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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당초 내 인생에 뭔가 쉽고 만만한 게 있을 리 없었다.

한국인으로 살아가기

매일의 삶

텅 빈 사무실

beautician 2016. 9. 2. 10:30


 

아직도 코린도 건물 5층에 사무실을 두고 있을 때의 일입니다.

 
은행을 나서면서도 찜찜한 느낌이 사라지지 않았어요핸드폰 단추를 계속 누르고 있는 파트너 릴리 역시 짜증스러운 표정이 역력했고요 이 모두가 그날 아침 사무실에서 일어난 사건 때문이었습니다.

릴리가 술라웨시 출장을 마치고 한달여만에 자카르타에 돌아온 것이 바로 전날 밤이었습니다그리고 그 직전엔 3주 동안 유럽출장을 나가 있었죠나 역시 밀려드는 서울손님들 때문에 7월말부터 이미 한달 넘게 손님 수행하느라 사무실에 붙어 있을 시간이 없었어요.

 

예전같으면 내 빈 자리를 릴리가 대신 때우고 릴리가 출장가면 내가 대신 그 자리를 메꾸는 식으로 빡빡하게나마 일을 꾸려 나갔지만 릴리의 고향인 술라웨시에서 목재와 농산물사업을 시작하면서 이젠 나 혼자 자카르타를 떠맡는 상황이 되어 버렸고 그래서 이렇게 손님들이 있을 때면 매일 밤 계속되는 술자리로 아직 숙취가 가시지 않은 새벽부터 사무실에 나와 밀린 회신들을 서둘러 하고 직원들이 출근하기 전에 호텔로 출발하루종일 손님들과 거래선을 찾아 다니며 상담하는 날들이 끝없이 이어졌습니다.. 

바로 앞 전의 손님들이 지난 주말 귀국하고 다음 손님들이 오기까지 아직 3~4일 여유가 있는 상태에 출장에서 돌아온 릴리와 내부협의를 하는 것도 시간을 아끼려면 아침 일찍부터 할 수 밖에 없었어요 그래서 출근한 시간이 아침 7우리끼리의 회의는 9시에 끝났지만 오전 8시반으로 되어 있는 출근시간을 훨씬 넘기고서도 직원들은 나타날 줄을 몰랐습니다


“군기가 빠졌어요. 
 
어제 만들라고 지시했던 서류를 찾느라 직원들 책상을 뒤지고 있는 내 등 뒤에서 릴리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따지듯 그렇게 한마디를 던집니다사실 한달 이상 직원관리를 제대로 못한 셈이니 직원들의 기강빠진 근태는 내 책임이 분명했지요그들의 근태와 업무를 감독할 관리자가 직원 출근시간 전부터 외출하여 하루종일 나가 있어야 했으니 출근시간이 고무줄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출근시간이 훨씬 넘도록 나타나지 않는 직원들의 기강도 문제지만 의류재고업무를 담당하는 아즈미(Azmi)의 책상 위에서 발견한 서류는 나를 더욱 황당하게 만들었습니다


PT. Citrawira Tunggal Jaya 
발신인 ; 아즈미 부장 
제목 ; 뻥끌루(Pengkulu) 커피 견적서
 
 
아즈미는 우리 직원이 맞지만 그의 직함은 부장이 아닐 뿐더러 내 회사 상호도 찌뜨라위라가 아닌 것은 물론릴리가 캐슈넛(Cashnut)을 취급하지만 커피는 취급하지도 않고 뻥끌루 지역과는 더더욱 아무런 거래도 없었어요아주 더러운 느낌이 들기 시작하면서 서류를 들여다보는 릴리의 미간도 더욱 찌푸려집니다


“아즈미너 그동안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었던 거야이 서류들은 뭐야?
 

9시반에 사무실에 들어서던 아즈미는 그 시간에 없어야 할 나와 릴리를 보며 이미 심장이 멈출 듯 놀라 보였는데 내가 서류를 디밀자 이젠 얼굴색마저 흙빛으로 변합니다생각해 보니 이 친구가 수마트라 뻥끌루 출신이었어요
. . 

