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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당초 내 인생에 뭔가 쉽고 만만한 게 있을 리 없었다.

한국인으로 살아가기

매일의 삶

박해받아 유치장 간 목사님

beautician 2016. 9. 3. 02:37



 

김목사가 이민국 유치장에 갇혀 있다는 얘기를 들은 것은 한국에서 걸려온 송전도사라는 여자분의 전화를 통해서였다.

 

송전도사의 말에 따르면 선교사업을 위해 인도네시아에 입국한 김목사가 인도네시아 정부로부터 종교적 박해를 받아 경찰에 잡혀 갔다고 하며 유치장에서 빼주는 조건으로 큰 돈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송전도사가 내 전화번호를 받아 나를 찾게 된 경위는 백방으로 수소문한 끝에 현직 목사이신 내 아버지와 침례교 선교센터를 통해서였다고 한다.

 

장로교 목사라는 김목사의 구명활동을 위해 침례교 재단을 수소문한 것도 그렇고 경찰에 잡혀 갔다는 사람이 이민국 유치장에 있다는 것도 앞뒤가 잘 맞지는 않았지만 송전도사는 워낙 간곡히 부탁해 왔고 내 아버지의 이름이 몇 번씩이나 언급되었기에 일단은 상황을 파악해 보기로 했다. 남의 일에 간여하지 않는 게 현명하다는 것이 짧지 않은 인도네시아 현지생활을 통해 얻은 교훈이긴 했지만 일단 상황을 알아 보는 것 정도는 어렵지 않은 일이었기에 파트너인 릴리에게 부탁해 이민국 카란티나(Karantina) 유치장을 방문토록 하고 나는 나대로 김목사의 비서 등에게 전화하여 김목사가 잡혀간 배경을 물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여 알게 된 실제 상황은 송전도사가 인지하고 있는 것과는 판이하게 다른 것이었다. 김목사가 체포된 이유는 선교활동과는 전혀 관계없는 이민국법 위반혐의였고 비자기간이 만료되었을 때 출국하지 않고 브로커를 통해 여권에 가짜로 이민국 출입국 도장을 찍었기 때문었다.

 

도착비자제도가 시행되기 한참 전이었고 무비자 체류기간은 60일 이었던 시절이다.

그것은 그 당시 횡횡하던 일반적인 관행이었다. 정식으로 간판을 걸고 영업하는 한국계 브로커들도 종종 이런 방식의 편법을 제시해 오곤 했다. 이들 비자 브로커들은 부패할 대로 부패한 현지 관리들, 특히 이민국 직원들과 모종의 상납고리를 맺고서, 체류비자를 받지 않고서 불법으로 현지 사업을 하고 있는 한국인들이 2개월마다 어디로든 일단 출국했다가 다시 들어와야 하는 불편을 한동안 잘 해결해 주고 있었는데 출국하지 않고도 출국했다가 돌아온 것처럼 여권에 이민국 도장을 찍어 주고 이민국 컴퓨터에도 그렇게 기록을 남겨주는 방식으로 그 수수료가 만만치 않음에도 불구하고 실제 출국비용보다는 훨씬 쌌으므로 적잖은 한국인들이 이 서비스를 사용하곤 했다. 현직 이민국 직원이 결탁되어 있음은 물론이고 경찰들도 그 상납고리의 한 부분을 구성하고 있었음은 분명하다.

 

그러다가 2000년 초부터 이민국 검색이 강화되어 이런 관행이 더 이상 불가능하게 되었고 겁먹은 브로커들이 잠수하기 시작했는데 김목사는 평소 가까이 지내던 리차드 김이라는 비자 브로커를 통해 가짜 이민국 도장을 찍은 것이 그 해 4월의 일이었으니 파국은 이미 그때부터 예견되었던 셈이다. 그것이 김목사가 자카르타의 이민국 유치장에 갇히게 된 표면적인 이유였다.

 

그러나 알게 된 사실은 그것뿐이 아니었다.

 

당시 이민국의 컴퓨터 온라인망이 아직 완성되어 있지 않던 인도네시아에서 누군가 밀고하지 않는 한 이런 범죄는 발각되는 경우가 드물어 검거되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그러나 소위 ‘대사’를 목전에 둔 사람들이 갑자기 체포되어 이민국 유치장에 갇히는 사건들이 발생하곤 하는데 그것은 대개 악당들의 악랄함에 기인한다.

