 돌았지만 동료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고 시체냄새는 더욱 강해졌다. 머리가 새하얗게 된 그는 전력으로 달려 도망치듯 1층으로 내려갔다. 동료들이 거기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아무 데도 가지 않고 계속 1층에만 있었다는 것이다. 경비원은 아까 누구를 따라 3층까지 갔던 것일까?

 

넘쳐나는 몰 끌렌더르의 괴담은 2014년 <몰 끌렌더르>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되기도 했다.

 

 

2014 년작 영화 <몰 끌렌더르>

 

많은 사람들이 처참하게 목숨을 잃은 사건들을 얼마 지나지 않아 상업영화, 그것도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호러영화로 만드는 현지 영화제작사들의 무심함이 때로는 사건 자체보다 더 섬뜩하게 느껴지곤 한다. (끝)

 

 

 

참고자료

https://correcto.id/beranda/read/33268/bikin-bulu-begidik-ini-kisah-menyeramkan-mall-klender-di-jakarta-timur

https://id.wikipedia.org/wiki/Kebakaran_mal_Klender_1998

https://id.wikisource.org/wiki/Laporan_Tim_Relawan_untuk_Kemanusiaan_tentang_Peristiwa_Kerusuhan_Mei_1998

 

 

족자 풀라자는 재건축이 되기 전까지 한동안 이런 흉물스러운 모습으로 방치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