아즈미를 처음 채용한 것은 순전히 릴리의 강권 때문이었습니다대학시절 릴리의 둘도 없는 친구였다는 그는 반년전 결혼을 앞두고 있을 때 이제 곧 가장이 되므로 일자리가 필요하다고 릴리에게 통사정을 해 왔고 수마트라 출신이라 매사가 분명치 못한 자바출신들과는 다르리라는 기대에 채용했었죠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이 친구는 숫기도 없고 뒤에서 소근거리기를 좋아해 탐탁지 않은 부분이 많이 보이기 시작했지만 릴리가 보증을 하는 사람이니 부족한 데로 일을 맡기고 있던 터였습니다
.
 
“에피는 어디 있어?
 
 
내 전직장에서부터 따라왔던 에피는 이제 사무실에서 가장 중책을 맡고 있었습니다중간에 결혼과 출산그리고 곧 이어 이어진 이혼 등 복잡한 개인사정으로 인해 우리를 몇 년간 떠나 있었지만 강인한 성격과 탁월한 장악력을 나는 높이 샀고 지금은 차량까지 하나 렌트해서 출퇴근 편의를 돕고 있는 중이었어요그런 에피가 다른 직원들이 모두 출근한 9시반이 넘어서도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차 안에 키를 놓고 잠가서 문을 열지 못하는 중이에요어떡해서든 열어 볼 테니 조금만 기다려요. 

휴대폰에서 에피는 그렇게 얘기하고 있지만 그 목소리 뒤로 들리는 거리의 배경음은 이미 차가 지금 도로를 달리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습니다기분이 점점 더 더러워졌습니다.. 

“아무리 나랑 미스터 배가 자리를 비우고 있었다 하더라도 이거 너무한 거 아냐이 사무실 안에 너희들끼리 따로 회사 차려놓고 우리 일이랑 하등 관계없는 뻥꿀루 커피를 팔아나머지도 마찬가지야아무리 작아도 명색이 회사고 쥐꼬리만한 월급으로 너희 몸을 구속할 수는 없어도 그 돈으로 너희 노동력과 시간을 산 셈인데 출근시간조차 엉망으로 지키지 않다니… 난 정말 너희 모두에게 실망했어!! 

갈라질 듯 찬바람이 도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는 릴리는 머리끝까지 화가 나 있었고 직원들은 고개를 푹 숙이고 있을 뿐이었습니다아즈미는 이미 입술마저 파랗게 질리고 있었어요.

 

걸리면 그렇게 겁먹을 짓을…무엇보다도 이 모든 일의 뒤에서 우리가 그토록 믿어 마지않았던 에피가 있었다고 생각하니 배신당했다는 생각이 들끓어 오릅니다물증은 없지만 아즈미 외의 나머지 직원들도 아즈미와 에피의 수작을 옆에서 보고 알면서도 동조했던 것이고 내게는 한마디 보고조차 하지 않았던 것이 불보듯 뻔한 일입니다하지만 일은 이미 벌어졌으니 이젠 또 해결하면 되는 것….  문제는 항상 발생하는 것이고 이번에 좀더 심각한 문제이지만 문제란 해결되기 위해 발생하는 것이라고 난 항상 생각해 왔습니다

“우린 잠깐 은행에 다녀 오겠지만 그동안 너희들 어떻게 처신할 것인지 잘 생각해 봐그리고 아즈미넌 에피 오는 데로 나랑 다시 얘기하자. 

은행에서 사무실 경비를 찾아 나오면서도 내 생각은 이 친구들에게 무슨 말을 어떻게 할 것이며 어떤 조치를 내려야 할 것인가로 치달리고 있었습니다그건 릴리도 마찬가지였겠죠릴리는 이 일에 아스미와 에피가 주축을 이루고 있었다는 사실에 손을 부들부들 떨 정도로 흥분하고 있었습니다.