 

김목사가 체포되던 시기에 한 한국인 치과의사가 강제 추방되었다. 물론 치과병원은 외국인 투자종목이 아니었으니 현지법 상 적법한 조치였다고 볼 수 있지만 자카르타에는 역시 외국인 투자종목이 아닌 한국인이 운영하는 가라오케며 식당이며 건강원, 학원, 기원, 심지어 사우나, 미용실 들을 현지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 아이러니라면 아이러니이고 하필 그의 체포 시기가 치과의원 개업을 위해 고가의 치과장비들을 막 들여와 딴중 쁘리옥(Tanjung Priok) 항구에서 통관 중이었다는 점도 그랬다. 그 기계들은 그 치과의사가 강제 추방되고 이민국 블랙리스트에 올라 재입국이 불가능해진 후 누군가에 의해 찢어발겨져 여러 악당들의 주머니 속에 들어갔을 것이다

 

김목사는 당시 매우 복잡한 인간관계를 맺고 있었는데 그 중에는 보고르 지역의 내로라 하는 악당들이 대부분 포함되어 있었고 예의 리차드 김도 그 중 한 명이었다. 그가 목사라는 신분으로서 왜 중고 차량부품을 수입하게 되었는지는 알 길이 없으나 그의 중고 차량부품을 실은 컨테이너가 자카르타 항구에 도착한지 얼마 안된 시점에서 갑자기 집에 들이닥친 이민국 직원들에게 체포되었으므로 김목사의 사건은 위의 치과의사 사건과 묘한 동질성을 내포한다.

목사님은 술이 문제였어요. 거의 매일 친구들이랑 술을 드셨거든요. 인사불성이 될 때까지요.”

 

보고르의 숙소에서 만난 김목사의 비서 시스카는 그의 주벽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 그녀에 의하면 김목사가 교회를 나가는 건 본 일이 없지만 매일 디스코텍이며 가라오케에 가서 하루밤에 수백만 루피아를 쓰는 것이 보통이었다고 하며 리차드 김을 포함한 인근 한국인들과 늘 어울려 다녔다고 한다.  김목사가 한국에서는 뭐라고 말하고 인도네시아에 왔는지 알 수 없으나 그가 인도네시아에 온 목적은 절대로 선교사업 때문이 아니었다. 송전도사를 통해 선교비 명목의 자금 지원을 받고 있던 그가 체포되기 전까지 했던 일은 한국산 차량 중고부품을 수입하는 것이었다.

 

시스카라는 여자의 정체도 좀 수상했다. 김목사나 송전도사 둘 모두 시스카는 비서라고 얘기하지만 그녀가 왜 사무실을 겸한 김목사의 숙소에서 살고 있는지, 왜 김목사의 안방에 시스카의 속옷들이 널브러져 있는지, 왜 그녀가 김목사와 통화할 때 미스터르대신 사양(Sayang – 의역하자면 여보’, ‘자기정도)’ 이라고 부르는 것일까?  그제서야 시스카는 자신이 몇 달 전 김목사와 정식으로 결혼했다고 털어 놓는다. 이건 또 무슨 소린가?

 

그의 구명을 부탁하며 어렵게 돈을 빌려 변호사경비며 유치장 사식비를 보내주는 송전도사는 자신이 김목사의 약혼자라고 밝힌 바 있었다.  이미 전부인과 이혼한 52세의 김목사는 현지에서 어떤 사람에게는 총각이라고, 어떤 사람에게는 한국에 부인이 있다고 말하고 다녔는데 송전도사는 이혼한 사람의 목사직을 박탈하는 장로교단의 규정 때문에 어쩔 수 없었을 것이라고 설명했었다.

 

그러나 실제로 김목사는 그 목사라는 직함에 아랑곳없이 주색에 빠져 여자와 술과 도박에 송전도사가 보내주는 선교비와 생활비를 탕진했고 급기야 현지처까지 들인 후 이를 본국의 약혼자인 송전도사에게는 철저히 비밀로 한 채 계속 선교비 명목으로 돈을 타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 돈이 김목사가 들여온 중고 차량부품 컨테이너의 구매대금이 되었을 것이고 온갖 악당들이 주변에 모여들 만큼 질펀하게 써댄 술값과 몸값과 판돈이 되었을 것이다.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건가…. 어찌어찌 휘말려 김목사를 돕기 위해 뛰는 동안 나는 몇 번씩이나 그렇게 후회하곤 했다.

 

“당신도 가!! 당신도 더 이상 믿을 수 없어! 나한테 돈 뜯어 내려는 거지? 가란 말이야, 이 나쁜 새끼야!!

 

그의 구명을 위해 뛰는 나나 릴리에게 유치장 창살 건너편의 김목사는 걸핏하면 사소한 일에도 정색을 하며 으르렁거리곤 했다.  모든 것이 뜻대로 되지 않고 몸은 구속되어 버렸고 필요한 돈, 풀어야 할 문제들은 산더미 같은 데 꽁꽁 숨겨 놓았던 파렴치한 비밀들이 만천하에 까발려지고 있던 그의 참담한 심경이 이해되지 않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는 완전히 이성을 잃고 있었고 면회를 갈 때마다 그의 피해망상, 과대망상은 도를 더해갔다.

 

사람들을 깊이 알게 되면 될 수록 실망과 분노를 느끼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김목사가 그랬다. 그의 구명활동을 시작하면서부터 알게 되는 사실들이 점점 환멸감을 더하게 할 뿐이었다. 김목사 주변의 악당들은 말할 것도 없고 이민국 직원이 알선한 거만하기 짝이 없는 변호사들이 그랬고, 사모님 행세를 하려 드는 시스카가 그랬고, 돼지우리를 방불케 하는 비좁고 더러운 유치장 안에서 너도 나도 핸드폰을 두드리며 각종 언어로 짖고 울고 소리치며 아수라장을 재현하고 있는 다양한 국적의  수감자들도 그랬다.

 

저 사람 빼내는 건 돈 많이 드는 일이요. 당신들, 돈 낼 자신 없으면 빠지지 그래? 자료 보니까 당신네 회사에도 한국 사람 한 명 있더군. 괜히 휘말리면 재미 없을 텐데 말이지? 미스터 김, 저 사람, 그렇잖아도 요즘 사람들이 많이 찾아오던데 그 사람들이 조금씩만 돈 모으면 2~30만불 쉽게 만들어요. 한국사람들은 꼭 돈 내고 나가요. 늘 그래. 그러니 괜히 나서서 남의 일에 우리 주목 끄는 일 하지 않고 이쯤에서 손 떼는 게 좋을 거요.”

 

자주 찾아가던 릴리에게 어느 날 이민국 담당자가 돌변한 태도로 위협하듯 건넨 말이었단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김목사의 문제를 해결해 줄 유일한 대안이라도 되는 듯 환대하는 분위기였던 그들이 그렇게 태도를 바꾼 것은 어떤 다른 돈줄을 물었기 때문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몇 천 불 수준에서 거의 결론이 나던 순간에 이민국 직원 입에서 나온 2~30만불이라는 금액은 나중에 얘기를 전해 들은 나를 당황하게 했다.

 

“핸드폰 사주고 이젠 손 때요. 이러다간 우린 회사, 일도 못하고 우리들까지 위험해져요.


릴리의 불만이 터졌다. 그간 김목사의 편집광적인 태도와 언행에 그를 어떻게든 도와 보려고 이민국과 대사관을 오가던 나와 내 직원들의 노력이 점점 가치를 잃어 가고 있다는 느낌을 갖고 있던 차였다. 내가 그를 돕기 시작한 것은 이미 그가 유치장에 갇힌 지 3주가 넘어서부터였고 거의 재판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 있었지만 김목사는 누구의 도움도 필요 없이 여전히 돈만 있으면 언제든지 걸어 나올 수 있다고 믿었고, 그런데 지금 당장 나오지 못하는 것은 유치장에서 누군가에게 핸드폰을 도둑맞아 지인들에게 전화를 걸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믿었다. 그 악당들에게 말이다.

 

그는 핸드폰을 사달라고 거의 강요하기에 이르고 외국인에게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언제라도 휘두를 수 있는 현지 이민국의 직접적인 위협이 없었더라도 우린 그의 고집과 피해망상 때문에 거의 포기 상태에 다다르고 있었다. 송전도사가 하루에도 몇 번씩 그에게 전화하여 우리가 시키는 대로 하라도 울면서 부탁했지만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그동안 직접 발로 뛰며 구명활동 전면에 나섰던 릴리가 크게 실망하고 있을 즈음 재판 날짜가 잡혔지만 김목사는 다른 사람이 어느 새 넣어 준 핸드폰으로 온 천지에 전화를 해대었고 얼마 안 있어 그를 유치장으로 몰아넣은 악당들에게 욕을 해대기 시작하면서 한국 방방곳곳 동료 목사들과 교회들에게 구명기금을 요청하고 있었다. 돈만 있으면 당장이라도 유치장을 나설 수 있고 부품을 실은 컨테이너도 악당들에게 뺏기지 않을 수 있다고 믿는 그의 신념은 끝까지 변함 없었다
.