에피가 처음 결혼을 위해 우리 곁을 떠났을 때 릴리는 가장 친한 친구를 잃었다는 상실감에 며칠간 시름에 젖어 있었던 일도 있습니다그리고 결혼식장에 끝내 나타나지 않은 그 남자가 사실을 이미 가정을 꾸리고 있는 유부남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그 사실을 결코 얘기하지 않은 에피에게 서운함을 느끼기 보다는 같은 여자의 입장에 서서 마음 아파해 주었고 사촌과 결혼하여 전 남자의 아이를 낳았을 때그리고 결국 전 남자에게 돌아가기 위해 사촌과 이혼을 하며 다시 자카르타에 돌아와 이번에는 그 남자를 두고 그의 본처와 끝없는 싸움을 벌이는 동안 항상 에피의 편에 서주었죠그렇기에 그녀가 느끼는 배신감은 내가 느끼는 것의 몇 배였을 것입니다.

 
그녀는 또한 아스미의 행동을 더욱 악랄하다고 느꼈을 것입니다.

그가 갑자기 뻥끌루의 커피를 손댄 것은 십중팔구 릴리의 고향에서 진행되는 신규사업과 이에 대한 나의 전폭적인 지원을 보며 자기보다 더 나을 리 없는(?) 릴리가대학시절엔 별볼 일 없었던 한갓 동창이그것도 여자가프로페셔널한 사업가로 변신하고 있는 것에 대한 한없는 질투가 작용했을 것입니다하지만 그가 모르고 있는 것은 릴리가 가진 사업에 대한 열정과 집중력만나는 거래선마다 단번에 자기 사람으로 만들어 버리는 탁월한 융화력그리고 웬만한 남자들을 훌쩍 뛰어넘는 튼튼한 배짱을 그는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었지요

“사무실에서 전화를 안받아요. 

그렇게 얘기하는 릴리는 불길한 예감을 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고 나 역시 이젠 뭔가 더 큰 문제가 발생하고 있음을 나도 모르게 확신하고 있었습니다전화국 자체의 문제 때문이 아니라면 사무실에서 모든 전화가 응답이 없는 이유는 단 하나뿐이었죠급히 차를 달려 돌아온 사무실의 문은 굳게 잠겨 있었습니다
.

키를 따고 사무실 안에 들어섰을 때의 광경은 아까 아침에 황당한 문서를 발견했을 때보다 더욱 충격적이었습니다.. 직원들이 모두 달아나 버린 것입니다
.. 

텅 빈 사무실에 렌터카 키가 와 있는 것을 보니 우리가 없는 사이 에피가 다녀간 것이 분명합니다아마도 에피는 아침 일찍 뻥끌루 커피 건 상담을 하고 오는 길이었는지도 모릅니다아니면 내 차가 사무실건물 주차장에 있는 것을 보고 우리가 나가기를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르죠아무튼 사무실에 들어온 영리한 에피는 상황을 파악한 후 직원들을 부추겼을 것이고 그래서 커피 건과는 관련이 없었을 다른 직원들도 덩달아 이 대탈주에 참가하게 되었을 것입니다자기들이 없으면 우린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으리라 생각하면서아니면 모든 걸 눈감아 줄 테니 제발 출근해서 일해달라고 사정할 내 전화를 기대하면서…

 

에피는 또한번 그녀의 놀라운 장악력을 증명해 보여 주었고 릴리와 나는 한동안 텅 빈 사무실에 허탈하게 서로 마주보며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가 맨땅에 헤딩 하루 이틀 했나…”
 

그날 저녁 한국관에서 릴리와 소주를 마셔야만 했습니다기뻐도 슬퍼도 화가 나도 소주를 마시는 우리들… 릴리도 이제 거의 반은 한국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아침의 황당함도그 배신감도 저녁이 되면서 객관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사고력이 돌아오자 썰물처럼 조금씩 밀려 나가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어요사실 일손이 딸리면 일하는 시간을 더 늘리면 될 것이고 그것도 모자라면 휴일에도 일하고 잠도 좀 덜자면 되는 것이죠그리고 일에 실패를 겪고 다시 바닥부터 시작하고맨 땅에 헤딩하고헤딩한 데 또 하고그런 일 하는 것에 이미 이력이 나 있기도 했습니다
 
“이제 어떻게 하죠? 
“뭘 어떻게 해더 열심히 하면 돼지 뭐옛날 공장 뒷구석 사무실에서 너랑 나랑 둘이서 일할 때 생각해 봐우리 용됐어.
 

용용 죽었죠.. 