이제 이미 한 달을 넘겨 장기화되어 가고 있던 유치장 생활이 그의 사고방식과 성격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었고 그런 상황을 이해해 주었어야 할 나 역시 그리 큰 포용력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사업에서 돈을 벌지 못하면 당장 밥줄이 끊기는 마당에 날로 노골적이 되어 가는 이민국의 위협까지 불사하며 종교박해와는 관계없이 자신의 불법행위로 인해 구속되고서도 일말의 회개도 없는 한 목사를 위해 사운을 걸 용기도 없었다. 결국 김목사 구명활동은 그의 새 핸드폰과 그가 불러들인 다른 두 사람의 한국인이 맡으면서 난 떠밀리듯 도망치듯 손을 뗄 수 밖에 없었다. 내가 손을 떼겠다고 말 할 때 송전도사는 전화를 통해 불같이 화를 내며. 수고비 한 푼 받지 않고 뛰었던 우리에게 사기꾼이라고 울부짖고 있었다.

 


긴 출장을 마치고 자카르타에 돌아온 7월 중순 어느 일요일 TV 뉴스에 나온 김목사를 보고 나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인도네시아 형무소에서의 5년 징역형을 선고받고 법정을 나서는 김목사를 현지 뉴스기자가 인터뷰한 것이다. 바로 며칠 전 비슷한 혐의로 기소된 한 이라크 인이 2개월 10일의 형을 받은 것에 비해서는 어처구니없을 만큼 과중한 형량이었다.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너무 친절하고 그 동안 저한테 너무 잘해 주었어요.

기자의 질문에 그는 더듬더듬 인도네시아어로 이렇게 뚱딴지 같은 동문서답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어쩌면 형을 선고 받고 나서도 돈만 있으면 언제라도 형무소를 걸어 나올 수 있으리라고 아직도 믿고 있었을 지도.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의 핸드폰과 그의 악당 친구들과 그의 자신만만함은 결국 그렇게 그를 구원하지 못했다. 어쩌면 이젠 정말 목사의 직분으로 돌아가 하나님께 구원을 빌어야 할 때였을 것이다.


그런 일이 있은 몇 개월 후 내가 한국에 가있는 동안 김목사가 우리 사무실을 들렀다는 얘기를 릴리에게서 듣게 되었다. 5년형 선고까지 받고 수감된 그가 어떤 경로를 거쳐 유치장에서 걸어 나오게 되었는지는 듣지 못했다. 아무리 돈으로 좌우되는 인도네시아의 사법제도라고는 하지만 모르긴 몰라도 이미 형이 확정된 범법자를 빼내기까지 매우 유능한 사람들이 적잖은 돈과 공을 들였을 것이 분명하다.

 

그가 온 것이 우리의 노력에 감사를 표하기 위해서였는지 아니면 중간에 손 뗀 것에 대해 따지기 위해서였는지는 모른다. 그건 별로 궁금하지 않다. 그의 컨테이너가 악당들 손에 공중분해 되었는지, 현지처 시스카와 약혼녀 송전도사 간에 어떤 결말을 짓게 되었는지, 그가 아직 인도네시아에 남아 있는지 아니면 블랙리스트에 올라 다시는 인도네시아에 돌아 올 수 없는 처지가 되었는지 그런 것들도 하나도 궁금하지 않다. 단지 존경받아 마땅한 장로교단의 목사로서 지금은 또 어느 나라에서 종교적 박해(?)를 받고 있지나 않을지, 그래서 한국의 교회들은 오늘도 열심히 선교후원금을 모금하고 있지나 않은지, 그것은 좀 궁금하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인도네시아 한인 교민사회의 음습한 구석에 여전히 또아리를 틀고 있는 악당들은 오늘도 여전히 세를 불리며 김목사와 같은 쉬운 먹잇감을 찾아 혀를 낼름거리며 군침을 흘리고 있을 것이란 사실이다.