다음 날 두 명의 직원이 돌아왔습니다남들이 나가길래 왕따 당하지 않으려고 호기있게 따라 나갔다는 것입니다하지만 우린 그들을 받아주지 않았습니다아니 받아 줄 수 없었어요내 사무실은 그들이 호기나 부리라고 있는 곳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후 몇 달 동안 우린 정말 눈코 뜰새 없는 시간을 보내지 않을 수 없었어요그런 일이 있었다고 해서 이미 시작한 릴리의 신규사업을 중단할 수는 없는 일이었으므로 직원들에게 나누어 주었던 일들이 모두 내 책상 위로 돌아왔기 때문입니다그러나 새 직원들을 받아 다시 가르치고 준비가 될 때까지 몇 가지 다른 일들은 잠시 중단할 수밖에 없었으니 우린 사실 또 많은 날을 뒷걸음친 셈이 되었습니다.

그 후 거래선으로부터 종종 아즈미의 근황을 듣기도 했습니다이제 미스터 배는 직원들이 없어 일을 더 이상 못하니 곧 망할 것이고 실무는 자기가 다 봤으니 자기를 채용하면 훨씬 효율적이라는 얘기를 하고 다닌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그는 그 후로도 오랫동안 실직 상태로 남아 있어야만 했습니다.

 

당시 그토록 괘씸하게 여겨졌던 에피에 대해서는 시간이 흐르면서 또 다시 측은한 마음이 고개를들었습니다. 에피는 마음 속으로 흑진주라고 여겼던 아름다운 여자입니다그녀가 타고난 어두운 색상의 피부도 그 큰 눈망울과 그 빼어난 아름다움을 가리지 못했습니다그래서 남자들이 그녀를 가만 놔두지 않았고 개인적으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가야만 했거든요그 당시의 그 일은 그녀가 순간 욕심에 눈이 멀었기 때문이었을까요?  아니면 그토록 처절한 절박함에 처해 있었기 때문이었을까요?
 
요즘도 새 직원을 채용할 때면자카르타를 떠나 출장을 가거나 서울에서 손님들이 밀어닥칠 때면 자동적으로 당시의 일을 떠올리게 됩니다.

 

기숙사에서 일하던 가정부들이 일반가정에서는 얼마 일하지 못하는 이유는 사람들이 모두 출근한 후 빈집에서 여유로운 시간에 한껏 빈둥거릴 수 있었던 그들이 일반 가정에서 안주인의 지시와 지속적인 참견을 견디지 못하기 때문입니다그건 비단 가정부만의 문제가 아니라 일반적인 인도네시아인들의 성향인 듯 한데 그래서 회사에서도 관리의 고삐를 늦추고 있다가는 언젠가 그 고삐를 세게 잡아 당겨야 하는 순간에 때로는 이러한 황당한 파국을 초래하기도 한다는 것을 이 사건을 통해 뼈저리게 느껴야 했습니다.

 

한 줌도 안되는 직원들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으니 당시 난 아직 멀어도 한참 먼 상태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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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에서 2003년 상반기를 걸치는 동안 참담한 파산의 경험을 했는데 위의 사건은 그보다 1년쯤 전에 일어났던 일이었습니다.

 

그 후 무서운 빚독촉과 심한 스트레스 속에서도 릴리는 그 후 석탄사업을 거쳐 자원개발사업의 선봉에 서서 인디아의 큰 상장회사의 현지법인장이 되어 그 진가를 발휘하고 있고 당시 덩달아 따라 나갔던 직원들 중 한명인 딜라를 다시 데리고 들어와 일도 시키고 결혼까지 시켰습니다.

 

우린 이 일을 잊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젠 누구도 탓하지 않습니다.

사업이 굴러가지 않는 것은 환경이나 직원 때문이 아니라 관리자가 관리를 제대로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고지를 탈환해야 하는데 소대장 혼자 뛰어 나간다고 탈환되는 게 아니고 막상 소대원들 다끌고 올라갔다가 "이 산이 아닌가벼?" 해서도 안되는 거죠.

 

이제 좋은 직원들을 데리고 관리의 끈을 놓지 않고 쉴새 없이 밀고 당기면서도 가끔 그때 우리가 들어섰던 텅 빈 사무실을 기억하면 실소를 멈출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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